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경득 변호사는, 1949년 일본 와카야마 시에서 태어나 길에서 어머니를 만나도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날까 모르는 체할 정도로 소년 시절 철저히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살았다. 일본 명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기자가 되고 싶었으나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두 번째로 선택한 길이 사법시험이었다. 1976년 어렵게 합격했지만, 일본 사법부는 ‘외국인은 사법연수원에 입소할 수 없다’며 귀화를 종용했다. “나 개인이 사법연수생이 되느냐 마느냐는 일본 귀화로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내 문제가 아니라 65만 재일동포의 권리에 관한 것입니다. 나는 재일동포들이 받고 있는 차별과 편견을 없애기 위해 변호사가 되려 합니다. 나의 존재 의의를 없애는 일본 귀화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자신이 한국인임을 밝히고 일본 아사히신문에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는 투고를 하는 등 정면 승부를 한 끝에 그는 잠자고 있던 일본의 지성과 양심을 깨울 수 있었다. 결국 최고재판소는 이듬해 3월 그를 사법연수원에 받아들였고 고인은 1979년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 변호사 자격증을 받았다.
몇 년 전 몇몇 변호사들과 함께 도쿄를 방문하여 재일교포 3세 변호사들과 만남을 가졌을 때 나는 故 김경득 변호사의 장남인 창호군을 만날 수 있었고, 현재 재일교포변호사연합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윤철수 변호사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자신이 재일교포라는 사실을 밝히고 변호사가 되어 합격률 1.81%의 바늘구멍을 뚫고 사법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겸손하고도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도쿄대의 수재였던 김창호 변호사도 수 차례의 도전 끝에 합격의 영광을 거머쥘 수 있었다고 했다. “이제 당신에게는 장밋빛 미래만이 남아있군요.” 어리석은 나의 질문에, 그들은 대답했다. “故 김경득 변호사가 힘들게 투쟁하여 이제는 귀화하지 않고도 일본에서 변호사가 될 수는 있지만, 보이지 않는 차별로 인해 실제 법조 일을 하는 것은 힘든 투쟁의 연속이고 무엇보다도 재일교포 변호사들은 국적 문제로 사랑을 하기도 쉽지 않은 실정입니다.”
그들도 우리나라 변호사들과 마찬가지로, ‘김앤장’보다도 더 큰 법률회사에서 세계 각지의 사람들과 함께 어마어마한 기업자문 일을 하기도 하고 몇몇 뜻있는 사람들과 사무실을 같이 쓰고 여직원을 공유하며 소규모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하기도 한다. 하지만 개업한 재일교포 변호사들의 주 클라이언트는 같은 재일교포 혹은 한국에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거나 한국과 관련한 사업기반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순수 일본인 의뢰인이나 일본기업은 드물다고 하였다.
멋도 모르고 대놓고 차별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치면, 이제는 숨어서 뒤로 차별하는 고등학교 시절과 대학 생활이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간다 하더라도 직장에서의 차별이 도사리고 있고, 맘에 드는 일본 여성이 있어도 자신이 재일교포라는 것을 알면 더 이상의 깊은 관계 맺기를 꺼려하기도 하고, 재일교포 여성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재일교포들과 결혼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어서 많은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더욱이 그들은 재일교포 3세로서 재일교포 1, 2세인 부모 및 조부모와의 보이지 않는 갈등까지도 그대로 안고 생활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지만, 서투른 한국말로 일본이라는 폐쇄적 사회에서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독하게 살아왔는지를 말해주는 모습을 보며 마치 내 형제의 이야기를 듣는 듯 마음이 아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서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큰 감동을 받기도 했다.
작년에 변호사들이 주로 이용하는 어떤 사이트에서 일본에 있는 변호사에게 집행을 의뢰하고 싶은데 아는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달라는 글이 익명으로 올라와서 조그맣게 사무실을 운영한다는 윤철수씨가 생각났다. 도쿄에서의 만남 이후 약 10개월 동안 연락을 하지 않고 있었던 그에게 서둘러서 전화를 하고, 소개를 부탁한 한국의 후배 변호사에게 그의 일본 주소와 전화번호 등을 알려주었다. 그 이후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하였지만, 윤 변호사나 한국의 후배 변호사에게서는 더 이상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주 갑자기 윤 변호사가 서초동에서 점심 먹기를 청하였다. 그때 연결해주었던 집행 일은 아직도 진행 중에 있고, 일본과 무역을 하고 있는 한국 클라이언트 때문에 가끔 한국에 온다고 했다. 마흔여섯살인 지금까지도 결혼은 못했지만, 한국에서 좋은 여성을 찾은 것 같다고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의 청년변호사들과 일본의 청년변호사들이 상호 협력하여 상생의 길을 찾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국내 여건이 힘들고 점점 열악해지고 있지만, 철저하게 인생을 개척하고 겸손하고 소탈하게 스스로를 발전시켜 나가는 재일교포 변호사들을 보면서 스스로를 반성하고 다시 한번 전진할 것을 다짐하게 되었다. 그들과 손을 맞잡고 발로 뛰면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가야겠다는 결심도 같이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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