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에서 도와주는 최고전문가가 변호사”
최정환 변호사는 국내 연예계를 꽉 잡고 있는 엔터테인먼트 분야 전문변호사다. 그는 강우석 감독과 강제규 감독이 무명일 때부터 인연을 맺어 왔으며 가수 박진영, 비, 유승준의 가수 데뷔를 도와주기도 했다. 강수연, 박상원, 이정재 등 톱스타들과도 돈독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그는 엔터테인먼트 분야 법률시장의 독보적 존재다. 영화, 음반, 뮤지컬 등 모든 분야의 투자계약, 원작사용계약, 집필계약, 출연계약, 배급계약, 비디오계약, 해외수출계약 등 그가 개척한 법률서비스의 각종 형식들이 지금도 교과서 같은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오래 전 한류 열풍을 예측했다는 그는, 요즘 한국의 영화와 음악 그리고 뮤지컬을 들고 세계로 나가고 있다. 그는 또 대한변협의 국제이사로 국제대회에서 영어와 일본어 사용에 막힘이 없다.
그는 세계 각국의 변호사가 된 이민 2세들의 정체성을 찾아주기 위해 23개국에 흩어진 한인변호사들을 규합하기도 했다. 그는 우수한 한국 변호사들이 서초동에서 복닥거리지 말고 세계로 뻗어나가 블루오션을 개척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청담동의 한 조용한 음식점에서 그와 밥을 먹은 적이 있다. 그런데 옆 테이블에 있던 A급 탤런트들이 최 변호사의 눈치를 보면서 어려워하는 것을 보면서 한국 연예계에서의 그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었다.
요즘 대한변협 일을 함께 하는 관계로 친한 사이가 된 최 변호사가 지난달 8일 내 사무실로 놀러왔다. 문득 엔터테인먼트분야의 최고인 그의 경험과 노하우를 빼내서 후배 변호사들에게 넘겨주고 싶은 욕심이 일었다. 그와 인터뷰를 시작했다. 먼저 그의 인생 배경부터 물었다.
“왜 판·검사를 하지 않고 변호사로 출발했지요?”
“어머니는 집안에 판사가 나와야 한다고 했죠. 그런데 저는 정해진 궤도 위를 가는 것보다 새 분야에서 치열하게 살아보고 싶어서 국제변호사를 지망했습니다.”
“국내 최대로펌 국제변호사로서의 생활은 어땠습니까?”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 셈이죠. 업무의 대부분을 영어로 해야 하는데 그땐 영어에 익숙지 못했습니다. 사무실에서 매일 밤 11시까지 백인변호사와 되지도 않는 영어로 의견서를 작성하느라고 머리가 뜯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영어뿐 아니라 제2외국어도 하나쯤 필요해 새벽시간에 일본어를 공부해야 했습니다. 당시 김앤장의 오너인 김영무 변호사한테 많이 배웠습니다. 돈도 명예도 다 갖춘 그인데도 손님이 갈 때면 엘리베이터까지 따라가 문이 닫힐 때까지 머리를 굽히는 겁니다. 그걸 옆에서 봤죠. 도대체 그런 행동이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일까. 판사, 검사가 된 친구들은 점심 먹고 청사에 돌아갈 때 수위들이 부동자세를 취하고 경례를 하면 느긋하게 그 인사를 받는 지위를 즐기는 것 같았습니다. 반면 저는 허구헌날 엘리베이터 앞에서 절을 하고 있으려니까 차라리 검사로 임관신청을 할까 생각이 들더군요.”
최 변호사의 말이 이해가 간다. 그들은 관직과는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2년쯤 지나니까 영어도 되고 일에도 자신감이 들면서 재미있어지더군요. 변호사는 처음 5년 누구에게 배우고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과정에서 외국어를 습득하고 자기의 전문분야도 설정하는 거죠.”
엔터테인먼트 분야에 뛰어들게 된 동기가 궁금했다.
“88올림픽 때 우리의 영화와 음악의 문화시장이 개방됐습니다. 그 전에는 13개 국내영화사들이 외화를 독점수입해서 몇백억씩 벌었죠. 영화 개방을 반대하는 국내영화인들이 영화관에 뱀도 풀고 세게 데모를 했죠. 놀란 미국 유명영화사들이 한국의 영화전문 변호사를 찾았지만 당시 그런 변호사는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국제변호사들은 국제통상이나 금융, M&A쪽 같은 일을 하고 싶어했고 ‘딴따라’쪽 일은 꺼렸죠. 그 때문에 신참인 제가 그 일을 맡게 됐습니다. 새로운 분야고 재미있을 것 같았는데 기본적인 용어조차 모르겠더군요. ‘홀드 백 피어리어드(holdback period)’라는 게 무슨 말인지 몰라 쩔쩔 매니까 미국 측 변호사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더라고요. ‘영화개봉 후 비디오를 내지 말아야 하는 기간’이란 뜻이더군요. 처음 한 일은 미국영화의 국내 배급계약이었어요. 미국 측 계약서는 20~30장인데 한국 측은 딱 한 장에 내용도 없었어요. 그저 ‘충청지역 영화배급을 허락함’ 한 줄이 다였죠. 또다른 일은 수입영화의 불법복제를 막는 것이었어요. 필름을 12개 영화관에만 줬는데 18개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일도 있었죠. 불법비디오를 단속하는 일도 맡았습니다. 콜럼비아영화사, 20세기 폭스, 워너브라더스, 월트디즈니 등 전부 저 혼자 맡아 처리했죠. EMI, 소니뮤직 등 거대 음반사의 국내법인 설립도 주도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영화와 음악을 즐기게 됐습니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금맥을 잡았던 셈이다.
“처음에는 제가 한국의 영화사나 음반사 담당자들을 만나 경고할 일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경고 받는 사람들이 아무런 법률지식도 없으니까 오히려 저에게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자문하더군요. 그러면서 영화 음악계 사람들과 친해지게 됐습니다. 지금의 강우석이나 강제규 감독이 그땐 다 무명이었습니다. 배우 박중훈, 이정재, 이병헌, 최진실, 엄정화나 가수 김건모, 박진영, 신승훈도 신인들이었고요. 전속계약 같은 걸 잘못하면 배우나 가수 인생에 엄청난 먹구름이 끼는 거죠. 그런 것들을 조금씩 도와주다가 친해지자 자기들 모이는 자리에 저를 초대하더군요. 저는 당시 무명이지만 의식 있고 재능 있는 젊은 제작자, 영화감독, 배우, 가수들과 친해지면서 법률적 후원자가 됐죠. 알음알음으로 발도 넓어져 강수연, 황신혜, 최진실, 고소영, 이영애, 최명길, 김희애 등 스타급 여배우들과도 네트워크가 형성됐습니다. 사무실에서 밤 11시까지 일하고 새벽 2시까지 연예인들과 술을 먹고 아침 8시에 다시 출근하는 강행군이 계속됐습니다. 그때 한류를 예상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중문화가 할리우드나 외국 팝송들과 충분히 경쟁력이 있고, 세계로 진출할 가능성도 크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 분야를 좀 더 체계적으로 공부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예술의 중심지인 뉴욕에 있으며, 영화나 음악에 관한 기본강의가 많은 뉴욕대학(NYU)로스쿨로 유학을 떠났다.
“로스쿨에서 엔터테인먼트분야의 기본법인 저작권법, 공정거래법, 상표법 등 기본 과목과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법, 방송비즈니스법, 예술비즈니스법 등의 응용과목을 공부했습니다. 수많은 계약서가 있는데 계약서는 그 분야에 관한 법과 판례의 집약이라고 볼 수 있죠. 원작사용계약, 투자계약, 집필계약, 배우들의 출연계약, 배급, 비디오, 해외수출, 불법복제, 저작권침해, 전속계약과 그 외 사건사고에 관한 케이스를 실무적으로 공부했습니다. 뉴욕의 대학에 그런 사례들이 집적돼 있었습니다. 혼자 뉴욕의 한복판에서 외국친구들을 사귀면서 그들로부터 많은 문화적 소양을 배우게 됐죠. 독일이나 스위스에서 온 친구들에게서 와인을 배웠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온 친구와 아리아를 따라 부르면서 오페라를 알게 되고 이탈리아 음식, 프랑스 요리도 알게 됐고요.”
유학에서 돌아오니 국내 상황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삼성영상사업단 같은 게 생겼고 대기업도 연예계에 엄청나게 투자하는 분위기였죠. 이번에는 외국이 아니라 한국 기획사를 잡자고 결심했습니다. 우리 영화와 음악산업이 급성장해서 법률 수요가 엄청났습니다. 일하던 사무실을 나와 변호사 6명으로 팀을 만들어 국내 거의 모든 음반사와 영화사들의 일을 맡아 처리했습니다. 본격적인 한류 붐을 일으킨 영화 ‘쉬리’, 드라마 ‘대장금’ 등의 해외수출계약도 담당했고 드라마 ‘겨울연가’의 음악저작권 분쟁, 가수 비의 월드투어공연 계약관련 자문 등을 담당하면서 한류에 대한 법률지원이 늘어났습니다. 영화나 음반뿐 아니라 미술품 거래, 스포츠, 게임, 레스토랑 프랜차이즈 쪽에서도 일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 왔죠.”
그의 기억에 남는 사건들은 어떤 것일까.
“플래닛할리우드 레스트랑 설립을 위해 브루스 윌리스, 스티븐 시걸과 직접 만나 협상했던 일, 마이클 잭슨의 집을 방문해 그와 직접 내한공연 계약을 체결한 일, 국내 리조트 건설 및 투자를 위해 사우디의 알 왈리드 왕자 궁전에서 왕자와 협상한 일,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등의 뮤지컬 붐을 가져온 해외 유명뮤지컬 라이선스를 위해 협상하던 일들이 기억나네요. 특히 당대 최고의 가수이던 백지영씨가 매니저에 의해 비디오유포사건이 터져 어려움을 겪고 있었죠. 섹스비디오를 미국의 서버에 올려 국내에 돌게 만든 거죠. 당사자들이 정작 피해자인데도 방송국에서는 혼전섹스로 청소년에게 영향을 준다면서 방송출연을 금지시켰습니다. 여론에 저항해서 그들이 비난받는 걸 막아주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변호사가 기자회견을 자청해서 사건전말을 발표했습니다. 음란물 배포로 인터넷에 올린 사람들을 구속시키기도 했습니다. 기자회견을 대행한 변호사의 일을 처음으로 시작한 셈이 됐죠.”
“앞으로 엔터테인먼트 쪽을 지망할 변호사들이 많이 생겨날 텐데 현재 그 분야를 배울 수 있는 국내 교육과정이 있나요?”
“엔터테인먼트 분야에 대해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로스쿨에서 과목도 없고 관련된 책자도 없었습니다. 기존의 계약서 양식이나 법률문서들은 모두 제가 만든 게 샘플로 돌아다닐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함께했던 변호사 몇 명과 2007년 엔터테인먼트 법학회를 만들었습니다. 의사들이 자기의 진료와 치료경험을 콘퍼런스에서 발표하듯이 엔터테인먼트 사건을 경험한 현업 변호사들이 모여 자기케이스를 서로 발표하게 하고 법적인 쟁점들을 정리해 책도 냈습니다. 사법연수원에서도 요청이 들어와 강의도 나가고 있습니다.”
그는 더 새로운 분야의 개척도 계획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한국형 콘텐츠의 해외수출이 ‘한류’의 중심이었지만, 앞으로는 전 세계인의 감성을 공유할 수 있는 세계적 수준의 콘텐츠의 제작으로 우리 엔터테인먼트가 발전해 가리라고 봅니다. 이런 점에서 영화, 음악, 공연, 미술, 온라인게임 등 전 분야에 대한 법률서비스도 일류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경 쓰지 못했거나 뒤쳐졌던 법률분야도 더 개발하고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백남준씨의 작품을 국내로 반입할 때 작품으로 사용된 텔레비전 제품 30개 중 한 개가 고장이 났을 때 손도 대지 못하도록 돼 있는 외국의 계약서 등이 그렇습니다. 비효율적이죠. 또 예술품이 배로 오는 도중 파손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경우 대부분 저쪽 요구에 사인만 했지 리스크를 검토하고 수정할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미술관의 큐레이터들을 초청해 강의도 듣고 법적분야에서 할 일들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외국의 계약서들은 그들의 오랜 경험과 법률적인 문제점들을 집약한 겁니다. 외국의 관련 판례들을 검토하면 계약서상의 문구들이 왜 들어갔는지 그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연구를 통해 한국적 상황에 맞지 않는 독소조항들을 파악해야 우리 쪽을 방어할 수 있는 거죠.”
그는 지난 3년간 대한변협 국제이사를 맡으며 국제변호사조직에서도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세계변호사협회(IBA), 로아시아(Law Asia) 등 국제변호사조직에 한국법조계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도록 나름 애를 썼습니다. 현재 교포 변호사들이 23개국에 걸쳐 퍼져 있습니다. 그 나라로 가서 로스쿨을 졸업하고 현지의 변호사가 된 사람이죠. 김평우 협회장 시절 이런 변호사들을 한데 규합해서 세계한인변호사협회를 만들었습니다. 상당 수의 변호사들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살다가 이런 모임를 만드니까 무척 좋아하더군요. 그동안 홍콩, 싱가포르, 도쿄의 경쟁을 물리치고 IBA의 아시아 사무소를 서울에 유치했고, IBA 콘퍼런스와 로아시아 콘퍼런스도 서울에서 성공적으로 개최했습니다.”
이제 그의 성장배경과 사고방식을 물어볼 시간이다.
“영월의 시골의사 아들로 자라났습니다. 어머니는 약사 출신이시고요. 할아버지도 일제시대 때 의사를 하셨죠. 그런데 저희 집안은 이상하게도 단명했습니다. 할아버지가 41세에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39세 때 간경화로 돌아가셨어요. 조부와 부친의 너무 짧은 삶을 목격하면서 고정된 긴 궤도를 가기보다 현재를 자유롭게 즐기며 살자는 사고방식이 나도 모르게 생긴 것 같아요. 저는 초등학교 3학년까지 영월에서 검정고무신 신고 발가벗고 멱 감으며 노는 시골아이로 자랐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서울로 올라와 돈암동에서 약국을 시작했고 약국에 딸린 방에 식구들이 함께 살았죠. 저는 매일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 약국 문을 열고 카운터에 앉아 박카스도 팔고 생리대도 팔았죠. 어머니 혼자 버시느라고 생활이 힘들었는데 다행히 제가 학원장학금을 받아 공부에 큰 장애는 없었습니다.”
항상 던지는 질문. 그에게 변호사란 어떤 것일까.
“저는 비즈니스 변호사로서만 살아왔습니다. 변호사는 전문성을 추구해야 하고 그 분야의 최고가 돼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예기획사 사장자리 제안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사양했습니다. 변호사는 틀을 짜주는 사람이지 휘젓고 다니는 사람은 아닙니다. 옆에서 도와주는 전문가로 남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주장하는 한국 변호사의 세계진출에 대해서도 물었다.
“한류 콘텐츠와 관련해 외국에 나가 협상도 해보고 계약도 여럿 체결해 봤습니다. 국제회의에서 발표도 많이 해 봤습니다. 나가서 싸워보면서 내린 결론이 한국의 변호사들이 외국변호사들에 비해 훨씬 더 우수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변호사들처럼 많이 공부하고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경우가 없더군요. 적어도 동양권에서는 한국, 중국, 일본 중 한국변호사가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일본변호사들보다는 영어도 잘하고, 중국변호사들보다는 국제감각이 더 뛰어납니다.
이렇게 세계최고 수준의 우수한 집단이면서도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겁니다. 국내 법률시장은 이미 포화상태입니다. 서초동에 목을 매고 있을 필요가 없어요. 눈을 세계로 돌려야 합니다. 세계의 법률시장이 블루오션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