민심이 곧 천심이라 하였습니다. 민심이란 무엇이고 천심이란 무엇일까요 ?
민심이란 것이, 천심이란 것이 있기는 한 것일까요. 선거철이 되면 한번쯤 반추하여 보는 화두 중의 하나입니다.
이번 4·11 총선에, 충북 지역에서는 4명의 법조인이 출사표를 던졌었습니다.
충북지역의 선거구가 8곳인 점에 비추어 보면 많은 수라고 생각됩니다. 현실에서 법조인은 신뢰와 선망의 대상인 동시에 시기와 경멸의 대상이라는 혼란스러운 존재가 되고 있습니다.
큰 흐름 속에서 법조인은 경멸도 당하고, 비난도 당하며, 사악하고 부도덕한 존재로 매도되지만, 가족·마을·지역사회로 내려오면 상당한 신뢰와 기대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법조인은 가족이나 지역사회에서 언제나 누구나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존재였고 성실과 근면의 표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가족이나 지역사회 차원에서는 사법시험 합격을 커다란 영광으로 여기고 있으며, 그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한 사회를 유지하고 원만하게 이끌어 가는 것은 어차피 80%의 성실한 대중이고, 그와 같은 성실하고 모범적인 대중의 표상이 우등생으로 각인된 법조인이기 때문에, 가족이나 지역사회에서 법조인은 나름대로의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정치 입문을 강하게 권유받게 되고, 그것은 가족이나 문중의 차원 또는 그가 기반하고 있는 지역사회의 욕망으로 대치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자의반 타의반으로 많은 법조인들이 정치에 발을 들여 놓게 되는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라면 법조인의 정치참여는 비극일리 없습니다. 정치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대중들과의 소통과 창조의 세계이기 때문에, 정치인은 확실한 사명감은 물론 역사와 사물의 이치를 꿰뚫어보고 시대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높고 깊은 비전이 있어야만 하는 때문일 것입니다. 한 지역, 한 국가를 이끌어 갈 확실한 비전이 없는 정치인은 지역주민의 애경사나 챙기는 사람 좋은 이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비전이라는 것이 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일까요? 개인적으론 정치적인 소양도 부족하지만, 도무지 한 사회를 이끌어 갈 비전을 제시할 자신이 없어 정치는 꿈도 꾸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쯤에서 다시 민심, 천심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민심, 천심은 시대정신 또는 역사의식과 맞닿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민중들 욕망의 최대 공약수가 민심일 수 있을 터이고, 어디론가 도도하게 흘러가고 있는 역사의 방향이 천심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민중들의 욕구는 너무나 다양하고, 그 최대 공약수라는 것도 지극히 막연합니다. 시대의 흐름이나 역사의 방향에 이르면 더욱 막막하기만 합니다.
예민한 일급 정치인은 시간과 공간의 작디작은 기미에서 천의를 읽습니다. 그러나 그가 느낀 작은 기미가 천의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후일에 결과만 남을 뿐입니다. 그것은 운명일까요 ? 아니면 능력일까요 ?
이쯤 되면 역사적 허무주의에 빠질 수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인류는 역사를 창조하여 왔고 지금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이는 역사와 시대정신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뇌한 수많은 깨어있는 사람들의 덕분이었습니다. 깨어있는 사람들의 선두에 정치인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정치인에 대하여 그렇게 비난하고 불신하면서도 정치에서 초연할 수 없고, 정치의식이 필요한 이유일 것입니다.
충북 지역에서 출마한 4명의 법조인에 대한 선거결과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성공과 실패의 원인은 무수히 많이 있겠지요. 그럼에도 지극히 성실하고, 나름대로 지역민의 기대를 배경으로 출마한 법조인들의 성적표가 그리 좋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상당히 의아하고 실망스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습니다.
개인의 고통이나 좌절을 넘어, 우리 사회가 한 선택이 천심이었을 지에 대한 의문이 함께하는 것도 고통스러움의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그러나 개인의 고통과 실망을 넘어 “역사에는 승자와 패자가 공존하며, 성공과 실패사이의 간극이 그리 크지 않다”라는 사실을 명심한다면, 현실정치에 참여한 우리 동료 법조인들의 시도자체가 상당한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그 분들의 아픈 좌절이 역사에 가치 있는 기여를 하였을 수 있다는 점에서, 조그마한 위안과 희망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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