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이 좋았지”라는 말은 보통 노인들이나 하는 소리로 생각한다. 누구나 과거를 생각할 때는 좋았던 일을 주로 떠올리고 힘들었던 일은 잊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다보니 연세 드신 선배 변호사들이 후배들 앞에서 과거 황금시절을 자랑할 때면 후배들은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면서 늘상 하는 자기자랑으로 여기는 것이 보통이다. ‘기억을 못 하셔서 그렇지, 그때라고 지금보다 특별히 좋았겠어’라고 생각한다.
글쎄, 이 경우는 좀 다르다.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가 일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이제 내 스스로 변호사가 된 입장에서 그동안의 경험을 반추해 보면, 옛날이 정말 좋았다.
어렸을 때 아버지는 휴일에 집에서 절대 전화를 안 받으셨다. 의뢰인이 전화를 걸어서 ‘귀찮게’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보통 내가 받는다. 어린 아이의 목소리를 들은 ‘손님들’은 아버지를 찾는다. “아버지 계시냐?” 나는 한손으로 수화기를 막고 소리를 지른다. “아빠, 누가 찾는데요.” 안방에서 이런 대답이 들려온다. “누구시냐고 여쭤봐.” 나는 수화기에 대고 말을 한다. “실례지만 누구신가요?” “○○○이라고 말씀드려라.” 다시 수화기를 막고 소리를 지른다. “○○○이시라는데요.” 대답이 들려온다. “안 계신다고 해라.” 나는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상대방에게 말을 한다. “지금 안 계시는데요.” 전화를 건 사람은 지극히 의심스럽지만 어쩔 수 없다는 기색으로 “나중에 들어오시면 ○○○이 전화 드렸다고 말씀드려라”라고 말하면서 전화를 끊는다. 그렇다. 그 시절 변호사의 휴일 낮잠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휴대전화에 발신자표시기능이 도입된 이후 모든 것이 변했다. “제가 급한 볼일이 있어서 전화를 못 받았습니다”라는 변명은 전혀 통할 수 없다. 설사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누가 전화를 했는지 바로 알 수 있기 때문에 답신을 하지 않으면 항의를 받는다. 야간이나 휴일에도 변호사는 매인 몸이 된 것이다.
발신자표시기능이 처음 도입된 것은 1999년이다. 당시 지방에서 검사로 근무하던 나는 같이 일하는 형사에게 전화를 걸 때마다 놀라곤 했다. 내가 전화한 사실을 알고 인사를 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처음에는 안 가르쳐주다가 결국 자기 휴대전화에는 전화한 사람의 이름이 뜬다고 알려주었다. 그때만 해도 발신자표시 서비스는 모든 사람에게 제공되지 않고 수사기관에 종사하는 사람이 신청을 해야만 받을 수 있었다. 신기한 마음에 나도 신청을 하려고 알아보고 있었는데 6개월 후 누구나 발신자표시기능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족쇄가 될 줄은 그때는 정말 짐작도 하지 못했다.
사실 발신자표시기능은 전화 가입자의 편의를 위해 생긴 것이고 많은 경우에 큰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대단히 폭력적인(!) 면이 있기도 하다. 전화를 받는 쪽에서는 누가 전화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있기 때문에 급한 일이 있어도 전화를 받지 않을 수가 없다. 전화를 하는 쪽에서는 상대방의 휴대전화 화면에 내가 전화한다는 문구가 뜬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으면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게 된다. 어떤 의뢰인의 전화도 무시할 수 없는 변호사들로서는 도망갈 길이 없어진 것이다.
고객에 대한 변호사들의 서비스 수준은 아직도 개선될 여지가 매우 많다. 소수의 변호사들만이 활동하면서 일각으로부터는 특권층이라는 비판까지 받았던 과거로 돌아갈 수는 물론 없다. 그러나 휴대전화 때문에 늦은 밤이나 주말에도 의뢰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보면 때때로 “안 계신다고 해라” 할 수 있던 시절이 부럽기도 하다. 급한 일도 아닌데 주말까지 전화를 하는 의뢰인의 전화를 받으면서 한달에 하루 정도는 발신자표시기능이 사라지는 통신장애가 일어났으면 하는 엉뚱한 마음이 드는 것은 비단 나만의 심정은 아닐 것이다.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