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었을 때는 아는 것, 모르는 것 총동원해서 부지런히 말하고, 나이가 조금 들면 게을러져서 기억나는 것만 말하고, 나중에 귀밑털이 하얘지면 생각나는 대로 말한다’고 이어령 교수는 말했다. 우리는 만나는 사람 중 90%의 이름을 잊고, 알고 있는 전화번호의 99%를 잊고 산다고 한다. 뇌과학자들에 따르면 뇌가 망각한 것이 아니라 단지 회상에 실패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기억은 감정으로 버무려지기 때문에 똑같은 사실도 슬플 때와 기쁠 때 다르게 저장된다고 한다.
여러 해 동안 국민권익위원회에서 무료법률상담을 해오고 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법률적으로는 더 이상 도와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여러 기관을 찾아 헤매다가 시원한 해결책을 듣지 못해서 ‘국민권익위원회’라는 타이틀에 기대를 걸고, 마치 ‘신문고’를 두드리는 심정으로 온다. 사정이 절박한 만큼 사연을 잘 들어주고 울분을 공감해 주는 것도 상담의 중요한 요소다.
칸트는 2월이 가장 아름다운 달이라고 했지만 꽃샘추위가 몹시 성가셨던 날, 40대 중반의 여자가 상담을 왔다. 얼핏 보기에 날씬한 체구에 예쁘장하고 귀티나게 보였다. 말귀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노인네와의 긴 상담에 지친 다음에 맞은 여인이라 신선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앉은 여인의 얼굴은 온통 뾰루지투성이고, 손은 거칠기가 이를 데 없었다. 한눈에 보아도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역력했다.
그 여인의 사연은 이렇다. 오늘도 10여 일 간 모은 재활용품을 고물상에 가져가 4만2000원을 받았다. 한데 고물상 주인이 돈을 난로 옆에서 건네주다가 만원짜리 한 장을 떨어뜨려 불에 타버렸다는 것이다. 주인의 부주의로 인한 것이니 만원을 다시 달라고 해도 주인은 못주겠다 버틴다는 것이다. 오전 내내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해결이 되지 않자 여기에 도움을 청하러 왔다. “당연히 주인이 보상해줘야지. 참 나쁜 사람이네요”라며 맞장구를 쳐주자, 여인네의 눈에 눈물이 그렁거린다.
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또랑하게 들려온다. 차분하게 경위를 물어보니 주인의 이야기는 달랐다. 건네준 돈을 아주머니가 세다가 떨어뜨린 것을, 자기 실수는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고물 값을 제대로 쳐주지 않았다고 억지를 부리고 경찰에 신고까지 했다는 것이다.
한 사건을 두고 두 사람의 말이 이토록 다르니 판단을 내리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둘 중 한 사람은 거짓말일 텐데 누구의 손을 들어주어야 하나. 솔로몬의 지혜를 동원해야 할 상황이었다. 나는 인정에 호소하며 고물상 주인을 어렵사리 설득하여 반(5000원)이라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아주머니에게도 본인의 잘못도 있다는 것을 간신히 설득은 하였지만, 그냥 돌려보내기에는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겨우 만원인데… 점심이라도 사먹으라고 돈을 줄까? 이 사람이 받을까? 기분 나빠하거나 자존심 상해하지 않을까? 혹시라도 어려운 사람에게 잘못된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닐까? 온갖 우려로 망설이고 있는데 여인이 인생역정 이야기를 꺼낸다. 옷가게를 하다가 부도가 나고 이태 전 남편까지 병으로 잃었단다. 젊은 나이에 골목골목 헤매며 폐품을 모아 생활한다는 것이 참으로 대단하게 여겨졌다. 격앙되었던 목소리도 잦아들고 마음이 누그러진 아주머니에게 나는 만원을 조심스럽게 건넸다. 주저하면서도 돈을 받아 넣더니 “고물상에서 돈을 받으면 이 돈은 갖다 드릴게요”라고 하며 일어선다. 돌아가는 그녀의 조금 굽은 등이 안쓰럽다.
우리 사회는 생활고에 못 이겨 우발적, 충동적으로 저지른 범행을 ‘생계형 범죄’로 묘사하며, 동정을 하거나 처벌에 있어서도 관용을 베풀기도 한다. ‘생계형 범죄’를 저지른 자들은 대부분 저소득층이므로 동정은 어쩌면 사람으로서 당연한 것이나, 저지른 죄가 조금이라도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면서 더욱 느끼는 것이지만, 목적뿐만 아니라 수단 역시 중요한 가치이다. 수단은 단순한 통과의례가 아니며 그 자체가 전체이기도 하다. 개인이 살아가면서 동원하는 많은 수단들이 모여서 개인의 종합적인 인생이 된다. 수단이 비틀려 있다면 결국 그의 인생도 비틀려 있을 게 분명하다.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남의 것을 탐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보려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과 분노가 어쩌면 그 여인네를 지탱하는 원동력이었으리라. 상대를 속이려는 거짓말은 약간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은 ‘존재에 대한 위로’라 하겠다. 부디 그 여인의 자존심이 자기연민을 위로하는 데에만 머물지 않고, 진정한 자존감으로 승화된 삶을 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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