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를 못하면 정상참작을 받기가 힘든 게 현실이다. 돈 없고 도와줄 사람 없는 피고인은 막막하기만 하다. 남은 건 재판장의 온정이다. 그러나 그것도 불가능한 세상이 다가온다. 대법원 양형위원회에서 제시하는 기준을 일선 법관들이 모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기준에 따라 규격화된 형량이 대량생산제품처럼 전국의 법원에서 쏟아지고 있다. 똑같은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그걸 범한 인간은 천차만별이다. 한데 양형기준을 정한다는 것은 모든 범죄를 유형화해서 구체적인 인간을 보려고 노력하는 휴머니즘 판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극소수 판사의 일탈을 방지하기 위해 사법부 전체에 족쇄를 채우려고 하면 안 된다.
당신은 어떤 범죄유형이니까 몇 년, 그런 식으로 결정만 하는 판사는 좋은 법관이 아니다. 양형기준이 지배하면 변론도 무의미하다. 조건만 대입하면 바로 답이 나오기 때문이다. 정말 변론이 필요 없는 것일까?
주저 없이 잔인한 범행을 해치우는 살인마와 마지막까지 주저하다가 어쩔 수 없이 일을 저지르는 사건 사이는 엄청난 간격이 있다. 사정도 구구각색이다.
변호란 그런 사건의 질 차이를 섬세하게 판사에게 알리고 납득시키는 작업이다. 양형기준이 극에 달하면 조건을 제시하는 검찰의 기록과 증거만 필요할 수도 있다. 검찰이 조건을 입력하면 컴퓨터 같이 형량계산만 하면 된다.
이런 양형기준통용의 배경에는 여론에 떠밀려 궁지로 몰리는 사법부의 입장이 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일방적인 대중적 선동에 좋은 판사들까지 죄인이 되어 작량감경권까지 내놓아야 할 위기에 처해 있다.
판사들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 국민이 요구하는 건 기계화된 판사가 아니다. 소수자와 약자의 영혼까지 들여다보고 현명한 판결을 해 주는 법관이다. 법관 앞에서 “존경하는”이란 말로 시작하는 것은 그런 절실한 소망의 표현이다.
빼앗겨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분별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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