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사람들이 조화 이루는 사회 만들고파”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이 허리에 손을 짚고 지그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 끝에 1인시위를 하는 사십대 중반의 남자가 보인다. 녹색당을 창당한 하승수 변호사다. 그가 손에 든 피켓에는 ‘4·11총선을 탈핵과 4대강을 살리는 선거로’라는 글이 적혀있다. 녹색당 당수인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순신 장군과 마주보면서 지낸다. 그의 1인시위는 반쯤 직업화된 것 같았다. 지난해도 백일동안 원자력발전에 반대하면서 그 자리에서 1인 시위를 했었다.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앞이 거의 그의 사무실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의 얼굴빛은 동상의 구릿빛과 거의 흡사했다. 각진 턱에 검게 탄 하 변호사의 얼굴에서 그 앞에 있는 장군보다 더 강한 의지가 느껴진다. 봄답지 않게 아직 심술을 부리는 찬바람 속에 그는 혼자 서 있었다. 1인시위라는 걸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더러 지하철이나 명동에서 예수를 믿으라면서 미쳐서 혼자 돌아다니는 광신자들을 보기는 했다. 그러나 하 변호사는 지식인이었다.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렇게 1인시위를 하는 게 무슨 효과가 있습니까?”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에 급한 사람들은 자연을 얘기하는 녹색당의 구호가 가슴에 와 닿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는 당을 혼자 만들어 선거운동을 하고 있었다. 국회의원이 되고 싶으면 기성정당을 찾아가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았다. 그가 심각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세상 일 계산하면 답이 안 나오는 경우가 많죠. 그렇지만 이렇게 무턱대고 하다보면 의외로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수도 있어요.”
논리나 그의 머리에서 나오는 대답이 아니라 오랫동안 숙성된 그의 체험에서 나오는 말 같았다. 뭔가 그 안에 들어 있었다.
“그래도 제가 보기에 무모해 보이는 면이 있어요.”
투입시간에 대비해 효과가 작을 것 같았다.
“아닙니다. 어떤 일이든지 얼마나 진정성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피켓을 들고 1인시위를 하더라도 무성의하게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서 있으면 이렇게 단순무식한 방법도 효과가 있어요.”
담백한 그의 말 속에는 농축된 철학이 들어있었다. 잠시 후 우리는 횡단보도를 건너 작은 찻집으로 들어가 마주 앉았다.
“하승수 변호사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다. 그가 하는 1인시위는 스스로 찾아서 하는 고행이 틀림없었다. 절박한 삶에 쫓겨 농성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작은 건설회사를 하시고, 어머니는 교사인 중류층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부산에서 해운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경영대학에 진학했죠. 대학시절은 학생운동이 대중화된 상태였는데, 운동권 내부의 전체주의적 속성이 저와는 맞지 않는 것 같아 깊이 관여하지 않고 뒤따라 다니는 정도였습니다. 그 후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회계법인에 취직을 했었죠. 공인회계사는 자본주의를 지키는 파수꾼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의뢰기업이 요구하는 대로 맞춰주는 부실감사를 보고 나니 그 일이 하기 싫었습니다. 뭔가 공익적인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회계법인을 나와 사법시험 준비를 했죠.”
자료를 보면 그는 2년 만에 합격을 했다. 그런 성격이면 연수원시절도 남과 다를 것 같았다.
“연수생 때 본 법조계는 어땠습니까?”
“시보로 검찰과 법원에 가 봤는데 그 분위기가 답답했습니다. 나와는 맞지 않는 것 같았죠. 연수생들이 하는 잡지 만드는 일을 하다가 연수원 교수와 트러블이 있었습니다. 잡지에 싣기 위해 검찰의 역사에 대한 글을 쓰게 됐습니다. 제가 살펴보니까 이승만 정부나 유신 때 검찰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못하고 잘못된 행동을 했더라고요. 그걸 썼더니 검찰출신 연수원 부원장이 그런 게 연수생 잡지에 나면 자기가 어떻게 검찰에 다시 돌아가겠느냐면서 삭제하라고 명령하더군요. 그 외로 그 당시 참여연대가 초창기일 때인데 연수원 다니면서 자원봉사를 나가봤습니다. 그 경험을 하고 나서 제 생각은 변호사를 하면서 반은 시민운동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변호사가 돼서는 어땠습니까?”
“어려운 사람의 형사사건을 맡아 처리하면서 변호사라는 직업이 의미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구치소의 접견도 힘든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변호사의 권리라는 것도 알았죠. 그러면서 느낀 건 ‘변호사란 추구하는 목적이 뭐냐에 따라 아주 선한 역할도 또 악한 역할도 할 수 있는 직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경계하고 성찰하지 않으면 나쁘게 될 우려가 많다는 걸 본거죠. 인간적이고 훌륭한 변호사들이 많았습니다. 반면 악인까지 그 스펙트럼이 아주 넓은 걸 봤습니다. 어려운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변호사가 되고 싶었습니까?”
“너무 많은 수입을 바라지 말고 시간과 노력의 상당부분을 다른 쪽에 쏟는 사람이 됐으면 했습니다. 자기 시간의 3분의 1을 어려운 사람을 위해 쓰는 거죠. 그런데 그 시간 안배가 쉽지 않았습니다. 요즈음은 점차 공감 같은 공익변호사 사무실이 등장하는데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많은 수입을 바라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사십대 중반 현재의 재산상태를 물어봐도 될까요?”
“지금까지 집도 없이 전세삽니다. 그렇지만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딸이 중학교 2학년입니다. 크게 돈이 들어갈 일이 없습니다. 부부가 같이 텃밭도 가꾸고 산책하면서 대화를 많이 합니다. 저는 그게 행복한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비싼 밥에 술도 먹어봤지만 집에서 막걸리를 곁들인 밥을 먹는데 훨씬 맛있고 마음이 편합니다. 그런 정도 누릴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돈은 인간을 타락하게 만들기 때문에 변호사가 돈에 집착하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돈을 벌려면 희생되는 귀중한 것들이 많죠. 돈이 그냥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공익변호사들 보세요. 적은 돈 가지고도 행복하게 삽니다.”
“어떻게 1인시위와 인연이 됐죠?”
“1998년도에 참여연대에서 일할 때 국세청 앞에서 1인시위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전할 메시지가 있을 때 그걸 세상에 알리는 방법 중의 하나였죠. 그때 배웠습니다. 전할 메시지가 있을 때마다 1인시위를 했습니다. 외롭기도 하고 화가 날 때도 있었습니다.
앞을 지나는 수많은 사람들은 거의 무관심하게 지나칩니다. 더러는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힘빠질 때도 있지만 캔커피를 사다주는 사람이나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겠다는 사람을 보면 다시 힘이 솟고 위로가 되기도 했죠.”
“참여연대에서 일을 했었나요?”
“저는 공익적인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예 당시 초창기였던 참여연대에 상근으로 들어갔었습니다. 거기서 국민의 세금이 함부로 낭비되는지 정부예산을 감시하는 일을 해 봤습니다. 삼성가의 세습문제도 제기하고 정보공개나 조세개혁 등 사회적 이슈에 대해 싸웠습니다. 참여연대는 주로 전문가나 활동가들이 주축이 되었습니다. 그걸 하다보니까 전문가로서 법조항은 바꿀 수 있는데 시민 모두가 참여하는 건 아니었고, 사회적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것도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참여연대에서 나와 독자적으로 지역시민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자기가 사는 지역을 바꾸는 운동을 하는 거죠. 예전에는 과천에 살았는데 학교운영위원장, 마을신문, 공부방 설립 같은 일을 했습니다. 그 다음은 그런 운동을 전국에 확산시키기 위해 강연을 다녔죠.”
“그런 활동을 하면 먹고 사는 건 어떻게 합니까?”
“변호사 일을 틈틈이 했습니다. 그리고 연수원 들어가기 직전 결혼했는데 아내가 교사입니다. 돈을 못 벌어도 보통 직장인 월급 정도는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욕심이 많은 편이 아니어서인지, 한달에 200만원 정도만 있으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행보는 특이한 데가 있다. 한가지 목적을 위해 일직선으로 돌진하는 게 아니라 굽이치는 물처럼 이리저리 방향이 바뀌기도 했다. 몇년 동안은 제주도의 로스쿨에 가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로스쿨 역시 경쟁시스템이었다. 그는 그런 치열한 다툼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그는 로스쿨을 나와 투명한 사회 만들기 운동을 하다가 얼마 전 녹색당을 창당했다.
“녹색당을 만든 배경은 뭡니까?”
“저는 물질이 아니고 자연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고 사는 사회를 만들고 싶습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 녹색당에 더욱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처음인 건 아니고 예전에 한발은 걸쳤었죠. 한데 그게 잘 진척이 되지를 않더라고요. 당을 만들었다고 해서 제가 직업정치인의 꿈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지금 세상을 보면 국민은 새로운 정치세력이 나타나기를 원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창당을 했습니다. 의외로 많은 분들이 성원해 줬습니다. 충청도 농촌지역에서 발품을 팔고 올라와 성금을 주신 분도 있고, 1000명이 넘는 당원들이 후원금을 보내주셨습니다. 대학생, 주부, 농민, 전문직, 회사원도 있는데 돈 많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경제적으로 빠듯한 사람들인데 대부분 기존 정당이나 정치에 관여하던 분들이 아닙니다.”
나의 좁은 시각으로는 알지 못하던 의외의 흐름이었다. 녹색당의 이미지는 아직 막연하다. 법정스님의 자연주의가 더러 알려져 있지만 정치적 결사는 빠른 느낌이 들었다. 그가 계속했다.
“지금 우리사회는 곧 식량과 에너지 위기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은 26.7%로 OECD 국가 중 가장 낮습니다. 일본만 해도 40% 이상이죠. 지금 세계의 식량생산은 정체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상 기후 때문에 충격이 온다면 우리나라에 위기가 닥칠 가능성이 큽니다. 에너지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앞으로 우라늄이나 화석연료가 고갈될 우려도 있습니다. 독일 같은 나라는 벌써 태양광이나 풍력을 이용하는 재생에너지 생산이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제가 창당한 녹색당은 그런 미래의 문제를 하나라도 현실적으로 바로잡는 입법을 추진하기 위한 정치단체입니다.”
막연한 구호가 아니고 의외로 방향성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만약 국회에 들어간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농촌을 다시 살리도록 농지법을 고치겠습니다. 지금 도시노동자와 농촌노동자 간 임금격차가 너무 커서 농촌이 무너졌습니다. 앞으로 귀농하는 사람들에게 7년간 정부가 월급을 주어 기본소득이 보장되는 법을 만들겠습니다. 재생에너지의 생산도 확대하겠습니다. 태양광으로 개인집에서 생산해 쓰고 남은 에너지를 전력회사에서 비싸게 사주는 제도를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수명이 끝난 원전의 관리문제를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리1호기 원전은 그 수명이 끝났는데도 거기서 나온 핵폐기물 처리문제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국민을 속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영덕이나 울진에 원전문제를 잘 아는 국회의원이 당선되어야 합니다.”
그의 입법정책도 손에 잡힐 듯 구체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또 소망이 있다면 뭘까요?”
“앞으로의 소망도 크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시골에 내려가 농사를 짓고 주민 모임에 참석해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도와달라고 하면 변호사의 경험을 살려 서류도 써주면서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지금도 집 마당에 텃밭을 가지고 있죠. 그리고 글을 쓰고 싶습니다. 그동안 이미 칼럼도 쓰고 책도 냈습니다. 민주주의에 관한 학술서적이나 청소년을 위한 세계 인권사도 썼습니다. 글을 통해서도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싶습니다.”
그의 말 중에 가장 가슴에 파동을 치는 부분은 계산을 하면 답이 안 나온다는 부분이었다. 너무 내 판단과 내 잣대로만 살아온 것 같았다. 무모해 보이는 그의 용기가 부러웠다. 역사는 그런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여기 이순신 동상 앞이 ‘1인시위의 메카’가 되어 있어요. 변협도 필요하면 이 장소가 좋을 겁니다.”
그에게 많은 걸 배웠다. 모두들 계산하고 겁을 먹기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이다.
저녁 8시. 나는 바람이 부는 광화문 광장으로 다시 나갔다. 녹색당의 하승수 변호사는 고된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막 철수한 것 같았다. 그 자리를 새로 탄생한 청년당의 몇 명이 지키고 있었다. 변협에서 일하던 강연재 변호사가 얼마 전 만든 정당이었다. 그들은 언젠가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삶의 질을 높이는 기둥이 될 게 틀림없었다. 은은한 조명을 받은 이순신 동상이 인자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