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의 출현을 기대하며

전해들은 이야기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초대 대법원장인 김병로씨를 언급하면서 항상 ‘대한민국 헌법 선생님’이라고 하였다 한다. 한편 실화로서, 미국의 어느 대법관이 주중에 골프 치는 것을 기자가 발견하고는 “국민의 세금을 쓰는 공직자가 주중에 골프를 쳐서 되겠느냐”고 비난한 적이 있었는데, 대답은 “더 좋은 판결을 하기 위하여”라는 짤막한 것이었고, 이로써 모든 잡음이 사라졌다는 얘기가 있다.
부시와 고어 사이의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플로리다주의 개표에 문제가 생겨 수작업을 할 것인지가 쟁점이 되었고, 그 결과 근소한 표차로 승부가 갈릴 것이 예상되었다. 이러한 결정적인 순간에 미국 대법원이 개입하여 ‘수작업 불가의 판결’을 내려 혼란국면이 일거에 수습되었으며, 미국 국민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아니하였다.
사법부 내지는 판사가 왜소화되었다는 것은, 판결이 권위와 신뢰를 잃고, 판결이 있은 후에도 왈가왈부 시비가 끊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판결을 소재로 한 최근 2편의 영화에 대한 국민의 호응도가 우리 사법부의 위상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무릇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방법, 즉 질서유지의 방법에는 3가지가 있다. 하나는 물리력 또는 ‘강력한 정치권력’이고, 둘째는 ‘지적 우월성의 확보’이며, 셋째는 ‘도덕적 우월성’이다. 하나씩 살펴보자.
우선 강력한 통치 권력과 관련하여 과거 특히 5·16 쿠데타부터 1987년 6·29 민주화 선언 때까지는 정치적 필요성에 따라 권위적 체제가 유지되었고, 그 부수현상으로 사법부의 권위도 ‘외형적으로는’ 유지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 민주화되는 과정에서 이러한 바람막이는 없어지고 사법부의 신뢰도가 있는 그대로 노출되었다.
다음으로 지적 우월성에 의한 지배와 관련해서는 전체 국민의 지적수준이 급격히 향상되고 특히 정보공개와 인터넷 등에 의한 지식검색이 용이해짐에 따라, 판사를 포함한 전문가 집단과 사건당사자를 포함한 일반인 집단과의 지적 차이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 결과 법관에 대한 무조건적인 존경심이 크게 희석되었다. 더욱이 재판의 속성상, 사실관계는 당사자 본인이 훨씬 더 잘 알고 있고, 게다가 당사자들이 스스로 검색한 법률지식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고집함으로써 판결의 장악력은 더욱 떨어지게 되었다.
끝으로 도덕성에 의한 지배력인데, 여기에는 도덕적으로 깨끗하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도덕적 헌신도’ 소위 노블레스 오블리주까지도 요구된다. 평균적으로는 사법부구성원의 도덕성이 다른 직업군에 비하여 높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세상의 흐름이 경제위주로 바뀌고, 법관들도 생활인인 이상 세속을 초월할 수 없으니, 종교인과 같은 정도의 존경과 신뢰를 기대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도덕적 헌신도의 면에서는 상황이 더욱 어렵다. 권위주의 시절 초기에는 일부 저항적인 판결이 있었으나, 권력자에 의해 철저히 보복당하였고, 그 이후에는 이것이 나쁜 선례가 되어 사법부가 국가의 민주화에 거의 기여하지 못하였다. 이점이 오늘날 국민으로부터의 신뢰획득에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사법인접권력’이 강한 사법부를 내심으로 원치 않고 있다는 점이다. 수사·소추기관은 물론이고, 최고법관의 임명권자인 대통령, 그 동의권자인 국회, 사회발전을 주도하려는 언론 그 모두가 각각의 권력의지 또는 이해관계에 따라 얌전한 사법부, 소소한 법적다툼만을 처리하는 사법부가 되기를 원한다. 커다란 정치적 이슈나 사회변화를 주도하는 결단이 사법부에서 내려지기를 원치 않는다.
가장 전형적인 사례가 양형기준법의 제정에 의한 사법부의 형사양형에 대한 ‘적절한 그리고 당연한’ 재량권의 박탈이다. 그 피해는 결국 국민에게 돌아갈 운명이다. 또다른 사례는 최고법원 법관의 대통령에 의한 임명 및 그 동의를 위한 국회에서의 청문회과정에서 나타나는 ‘안전 또는 온건’ 위주의 선택이고, 이에 대한 사법부의 순응적 태도이다. 최고법원 법관의 선택과정에서, ‘재산형성과정의 투명성 그리고 실무처리능력’이 지나치게 집중 거론되고, ‘역사의식이나 법조철학’이 등한시되는 현상은 바람직하지 않다. 타개책은 사법부구성원 스스로의 인식전환밖에 없다. 법관은 결코 법률지식만 갖춘 기능인이 아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추고 우리 사회가 나아갈 길을 고민하는 지성인이 되어야 한다. ‘모든 법률문제는 결국 무엇이 공평한가로 귀결되기 때문에 전문법원이 필요하지 않다’는 미국의 사법철학을 음미해야 한다. 그리고 명문가 출신이며 유복한 환경에 있었으면서도, 국가의 위기 때마다 자리를 박차고, 위기상황에 몸을 던진 홈스 판사의 이력을 본받아야 한다. ‘몸 사리는’ 판사에게 국민은 신뢰를 주지 않는다. ‘몸을 던져야’ 거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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