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는 전문지식을 세상에 나눠주는 자”


한문철 변호사는 교통사고 손해배상사건에 대해 업계 1인자로 알려져 있다. 이제는 다른 변호사들조차도 교통사고 상담이 들어오면 그를 소개하기도 한다. 교통사고 손해배상사건은 먹잇감을 놓고 싸우는 맹수처럼 변호사들이 치열한 수임경쟁을 벌이던 전쟁터라고 할 수 있다. 한문철 변호사는 그런 싸움터를 일거에 평정해 버린 것이다.
평정은 간단했다. 인터넷에 그가 경험한 5000건의 사건에 대한 데이터를 오픈해 버렸다. 한 사건당 수임료 100만원을 받는다고 공언했다. 경험과 자료 그리고 수임료에서 다른 변호사들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경쟁력으로 경쟁자들을 눌러버린 것이다.
그의 능력은 이미 전부터 달랐다. 그는 ‘전설의 민법강사’로 소문이 나 있었다. 신림동 고시촌에서는 그의 강의안이 필독서였고 그가 가르친 내용을 담은 테이프는 히트한 음반같이 돌아다녔다.
2012년 2월 7일 교대역 부근의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먼저 사무실의 모습부터 전혀 달랐다. 사무실이라기보다는 방송국 스튜디오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삼각대 위에 놓인 16밀리 카메라의 검은 눈이 변호사석을 향해 있었다. 교통사고에 대한 법률지식을 인터넷을 통해 세상과 나누는 1인 방송국이었다. 책상에 붙어있는 기다란 탁자를 가운데 두고 마주앉았다. 안경 뒤로 보이는 동그란 눈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변호사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항상 먼저 던지는 질문이었다. 신기한 건 변호사마다 정의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의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저는 변호사란 전문지식을 마음껏 세상에 나누어 주는 사람이라고 정의합니다. 내가 취급한 5000건의 데이터를 무료로 공개해 사람들이 이용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인터넷을 통해 얼굴을 비치면서 직접 상담을 해 주기도 합니다.”
그는 교통법률 전도사다. 라디오 방송 등 불러주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지 간다.
“무료로 수천 건의 교통사고 해결 방법을 공개하고 직접 무료상담도 하는데 수입에 지장이 없습니까?”
세상은 간단한 지식 자체도 비밀로 하면서 높은 대가를 요구한다.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이나 그 가족은 정말 절실합니다. 브로커들이 판을 쳐서 받을 수 있는 돈의 반도 못 받게 하고 다시 거기서도 30%를 성공보수로 떼어내는 게 현실입니다. 절실한 사람들에게 저는 필요한 모든 지식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답답한 머리를 확 열어주고 피 값도 제대로 받게 해 주는 게 보람인 거죠. 자료를 오픈하니까 보험사의 약관도 달라진 적이 있습니다. 위자료액 등이 현실화된 거죠.”
변호사들이 손해를 보면서도 국민을 위해 보험사의 약관을 변경시켰다는 건 큰 공로였다.
“어떻게 교통사고에서 최고의 전문가가 됐는지 과정을 말해주시죠.”
“1993년 변호사 개업을 하고 우연히 버스공제조합 고문변호사를 맡게 됐습니다. 그쪽에서 보내주는 자료만 법원에 제출하면 됐지만 이왕 맡은 분야니까 직접 공부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접 준비서면을 쓰면서 5년 동안 1000건을 처리하다보니 실력이 느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한 일은 보험회사 측 대리인으로서 피해자 측을 공격해서 돈을 깎는 일이었죠. 그러다 보니 가족 측을 대리한 원고변호사들이 너무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 봤습니다. 보험회사 측 자료는 넘쳐나는데 피해자 측에서 활용할 자료는 별로 없더라고요. 나이가 들어가면서 뭘 먹고 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문변호사도 그 회사에 친한 사람이 없어지면 물러나야 하는 거니까요. 예전에 변호사 수가 적을 때는 간판만 걸면 그래도 밥 먹고 살 만큼 사건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이제는 인권의식도 향상되고 전문화하지 않으면 변호사가 살아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대형로펌에도 뒤지지 않고 법률시장개방에서도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궁리하다가 이제는 인터넷과 연관지어 교통사고 피해자를 위한 변호사가 되어 보자고 구상했죠. 1년에 교통사고가 30만 건 정도 발생하는데 피해자 가족들은 속시원하게 물어볼 사람도 없습니다. 한 건 상담을 하고 만원씩만 받아도 100억, 가족까지 포함하면 500억 시장이라고 진단했습니다. 법정에 가지 않고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루 17시간씩 사이트 구축에 미쳐서 일했습니다. 정보와 지식을 다 알려 줄테니까 스스로 재판을 하라는 뜻이었죠. 처음 2년 동안 사이트를 만드느라고 일반사건은 아예 안 맡아 집에 생활비도 가져다주지 못하고 손가락 빨면서 제작비만 2억을 투자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집사람 적금을 해약하기도 했죠. 12년 전 15억원을 들여 프로그램을 만들고 특허등록을 했는데 다른 데서 가져갔어요. 인터넷 상담을 시작했는데 다른 인터넷 로펌이 생기면서 그대로 베껴 가더라구요. 그래서 지금은 얼굴 동영상이 나가면서 상담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닷컴’이라고 나홀로 소송을 주장하셨는데 그게 가능했나요?”
“한번은 의대교수님이 제 안내를 받고 직접 소송을 해보려고 했는데 안 되더라고 호소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기가 맹장수술 매뉴얼을 만들어 순서대로 하라고 해도 일반인들은 못하듯이 소송도 그렇다는 겁니다. 납득이 갔어요. 그래서 저도 다시 소송을 하려고 마음먹었죠. 새로운 소송의 트렌드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료와 경험에서 업계의 2등 없는 1등이 되려고 결심했습니다. 제가 3000건의 데이터를 확보할 때까지 값을 무진장 싸게 해주자고 결정했습니다. 인터넷에 1000명이 들어오면 그중 한건이 사건으로 들어왔습니다. 착수금 100만원을 포함해서 사망사건은 4.4%, 부상사건은 7.7%로 수임료를 낮추었죠. 다른 변호사들은 2~30%를 수임료로 할 때라 욕을 많이 먹었습니다. 데이터를 왜 오픈시키느냐는 불평도 들었습니다. 의뢰인들이 변호사사무실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고 온다는 거죠. 저 때문에 브로커들이 자리를 잃고 변호사들이 물러서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보험사도 싫어하고 법원도 아무나 와서 항의하니까 곤혹스러워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6년 동안 3000건의 소송을 맡아 수행했습니다. 일 년에 900건을 하고 서울중앙지법사건의 4분의 1을 제가 해낸 적도 있습니다. 5000건의 교통사고 데이터만 확보하면 어떤 변호사도 저를 따라잡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통사고 사건을 취급하는 변호사업계는 어땠었죠?”
“초창기 손배사건 분야는 브로커들의 천국이었습니다. 많은 돈을 받아낼 수 있는 사건도 일부만 받고 빨리 사건을 끝내는 경우가 흔했죠. 자금회전을 빨리하려고 그런 거죠. 병원 원무과장, 사건브로커들이 커넥션을 이루고 먹이사슬을 이루었죠. 브로커들이 전국을 돌면서 사건을 유치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직거래가 안 되는 유통망이었습니다. 중간의 리베이트만 없애도 가격이 파격적으로 싸지는 겁니다. 스스로닷컴을 통해 직거래가 이루어지도록 했습니다.
두 번째는 대형로펌이 따라올 수 없도록 내가 최고의 전문가가 되어야 했습니다. 장애분야에 대해 간호사들에게 열심히 배웠습니다. 2만 장의 신체장애에 대한 자료를 구했습니다. 의사들은 자기 분야만 알지 다른 과의 문제는 모르죠. 저는 의학의 모든 분야에서 신체장애에 대한 부분을 공부했습니다. 5000건의 사건을 처리하니까 나만의 직감이라는 게 생겼습니다. 98% 정확도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타협하고 사건을 그만두어야 할 시점을 판단할 수 있을 정도가 됐습니다.”
“사건을 처리하면서 독특한 나만의 방식이 있다면 알려주시죠.”
“사람들이 흔히 맛집을 찾아가는데서 요령을 발견했죠. 수임료가 싸고 데이터와 경험이 많아야 합니다. 그리고 일이 끝난 후에도 실익이 있고 감사하는 마음이 생겨야 저를 추천하게 됩니다. 의뢰인뿐 아니라 이제는 판·검사나 다른 변호사, 상대방인 보험사에서도 저를 추천해 줍니다. 기자들도 한 변호사가 제일 잘한다고 칭찬해 줍니다. 저를 아는 순간 사람들의 눈이 확 뜨이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송이 보험사가 끄는 대로 가게 됩니다.”
“오는 사건을 다 맡았습니까?”
“단호하게 거절해야 할 사건을 빨리 파악해야 합니다. 아무리 매력적인 사건이라도 잘못된 만남은 정말 스트레스니까요. 변호사는 스트레스를 먹고 사는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뢰인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저는 거절할 사건인지 아닌지 바로 결정을 합니다. 나를 꼬나보는 눈길로 들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바로 돌려보냅니다. 독사눈을 뜨는 사람은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뢰하고 들어오는 사람은 미소가 있게 됩니다. 일곱 명이나 여덟 명 가량 여러 사람이 몰려서 상담을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도 거절합니다. 그중에는 대개 방해꾼이 끼어있기 마련입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물어보는 변호사 쇼핑족 사건도 맡아서는 안 되죠. 사건기록이 담긴 보따리를 들고 오는 사람들의 사건도 거절해야 합니다. 자기가 써낸 것만 가득 들어있고 객관적 자료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들어와서는 자기 말이 더 많은 사람도 재미없는 경우죠. 마지막으로 직원들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도 돌려보내야 할 사람입니다. 직원을 우습게 보면 변호사를 그렇게 보는 것이고 나중에 꼬투리를 잡고 덤벼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걸러서 사건을 맡은 이후는 어떻게 합니까?”
“믿고 맡기면 고객이 감동할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사건을 맡을 때 그 피해자가 내 아들이라면, 내 딸이라면, 우리 부모님이라면 어떻게 할까 하는 심정으로 대합니다. 정말 고마워할 사건만 맡으려고 해 왔습니다. 1000건을 잘해도 한건을 실수하면 안되는 게 변호사의 입장입니다. 정말 잘해야 합니다. 더러 중간에 정당한 사유 없이 생떼를 부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변호사 몰래 보험회사와 합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미련 없이 사임해야 합니다. 집을 나가겠다는 사람과 어떻게 함께 살 수 있겠습니까? 하지 말아야 할 사건은 보수액이 아무리 커도 그만둬야 합니다. 돈은 의뢰인이 감사하면서 주는 돈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편한 돈이죠.”
“한 분야에서의 성공한 모습은 경제적으로 어떤 건가요?”
“1인자가 되면 그에 합당한 보수가 있다는 걸 경험했습니다. 노력한 만큼 대가가 따라야 합니다. 대형로펌을 빼놓고 개인변호사로서 나만큼 수입을 올리는 변호사가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현직에서 나와 전관예우를 받는 변호사들을 보면 첫 해에는 사건이 많지만 그 다음부터는 급격히 줄어듭니다. 또 골프회원권을 팔아서 생활비로 쓰는 변호사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해마다 수입이 증가해 왔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면서 인터폰을 들었다. 여비서가 나온 것 같았다.
“나 지난해 소득세 얼마를 신고했지?”
그는 내게 소득세를 알려주었다. 세금만 해도 작은 아파트 한 채 값이었다. 그가 덧붙였다.
“저는 변호사가 세금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건을 소개하는 사무장에게 리베이트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걸 주면 세금을 속여야 하고 그러다 박살이 납니다. 세금을 정상적으로 내야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내후년에는 소득세만 10억을 내는 게 목표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루에 50만원씩은 언제든지 쓸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막상 부자라고 하더라도 밥값을 잘 내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저는 사람들 만나면 밥 사주고 대리비 내 주는 걸 취미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룸살롱 같은 데는 가지 않습니다. 양주사다가 집에서 아내와 함께 마시면 되는데 왜 그런 낭비를 하겠습니까?”
문득 악착같은 그의 1인자 탈환의 모습 저편의 시련이 궁금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을 얘기해 줄 수 있어요?”
“회사원이던 아버지가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실직을 했죠.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입주해서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처음엔 중학생을, 나중엔 동급생을 가르쳤죠. 고등학교시절 선생님 네 분이 박봉인데도 한분당 10만원씩을 털어 저에게 대주면서 공부하라고 하셨죠. 저보고 전국수석을 하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분들 도움을 받고 서울법대로 진학했습니다. 대학시절은 서슬 퍼렇게 과외를 단속하던 때였죠. 그래도 당장 동생들이 밥을 굶는데 어떻게 공부를 하고 있겠습니까? 책장사도 하고 슬리퍼 장사도 했습니다. 책장사를 할 때는 수금한 돈을 급히 썼다가 횡령죄로 고소당하기도 했었죠. 슬리퍼 장사를 할 때는 물속에 슬리퍼를 넣어 잡아당기는 시늉을 하면서 사람들을 현혹시키기도 했습니다. 대학시절 과외선생으로 동생 넷을 공부시켰습니다. 사법연수원 때도 과외선생노릇을 계속했습니다. 군법무관시절도 심지어 검사가 된 이후에도 학원선생을 했습니다. 집사람을 만나 사귀면서 7년이 지났는데도 데려다 누일 방이 없어 결혼을 못했었습니다. 저희 집이나 처갓집 모두 어려웠죠. 모두들 추상적으로 행복을 얘기하는데, 이제 저는 성공한 남자로서 아내에게 눈에 보이는 걸 해주고 싶습니다. 많은 돈을 가족을 위해 남겨주고 싶습니다.”
그의 물질관에도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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