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시가 있습니다.
“꾸지람과 비방을 받으며 자란 아이는 비난하는 것을 배우며/ 적대감 속에서 자란 아이는 싸움질을 잘하고/ 질투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란 아이는 죄의식을 갖게 되며/ 놀림을 받으며 자란 아이는 부끄러움과 수줍음을 잘 타게 됩니다// 관용 속에 키운 아이는 인내할 줄 알고/ 격려 속에 자란 아이는 자신감과 신뢰심을 갖게 되며/ 칭찬을 받으며 자란 아이는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공정한 대우를 받고 자란 아이는 올바름(正義)을 배우며/ 안정감 속에서 자란 아이는 믿음을 갖게 되고/ 인정을 받으며 자란 아이는 자신을 사랑하고 긍지를 느끼며/ 포용으로 키워진 아이는 세상에서 사랑을 발견하는 법을 배웁니다.” -‘꾸지람 속에서 자란 아이는’, 도로시 로 놀테(1924~2005) 作
로이어(Lawyer)는 단지 변호사(Attor ney, Solicitor)만이 아닌 법률로 교육받은 사람(법조인)을 의미합니다. 법률전문가인 셈이죠. 물론 세상에는 법률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저는 많은 법조인들과 더 많은 당사자들을 만나 왔습니다. 저 또한 비법조인들에게 늘 부탁을 받는 입장이었고 그 이야기를 잘 들어서 전달해야 하는 역할을 해왔던 겁니다. 하지만 듣는 능력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무심히 끄덕끄덕 하면서 “에이, 법에 대해 뭘 모르시네. 안 되겠어”라는 생각을 하는 경우도 많았지요. 어떤 경우에는 당사자를 혼내면서 사건을 제가 이끌어 가버리곤 했습니다. 역시나 법정에 가면 그런 당사자들은 현명하신 판사님, 명철하신 검사님께 꾸지람을 듣곤 했습니다. 꾸지람을 들은 의뢰인(당사자)은 “무식하다”는 것을 확인했는지 기가 푹 죽어서 그때부턴 제가 하는 이야기에 순응하는 듯 보였습니다. 이처럼 저뿐만 아니라 여러 법조인들은 당사자들을 꾸짖고 그 잘못을 지적하곤 했습니다. 그 순간 당사자는 교육수준과 나이·인격을 불문하고 ‘꾸지람을 받은 아이’가 되어버렸습니다. 법률에 대해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못해서 을(乙)의 위치에 서 있을 뿐이었는데 말이지요.
그런데, 그 많은 당사자들(乙)이 어느새 법조계(甲)를 향해 비난을 시작했습니다. 그랜저 부장검사 사건, 벤츠 여검사 사건, 막말판사 사건, ‘부러진 화살’ 사건 등등 일부 이슈가 되는 일이 생길 때마다 전체 법조계에 대한 국민여론은 뜨거웠습니다. 이제 우리 법조계에서 배운 ‘꾸지람 받은 아이들’이 비난을 시작한 것이지요. 물론 법조계는 논리적으로 반박했습니다. 법조계가 국민에게 꾸지람, 비방, 적대감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단지 직업적인(업무적인) 역할 때문이라고 하곤 했습니다. 당사자주의, 객관주의, 직업적 사명감을 중시하다 보니 폭언이나 모욕, 훈계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국민의 비난은 멈추지 않고 사법의 전반적인 변화를 이야기하는 수준까지 왔습니다. 이제 국민은 꾸지람을 하는 법조인보다는 친절하게 법을 일깨워주며 공정한 대우를 해주는 법률전문가를 원합니다.
관용, 격려, 칭찬, 공정, 안정감, 인정, 포용을 받고 자란 아이는 ‘긍정의 선순환’을 준다고 합니다. 그 반면, 꾸지람, 비방, 적대감, 질투 속에서 자란 아이는 그 공격성을 다시금 부모, 선생님에게 돌릴 수 있지요. 이처럼 이 세상에는 그동안 법정(법조계)에서 꾸지람, 비난, 적대감을 받아 온 국민이 참 많습니다. 그 꾸지람 받은 아이는 “나는 죄인도 아닌데 단지 무식하다는 이유로 매번 법정에서 혼나야 하는가”라는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렇게 ‘꾸지람 받은’ 국민들이 지금 법조계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친절한 금자씨’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동료 재소자에게 락스를 먹이는 금자라는 연쇄 유괴살인범은 다시금 세상에 나와서 ‘친절’을 실천해보려 합니다. 그런데 새 삶을 살려고 한 금자씨는 여전히 무섭고 짙은 화장을 서슴지 않습니다. 친구들은 그녀에게 묻습니다. “왜 그렇게 눈을 시뻘겋게 칠하고 다녀?” 금자씨는 “응, 친절해 보일까봐”라며 이야기하죠. 사실 마음은 따뜻했죠. 이제부터라도 유괴 피해자들의 원한을 풀어주고 싶은 ‘친절한’ 금자씨이지만 갑자기 사람들에게 ‘친절하다’는 이미지는 어색했던 겁니다.
로이어씨(법조인)는 금자씨와 비슷하게 친절보다는 차가움을 보여준 것이 사실이지요. 법조인은 ‘치우치지 않음(不偏不黨)’ ‘사건의 공정’ ‘당사자주의’ 등을 내세워 원·피고 혹은 피고인에게 기초적인 법률 조언도 안하고 ‘법률의 부지(不知)’를 탓했습니다. 그렇다면 법조인들도 금자씨처럼 친절하게 변화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물론 금자씨처럼 처음엔 어색한 행동이 될까봐 당분간 엄숙하고 근엄한 화장(?)으로 가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국민에게 로이어씨의 친절한 마음은 전해질 것입니다. 그 노력은 친절한 금자씨의 위대한 변화만큼이나 가치있겠죠. 이제 새로운 로스쿨 시대의 법조계에는 ‘친절한 로이어씨’가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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