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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행동하는 예수의 잔영이 비치는 배의철 변호사“주말 알바 뛰더라도 공익 변호사로 일할 것”
엄상익 공보이사  |  eomsangik@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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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호] 승인 2012.04.24  15: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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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연수원에서 독특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공익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생기고 그를 돕겠다고 수많은 연수생과 교수들이 일정액의 기부를 약정했다는 것이다. 출세욕이 가득한 이기적인 엘리트 집단 속에서 이변이 발생한 것이다.
그 중심에 배의철 변호사가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열정에 불타는 에너지 가득한 30대 중반의 청년변호사라고 했다. 성경을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효모가 빵 전체를 부풀린다. 배 변호사가 바로 그런 사람 같았다. 나도 그 나이에 변호사를 시작했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바늘구멍 같았고 사회의식도 없었다. 어떻게 하면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까만 궁리했었다. 당시 내가 일하던 서소문 건물의 도로 건너편 명지빌딩에는 조영래 변호사의 사무실이 있었다. 내가 있는 건물 윗층에는 박원순 변호사가 있었다. 그들은 이미 세상을 깊숙이 보고 자신을 태워 빛을 내는 촛불 같은 변호사들이었다. 그리고 3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다. 조영래라는 인물은 변호사 세계의 전설이 되었고 시민운동을 하던 박원순은 서울시장으로 국가적 지도자가 되어 있다.
언론은 배의철 변호사를 제2의 조영래로 점찍고 있었다. 사무실로 찾아온 배 변호사를 만났다. 얼굴에 아직 소년의 밝은 미소가 남아있는 동안(童顔)이었다. 후리후리한 체격에 서글서글한 인상이었다. 그와 마주앉아 얘기를 했다.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얘기해 줄 수 있어요?”
정의에 일찍 눈뜬 사람들에게는 대개 남모르는 상처가 숨어있다. 그건 독한 가난이기도 하고 독특한 고통일 수 있었다.
“전 교도관의 아들입니다. 전에는 간수라고 했죠. 우리 집은 가난했습니다. 교도소에서 나누어주는 건빵을 많이 얻어먹고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우리가 고척동 목욕탕 옆집에서 세를 얻어 살았는데 그 집에서 쫓겨나 어머니가 등에는 나를 업고 형의 손목을 쥐고 안양천 근방을 셋방 얻으러 진종일 다니던 일입니다.”
성장배경을 솔직히 말할 수 있는 그는 확 열린 사람이었다.
“성장하면서 남다른 상처나 경험이 있다면 어떤 걸까요?”
“고등학교 3학년 초 자율학습시간에 선생님에게 무지무지한 폭행을 당하고 자퇴했습니다. 저는 문제아도 아니었고 그냥 얌전한 보통의 학생이었습니다. 공부도 잘하는 편이었지요. 그런데 전날 마신 술기운이 빠지지 않은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다가 제가 조는 걸 보고 트집 잡아서 시범적으로 패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게 무지막지했죠. 몽둥이를 휘두르고 주먹으로 까고 엎어진 나를 발로 차고 밟고 했죠. 너무 심하게 얻어맞아 병원에 실려 가서 급하게 척추수술까지 하고 6개월을 입원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그건 교육적인 의도로 때리는 체벌이 아니라 폭력이었죠. 분노한 아버지가 선생님을 고소했어요.”
의외의 얘기였다. 인격이 부족한 교사가 있다는 말만 들었었다. 그가 잠시 말을 끊고 생각하다가 계속했다.
“아버지가 고소를 하니까 학교와 우리집안이 묘한 적대관계가 됐죠. 학교 측은 아버지를 선생들을 상대로 돈을 뜯어내려는 나쁜 사람으로 몰아 버리더라고요. 억울하게 맞기만 했는데 학교 선생님들은 한편이 되어 수사기관에 나를 반항적인 불량학생으로 모략하더군요. 나를 때린 선생님의 변명이 내가 전교 10등의 모범생인데 사랑으로 때린 거라고 했죠. 거짓이었어요. 그런 현실이 서글펐습니다. 합의를 해주고 고소를 취하했습니다. 그리고 학교를 그만뒀습니다. 그해 수능을 못치르는 바람에 다시 공부를 해서 다음해 검정고시를 통해 연세대 경영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런 환경과 경험이면 일찍 세상이 보였겠군요?”
나도 그와 비슷한 과정을 겪은 과거가 떠올라 물었다.
“대학 때 강의실에서 내려가다가 우연히 특례 입학한 장애학생들을 봤습니다. 혼자 이동을 할 수도 없고 수업을 받기도 불가능했습니다. 인권동아리 학생들 여러 명이 휠체어를 들고 삼사층 계단을 올라가고 내려가고 해야 하니까요. 결국 장애학생 입학은 시설과 여건은 마련하지 않은 채 생색만 낸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학 2학년 때 상암동 판자촌 주민들이 ‘우리는 빈민인데 도와달라’고 우리 대학생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월드컵 경기장을 만들기 위해 그곳에 있던 판자촌을 철거하기 시작한 거죠. 철거현장을 가보게 됐습니다. 용역이란 이름의 깡패들이 와서 주먹을 휘둘렀습니다. 주민들은 판자촌 주변에 폐타이어로 벽을 쌓아놓고 저항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기름을 뿌려놓고 용역들이 점령하면 불을 붙여 그 속에서 다 타 죽겠다고 결사항전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죠. 저는 당시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주민들이 다른 곳으로 가서 막노동을 하고 살면 되지 왜 그러나’ 하고 의문을 가졌죠. 저는 과외를 하면서 생활비와 용돈을 편하게 벌어 쓰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제대로 이해 못한 겁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들이 그곳의 터전을 잃으면 당장 길거리 거지가 돼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주거대책도 없었고 또 거기 살아야만 그들이 일할 수 있는 노동현장을 갈 수 있는 겁니다. 결국 저항하던 그 사람들이 구속되는 걸 보면서 안 됐다는 마음이 들더군요. 그 후에 번쩍거리는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과 거기서 흘러나오는 환호성을 들으면 씁쓸한 기분이 들더군요. 축구도 보러 가지 않았어요.”
이미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그의 운명은 다른 길을 가게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계속했다.
“대학시절은 교회에도 열심히 다니고 학생회 활동도 부지런히 했습니다. 등록금 인하운동을 벌이는데 플래카드도 만들고 대자보도 붙이고 그랬죠. 대학 3학년 때였어요. 총학생회장은 4학년이 하는 건데 총학생회장이 디스크로 입원하게 되자 뒤에서 그냥 도와주던 3학년인 저보고 전면에 나서라는 겁니다. 제 의지와는 다르게 연대와 고대의 노동절 연합시위에서 대표자가 되어 버렸고 그날 이후 저는 졸지에 수배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운명의 흐름이 바뀌어 버린거죠.
사실 총학생회나 운동을 하는 학생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도 탐독하고 사상가적 성향을 가지고 있죠. 총학생회장도 NL계열과 노동운동을 중시하는 PD계열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저는 그런 이념적 사상적 지표가 없는 크리스천이었을 뿐입니다. 제 생각은 예수같이 그냥 약자를 도와주자는 단순한 생각이었습니다. 선배들처럼 사상서적을 읽지 않았습니다. 총학생회장을 하니까 남들이 저보고 공산주의자냐고 하기도 했죠. 그때마다 저는 크리스천이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크리스천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세상을 지향하는 겁니까?”
“이념으로 갈라서서 서로 치고 받고 하는 데는 사랑이 없습니다. 부자들을 무조건 적대시하고 분노하는 건 또 다른 악마가 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 가진 자들이 나눌 줄 알고 함께 사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있다고 사회의 소수자나 약자를 사회악같이 인식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는 문둥병자, 고아, 과부, 맹인들을 고쳐줬고 위선과 부패가 가득한 세상에 대해 저항하기도 했습니다. 다 같이 함께 이 세상에 살면서 사랑하고 평등의 수준을 높였으면 하는 겁니다. 사상을 가진 선배들은 저에게 실체가 없는 신에게 십일조를 바치는 걸 이해못하겠다고 했죠. 저는 어려운 이념 얘기나 정권투쟁보다는 사랑하면서 살면 인권투쟁이 절로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죠. 믿음, 소망, 사랑이 저의 신조라고 했습니다.”
“수배생활과 그 이후는 어떻게 살았죠?”
“학교 안에 숨어 나가지 않고 일 년 간 버틴 후에 자수형식을 취해 기소유예처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평화운동을 하던 친구가 있는 청주로 내려가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총학생회장을 할 때부터 노동자들의 파업현장을 많이 찾아갔습니다. 붉은 띠를 머리에 두르고 허공을 향해 주먹질을 하는 걸 보면 섬뜩한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그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이해가 되기도 하고, 그런 것들이 소중하구나 하고 깨닫기도 했죠. 노점상들의 연합시위도 가봤습니다. 그 사람들이 협조해 달라고 했죠. 현장에서 떡볶이들이 길바닥에 내팽개쳐지고 아주머니가 털석 바닥에 주저앉아서 엉엉 우는 걸 보면 이상한 거예요. 불법영업은 맞는데 불쌍하고 동정이 가는 겁니다.
대학졸업 후에도 지방에서 시민사회운동을 계속했습니다. 장애인들을 위한 야학도 하고 평화운동, 교육운동을 했습니다. 지방에는 활동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 제가 여러 분야 운동의 네트워크를 담당하기도 했죠.”
“그러다 고시공부를 했는데 왜 그랬죠?”
“거리에서 데모도 많이 하고 서명운동을 전개해서 그 결과물을 가지고 청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걸 하면서 과연 이렇게 한다고 세상이 바뀔까 하는 회의가 들더라고요. 매일 시위를 하고 서명운동을 해도 정책은 바뀌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게 정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도는 어떻게 해야 바뀌나를 살폈죠. 결국 법이 만들어져야 되더라고요. 모든 정치 행위의 결말은 법의 영역으로 현실화되는 걸 깨달았습니다. 차라리 법적으로 대변해 주고 입법정책에 반영되게 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고 결론을 내고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고시 공부할 여건은 됐나요?”
“아버지, 어머니는 제가 하루라도 빨리 취직하길 원하셨어요. 아버지 박봉으로 형을 유학시키는데 제가 공부한다고 하니 기가 막히신 거죠. 집에 도움을 받을 처지가 못됐죠.
헌책방에서 법서를 구입해 신림동으로 들어가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돈이 없으니까 학원을 가지 못했어요. 시험이 끝나고 나면 수험생들이 버리는 책들이 독서실 주변에 쌓여있었죠. 그걸 주워다가 읽었습니다. 사귀는 여자 친구가 피아노 레슨을 하면서 생활비에 도움을 줬어요.
밥도둑질도 했어요. 새벽 6시쯤 고시생 식당으로 가면 일하는 아주머니가 없죠. 빈 도시락 두 개를 가지고 가서 아침 밥표 한 장을 내고는 점심 저녁밥과 반찬까지 도시락에 넣어가지고 나와 그걸 먹었죠. 더러는 아침에 근처 교회를 가서 새벽기도 하고 거기서 주는 밥을 먹기도 했습니다. 기도할 때 제가 공부를 하더라도 사회를 위해 그 지식을 쓰이게 해달라고 빌었어요. 마흔 살까지 공부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다른 길을 열어달라고 하나님께 기원했죠. 그런데 생각보다 훨씬 일찍 합격을 시켜 주신 겁니다.
학원에 가면 그곳에서 가르치는 것에만 집착하게 되는데 저는 이책 저책 주운 걸 읽어가니까 폭이 다양해졌던 것 같습니다. 한번은 제 여자 친구가 책을 줍는 걸 보고 눈물이 글썽해서 새 책을 여러 권 사주기도 했었죠.”
“사법연수원 생활은 어떻게 했죠?”
“연수원에 가니까 이기주의가 팽배한 느낌이더라고요. 연수원은 자신들의 출세를 위한 곳인 것 같았어요. 조, 반, 자치회의 일들을 모두 공부 때문에 꺼리는 것 같았어요. 대학 때부터 그런 데 익숙해서 그런지 일들이 모두 내게 떨어지더라고요. 내가 안 한다고 하면 남에게 떠넘기는 셈인데 그러긴 싫었습니다.
다들 평가시험을 준비할 때 혼자 수학여행을 준비하기도 했죠. 연수원 안에 인권법학회와 신우회가 있었는데 그곳에 가입한 사람들이 비교적 마음이 따뜻했어요.
그 모임들에서 공익을 전담하기를 원하는 연수생들 문제가 거론됐습니다. 그런데 공익변호사가 되려고 해도 가서 일할 곳이 없는 겁니다. 그런 일을 하는 합동법률사무소 공감 같은 곳에서는 더 이상 변호사를 뽑을 계획이 없다고 하고요. 공익변호사가 되려면 스스로 대출받아 그 일을 하는 수밖에 없는 겁니다. 로스쿨 쪽에도 국민을 위한 변호사가 되겠다는 친구들이 있는 걸 알았습니다. 그 무렵 ‘공익변호사 라운드 테이블’이라는 회의가 네 번 개최되고 그곳에 가서 현재 활동을 하는 기독변호사들의 모습들을 봤습니다.
공익전담변호사들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재정적 지원방안이 문제더라고요. 그걸 선배들이 해 줄 수 없다면 차라리 우리들이 직접 주말에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고 주중에 공익변호사를 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주말에 돈을 벌고 주중에 공익변호사를 한다는 게 무슨 말이죠?”
“제 사촌누님이 신문배달을 하면서 목회일을 하는데 신문배달일도 한 달에 100만원을 받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벌어서 작은 교회를 꾸려나가는 겁니다.
변호사들도 신문배달이나 복대리 알바, 논술첨삭 알바 그런 걸로 돈을 벌어 공익활동을 해도 될 것 같아요. 같은 연수생들과 교수들에게 그 취지를 얘기하고 기부를 약속해 달라고 하는 운동도 전개했죠. 강의실마다 기부약정서를 놓고 서명 받았죠. 기금을 내는 것도 공익활동이라고 했습니다. 연수생들이 동참했고 교수님들도 기부를 하셨죠. 그렇게 해서 3억이 넘는 돈이 만들어 졌습니다.”
이미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남과 달랐다. 가장 이기적일 수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거금을 만드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나는 시원시원하게 말이 나오는 그의 얼굴에서 장래 탄생할 새로운 지도자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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