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어딜봐서 깡팹니까. 저 공무원 출신입니다.”
“건달도 아닌 게, 민간인도 아니고… 너 같은 놈을 ‘반달’이라고 한다면서?”
“최사장님 인맥에, 내 실력이면… 이거~ 완전히 살아있는데~”
이 대화들은 영화 ‘범죄와의 전쟁’을 보고 나서 기자가 기억에 떠오르는 대사들을 적어본 것이다. 명색이 갱스터 영환데 건달도 아니고 민간인도 아닌 ‘반달’이 설치는 장면들이 더 선명하다.
‘범죄와의 전쟁’은 그렇게 내 기억에 남았다. 겉보기에 주먹밖에 몰랐던 폭력조직은 전직 세관공무원 출신인 최익현과 연루되면서 더욱 ‘나빠지기’ 시작한다. 폭력, 의리 위에 연줄을 동원한 돈과 권력이라는게 있다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되고 그리하여연간 수억원의 사업권이 걸린 합법적인 사업을 하는 데 불법적인 물밑작업이 필요함을 절감하게 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조폭 영화라기보다는 수십 년 전에 활개쳤을 법한 한 로비스트의 일대기에 가깝다. 부산을 주름잡는 조폭과 첫 대면하는 장면에서 족보를 따지다가 갑자기 윗사람 대우를 원하는 최익현의 모습은 코믹하다. 하지만 강박적으로 연줄과 족보를 꿰는 최익현의 습관은 다른 조직도 부러워하는 필수적인 전략이 된다.
법망을 빠져나가는데도 역시 최익현의 족보전략이 한몫한다. 혈연과 지연을 통해 현직 검사장급 인맥까지 연결하는 능력은 혀를 내두를 만하다. 마지막에는 누아르 영화에 흔히 나오는 배신의 코드 역시 최익현에 의해 변주되기까지 한다.
최익현이 어떤 사람인지는 그가 아끼는 수첩과 빈 총이 단적으로 잘 설명해준다.
그가 양복주머니에서 꺼내든 두꺼운 수첩에는 틈틈이 만난 사람들에 대해 빼곡히 손글씨로 적어넣었던 정치권 인사, 지역재벌, 검찰·경찰 관계자들의 명단이 들어있다. 게다가 야쿠자로부터 선물받은 6연발 리볼버도 가관이다. 멋들어진 총이지만 총알은 장전돼있지 않다. 생명을 담보한 상황에 나서면서까지 허리에 찬 빈 총을 만져보며 안도하는 모습이 흥미롭다.
어쩌면 로비스트의 실체가 그런 것인지 모른다. 자신이 행사할 수 있지만 가지고 있지 않은 권력, 행사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안 될 것도 없을 것 같은 가능성.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힘. 실체는 없고 무형이지만 쓸모 있는 어떤 것. 그것이 어떤 이에게는 권력이며 사기요, 범죄의 씨앗이 되는 것은 아닐까.
법조기자가 된 뒤로는 범죄를 다룬 영화들을 유심히 보게 된다. 비록 허구일지라도 범죄자를 수사하고 사법처리하는 검찰과 법원, 경찰들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대부분 법을 지키며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수사기관이나 법원 등은 매우 낯설다. 하지만 영화 제작자 입장에서 범죄자란 매력적인 소재다. 메인 캐릭터는 스크린 속에서 살인이든 사기든 폭력이든 이야기를 굴러가게 하는 충분한 동력을 제공한다. 그중에서도 갱스터 영화는 플롯을 극단으로 이끌어가기 알맞은 환경을 구성한다.
원시적 에너지가 꿈틀거리는 남자들의 세계에서 조직원의 음모와 배신 등의 요소가 적절히 끼어들면 갈등과 균열이 생기고 역동적인 스토리가 만들어진다. 반면, 현실 세계에서 이들을 굴러가게 만드는 것은 돈이 되는 사업들이다. 최근 국내 갱스터영화나 누아르 영화에 건설사업을 하는 조직이 많이 나오는 것도 그 같은 이유다.
지난해, 올해에 걸쳐 부산저축은행을 필두로 대형 경제범죄사건이 연달아 터졌다. 잇따라 중대형 저축은행들이 영업정지를 당했고, 수사 대상이 됐다.
수조 원대의 불법대출비리 뒤에는 금융감독 당국 관계자들과 고위층 전현직 정관계 인사들이 혐의를 받아 검찰청 문턱을 드나들었다. 그 뒤에는 이들과 끈이 닿았던 거물급 로비스트가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재판을 받는 법원 앞에는 수십 년간 모은 돈을 날려버린 서민들이 있었다. 영화 속 최익현이라는 인물이 낯설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런 현실때문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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