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처음 ‘샤테크’란 말을 들은 것은 겨울 휴가를 얻어 미국 집에 들른 남편을 통해서였다. 10년 가까이 미국에 살면서 전혀 들어 보지 못한 단어였다. 남편은 기러기 아빠였다. 철 없는 아내와 어린 자식들 수발한답시고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연말연시를 빌려 가끔 가족을 보러오는 것이 전부였다. 남편은 귀국을 앞 둔 어느 날 그녀에게 “샤넬 가방을 사 두면 돈이 된다고 하더라”면서 백화점 쇼핑을 가자고 했던 것이다. 그는 샤넬 가방은 같은 제품이라도 정기적으로 가격이 오르기 때문에 상당 기간 사용하다가 중고로 내놓아도 꽤 좋은 가격으로 되팔수 있어 운이 좋은 경우에는 돈이 남는다고 말했다.
기껏해야 월마트, 코스트코, 한아름(Hanarum; 한국인 자본으로 한국인을 대상으로 설립한 한국식 마트) 정도가 평소 행동 반경이었던 그녀에게 미국의 고급 백화점에서 쇼핑을 한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러나 남편과 색다른 데이트를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흥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들은 다운타운까지 차를 몰았다. 고급 쇼핑가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곳에 삭스 피프스 에버뉴(Saks Fifth Avenue)라는 백화점이 있었다. 2층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왼편에 샤넬매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이 제품에 관심을 보이자 매장 내에서 일을 보던 아시아계 여인이 다가왔다. 세련된 중년 여인이었다. 총명한 눈빛. 단박에 한국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국 분이세요?” 그녀는 이들 부부에게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예, 그런데요…” “뭐 찾으시는 제품 있으세요?” 종업원은 의례적이지만 진지한 접근을 시도했다. 그녀는 이것저것 살펴 보았다. 이 단계에서 촌티를 보여서는 안 되지 않는가? 그러다가 검은 색 가죽 가방을 보고 가격을 물어 보았다. “예, 4700달러입니다.” 놀라운 가격이었다. 부부 둘 다 당황하는 순간이었다. 그때 중년의 종업원이 말했다. “올해 샤넬 본사에서 이 제품의 가격을 15% 올리기로 했습니다. 곧 5000달러를 넘을 겁니다. 이미 LA나 뉴욕에서는 5500달러 이상으로 판매되고 있습니다. 아직 여기까지는 가격을 조정하라는 지시가 내려오진 않았지만요…”
허걱! 그녀는 남편이 말하는 샤테크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 것 같았다. 부부가 망설이고 있는 가운데 유니폼을 입은 금발의 백인이 주위를 왔다 갔다 했다. 매니저 급으로 보였다. 그녀가 한달 생활비에 상당하는 가격이 부담스러워 어쩔 줄 모르고 있는 터에 남편이 결단을 내렸다. “재테크라고 생각하고, 하나 장만하자. 내가 준 선물이라고 치고…” 그들은 그날 그렇게 ‘질러 버렸다.’ 백인 남성은 한국 종업원이 샤넬 가방을 포장하고 계산하는 모습을 무표정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는 듯이 보였다. 고급 백화점에서 한국인 직원을 채용한다는 것은 필시 전략적인 결정이었을 것인데, 이들 부부는 그들의 결정이 옳았음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최근 한국으로 귀국했다. 여러 사정이 겹쳐서 이젠 기러기 가족으로 떨어져 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빠르게 한국 현실에 적응했다. 그러나 문제도 있었다. 학교 동창 모임이나 지역 사회의 모임에 얼굴을 내밀다 보니 신경을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바로 그녀의 가방을 보는 주위의 시선이었다. 샤넬 가방? 아니었다. 실은 그녀는 그렇게 고심해서 장만한 샤넬 가방은 단 한번도 어깨에 메본 적이 없었다. 샤넬 가방은 그녀에게 보물 1호였다. 어찌 자식보다 귀한 샤넬 백을 함부로 메고 다닐 수 있단 말인가? 대신, 미국에서 평소 편하게 메고 다니던 가방을 들고 다녔다.
대학교 동창이 어느 날 한마디 했다. “웬 시장 바구니를 들고 다니니?” 충격을 받은 그녀는 적당한 가격대에 고상해 보이는 가방을 모색했다. 그러나, 루이비통, 프라다 등을 척척 들고 다니는 친구들과 수준을 맞추려니 감당이 되질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뉴스에서 백화점이 명품 세일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다. 그녀는 즉시 유명 백화점의 세일 일정을 확인했다.
예정된 세일 당일, 그녀는 큰 맘을 먹고 아침 일찍 명동의 유명 백화점으로 향했다. 그녀에게는 명절 선물로 받은 백화점 상품권이 쥐어져 있었다. 백화점 입구는 아직 개점 시간 전이었음에도 아줌마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젊고 예쁜 백화점 여직원들이 커피를 따라 주며 추운 날씨에 줄을 선 고객들을 위로해 주었다. 10시 30분 정각, 문이 열리자마자 아줌마들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도 뛰기 시작했다. 아니 밀려서 뛰어들어 갔다(거기서 지체하다가는 밟혀 죽을 것 같았다!). 일단 아줌마들이 에스컬레이터를 뛰어서 올라가는 사이 그녀는 다른 무리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한 노인분이 계셨는데 밀려 들어 오는 아줌마들 때문에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의 구석으로 밀린 노인이 소리를 질렀다 “식전부터 웬 여편네들이!” 아줌마들은 그 소리를 듣고 깔깔 웃으면서 그 어른의 등을 밀어서 엘리베이터에서 탈출하도록 배려(?)했다. 그녀는 한국인에게 제일 인기 있다는 명품 코너에 가서 줄을 섰다. 그동안 눈여겨 보던 제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의 한 시간을 기다린 끝에 자신의 차례가 돌아왔다. 그녀가 매장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갑자기 뒤에서 정체불명의 손이 그녀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그녀가 끌려 나오는 사이 다른 여인들이 들어가 버렸다.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었으나 항의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현장은 시골 장터만도 못 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다시 긴 줄을 서려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마음 먹었던 것을 포기해 버렸다. 백화점을 나와 명동 거리를 거닐면서 떡볶이와 김밥을 사 먹었다.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그녀는 자신이 중년으로 그리고 노인으로 남은 삶을 보내야 하는 한국이라는 사회에 어떻게 적응하면서 아니, 타협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최고의 엘리트 여검사까지 ‘샤넬백 사야 하니 돈 부쳐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닌가? 그러나 그녀는 가족의 생활비와 자식들 학자금 그리고 엄청난 가계 빚에 시달리는 남편을 보면 명품 가방을 사달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3년 전 가진 것 하나 없어도 ‘샤테크’ 운운하며 기백 하나로 버티던 남편은 의기소침해 있다.
그녀는 집 근처 전철역에서 내렸다. 그녀는 아침에 방문했던 백화점과 같은 계열사의 대형 마트로 발길을 옮겼다. 그곳에서 남편이 즐기는 횟감과 채소, 그리고 과일을 실컷 샀다. 결제는 백화점 상품권으로 대신했다. 퇴근한 남편이 푸짐한 저녁 식탁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다 뭐야?” 그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프라다를 포기했더니 우리 모두가 행복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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