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광화문을 갔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책이나 한번 둘러보자는 심산이었다. 느린 걸음으로 둘러보다, 눈길이 닿은 책 한 권이 있어 집어들었다. 최근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책이어선지 매대 앞쪽에 진열돼 있었다. ‘판사 니들이 뭔데’라는, 석궁테러를 했던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의 책이었다.
책을 펼쳐들었다. 숱한 보도를 통해 어떤 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책은 흥미로웠다. “이런 개만도 못한 인간이 판사라니?” 원색적인 표현도 눈에 들어왔다. 이정렬 창원지법 부장 판사에 대한 대목이었다. 자신의 석궁테러 직후, 이 부장판사가 인터뷰를 통해 재판과 테러에 대한 생각을 설명했던 부분을 지적하면서였다. 갑자기 궁금증이 일기 시작했다. 해소 불가능한 이 분노의 원천은 어디인가. 김 전 교수는 이렇게 적었다. ‘1995년에 부교수 지위확인 소송을 할 때,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공직기강 비서관이었다는 변호사를 선임했다. 그런데 필자가 모든 증거들을 완벽하게 준비해 주었는데도 변호사는 법정에서 제대로 제시하지도 못하였고 성균관대 측 변호사가 논리도 없이 억지를 부리는 데도 판사 앞에서 말 한번 시원하게 못했다. 당연히 패소했다. 판사 앞에서는 ‘고양이 앞에 쥐’처럼 변론도 시원하게 못하고, 법리 논리도 형편없었던 것이다. 변호사 선임에 돈은 돈대로 쓰고 이렇게 속 터질 일이 있나 싶었다. 오죽했으면, 방청석에 있던 필자의 아버지가 손들고 변호사 대신 판사에게 한마디했겠는가?(중략) 더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은 그는 필자가 교육부를 상대로 제기한 행정소송도 맡고 있었는데, 민사에서 패소하자 필자에게 상의도 없이 소를 취하한 것이다. 패소할 때 하더라도 끝까지 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무능한 변호사였다. 이때의 경험이 필자가 나홀로 소송을 하게 된 이유 중 하나다.’ (책에서 언급된 실명은 해당인들을 위해 적지 않았다)
단추는 이렇게 잘못 채워지기 시작했다. 당시 변호를 맡았던 변호사를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입장에선 그가 처음 받았던 법률 서비스가, 분노의 발화점이었을 수도 있단 소리다. 그가 나홀로 소송을 하게 된 이유, 그 계기가 이렇게 적혀있었던 것이다. 만족스럽지 못했던 변호, 기대에 어긋났던 판결,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일방적인 소송의 취하. 법에 기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느낄 실망감과 좌절감이 큰 것은 당연지사였을 수도 있다.
“그 영화 재미있게 봤다.” 한 달여 전 주말 저녁. 시아버님께서 시어머님과 영화관엘 다녀오시더니 한 말씀을 하셨다. 김 전 교수의 ‘석궁테러’와 재판과정을 그린 영화 ‘부러진 화살’을 보고 오셨다는 거였다. 법조기자의 눈에는 영화가 ‘전혀’ 재미있지 않았다. 기사를 써야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실제와 다른 부분을 메모하느라, 관객으로서 몰입할 수 있는 여지를 놓친 탓이었다. 그런데 그 영화를 아버님은 “재미있다”고 하시니 이유를 여쭤봤다. “법원 가면 다 그렇지 않냐. 그런데 그 부분을 긁어주니 시원하더라. 교수쯤 되는 사람들도 그런 일을 당하는데, 돈 없고 힘 없는 사람들은 어떻겠어.”
법원과 거리가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 이렇다니. 사실 충격이었다. 사람들은 법원에 대해 막연한 분노를 갖고 있다. 한번도 법정에 서보지 못한 사람들이 이렇게 법원에 분노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법원은 이렇게 설명한다. ‘소송 과정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절차를 무시하고 무조건 들어달라고 떼를 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판사나 변호사는 없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의 그 숱한 법정에서 열리는 재판들은 일종의 설득의 장이다. 검사와 변호사는 판사를 납득시키려 소리없는 전쟁을 펼친다. 민사 소송에서도 그렇다. 재판장을 이해시키려는 변호인들 간에 숱한 머리싸움이 벌어진다. 판사들 역시 마찬가지다. 판결문을 통해 당사자들을 설득시켜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법원에서 소송 절차를 설명해주는 경우는 드물다. 간혹 법원에서 국민참여재판이 열릴 때나, ‘쉬운 말’로 당사자나 방청객을 위한 설명을 해주는 정도다. 재판의 결과에 승복하기 위해선 과정이 충분히 이해되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 판결문도 그렇다. 수많은 사건이 다뤄진다는 이유로 주요 사건을 제외한 대다수 사건은 선고 결과만을 알려준다. 결과를 듣기 위해 법정까지 나오는 수고를 해야 하지만, 판결문을 받아 볼 때까지 결과를 수긍하기 어렵다.
판결문을 받고도 문제는 이어진다. 몇자 안 되는 판결문도 있을 뿐더러, 설사 충분히 판결 이유를 적어놓더라도 어려운 법률용어 때문에 판결문은 별도의 해독이 필요하다. 당사자로선 판결문을 들고 변호사를 다시 찾아가 설명을 들어야 할 판이다. ‘부러진 화살’로 법원은 충분히 내홍을 겪었다. 분노도 절감했다. 이젠 정말, 해소에 나설 때가 아닌가.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