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추위는 뼛속까지 파고든다. 이젠 날이 풀리겠구나 하고 기대한 탓인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찬바람에 마음까지 시리다. 새학기 혹은 새로운 일들이 시작되는 3월을 다들 ‘흥분과 설렘’으로 표현하지만, 난 이상하게도 어설픈 날씨만큼이나 마음 한구석이 쓸쓸하고 외로웠던 것 같다. 나중에 알았지만, 봄철에 자살충동을 동반한 우울증이 증가한다는 보고가 있다 한다.
나의 힘든 3월이 꽃샘추위라는 날씨 탓만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새싹들이 앞 다투어 나오고 모두가 활기차지는 시기에 우울증이라니, 生發之氣의 계절이라는 봄과 뭔가 안어울리기는 하다. 모든 것을 살리고 죽이지 말라는 것이 봄의 절대 강령인데 말이다. 겨우내 움츠렸던 기운들이 펼쳐나기 시작하는 지금이 진짜 죽을 수도 있을 만큼이라도 힘이 생겨난 탓이다. 추운 겨울에는 죽을 엄두도 못 내다가 이제 날씨가 따뜻해지니,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실제로 조울증이 위험한 시기는 울증에서 조증으로 이행하기 시작하는 때이고 그 시기에 더욱 특별하게 관리해야만 한다.
요새는 심리센터들도 많이 생기고 정신과를 가는 것이 그렇게 흠이 되지 않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집안에 정신과를 다니는 환자가 있다는 것은 숨겨야 하는 일이었다. 요새는 한의원에 와서도 지난 병력을 말해보라는 질문에 환자들이 스스럼없이 신경안정제를 복용 중이거나 우울증 치료를 받았노라고 이야기한다. 우울증이 감기 수준의 쉬운 질병이 된 셈이다.
우울증이 쉬운 병이 된 건 두 가지 측면에서 아주 반가운 일이다. 한 가지는 환자가 빨리 발견되어 위험해지는 상황이 줄어든다는 것과 치료가 그만큼 쉬워진다는 것이다. 정신과에서 치료의 포인트가 될 수 있는 게 ‘병을 인식하고 있는가’이다. 자신의 감정 상태나 행동양태를 병으로 인식하고 있으면 이미 절반은 치료가 된 셈이다. 그러면 치료스케줄에 잘 따라오고 의사가 해주는 조언이나 설명들을 잘 따르게 된다. 이미 의사를 찾아온 자체가 우울증을 극복하고 있다는 증거나 다름없다. 우울증이 무서운 정신병으로 분류되어 접근하기 어려웠을 땐 병을 숨기거나 인정하기가 그만큼 쉽지 않았다.
다정한 동네에서 몇 년을 계속 한의원을 열어놓으니 동네의 온갖 소문들이 절로 들어온다. 지루한 치료실은 자연스럽게 그런 정보 공간이 되어 버렸다.
작년쯤엔가 기운이 없어 왔노라며 곱상한 할머니가 오셨다. 차림새나 말투가 워낙에 차분하고 조용해서 원래 성정이 그러하려니 생각했었다. 나중에 대기실에서 다른 환자가 ‘저 할머니는 밖에 나가지 않고 집안에만 하루종일 틀어박혀 지내는 분’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기력이 없는 건 보법(補法)을 쓰면 되겠지만, 왠지 할머니의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들어보아야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일단은 할머니한테 매일 치료를 오셔야 한다고 하고 진료 오시는 날은 오랫동안 진료실에 붙잡고서 많은 이야기를 하실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 드렸다. 드문드문 오신 게 3개월쯤 지났을 때야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속상해서…”라고 울면서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아들이 ‘멀쩡한 육신을 가지고 집에서 먹고 논다’는 것이 이 할머니의 근심의 시작이었다. 대학도 나오고 멀쩡하게 생겼는데 서른 몇 살이 넘도록 취업을 못하고 있으니 부끄럽고 속상했을 법하다. 그래서 아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냐고 하니 둘이서 서로 두문불출 각자 방에서만 지낸다는 것이다. 아들과 어머니가 같이 울증으로 빠지고 있는 꼴이었다. 갖은 설득과 꼬임으로 그 어머니는 어떻게 접근이라도 했지만, 집에 있는 아들은 어쩐단 말인가. 또 이런 상태로 있을 전국에 수많은 백수와 백수의 어머니는 어쩐단 말인가. 그러니 마음에서 몸이 얼마나 멀다고 마음이 그렇게 혹사당하고 있는데 기운이 펄펄 날 수 있겠는가. 결론적으로 그 치료에서 나는 실패한 것이다. 아니, 그건 나보다 더 큰 의자(醫者)가 해결해 주어야 할 일이었다.
봄과 우울증. 모든 것이 찬란해져 가는 때에 나만 홀로 아프고 병들고 늙어가는구나 생각될 때, 성공한 사람들이 모든 것을 다 견뎌내고 이루고 나서 느닷없이 허무함이 시작될 때 우리는 감기를 앓듯 마음에 우울증을 앓을 수 있다. 감기가 우리를 더 건강하게 하는 것처럼 우울증으로 우리 마음도 더욱 단단해질 수 있다. 또 감기가 모든 병의 근원이 되는 것처럼 우울증이 우리 생의 중요한 기로가 될 수도 있다. 우울해지려고 한다면 햇빛이 답이다. 살려는 의지가 생길 때까지 햇빛의 양기를 받으며 걸어야 한다. 갑갑한 옷은 느슨한 옷으로 바꾸고, 기운을 가볍게 하는 민트류와 같이 향이 있는 차를 마시고 친구를 만나고 수다를 떨어야 한다. 상담을 할 수 있는 많은 공간들이 늘어났음에도 아직까지 심리상담사와 정신과 의사들의 일을 친구들이, 혹은 성직자가 해주고 있다. 그리고 의식적으로라도 자꾸 큰소리로 웃어야 한다. 웃음은 오행중에 화의 기운, 무겁고 슬픈 금의 기운을 이긴다. 웃으면 건강이라는 복이 절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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