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면서 크고 작은 오해 한번 받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맘은 그렇지 않은데 피상적으로 드러나는 행동의 단면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못 읽혀지는 경우가 많다. 대개의 경우 ‘나쁜 의도 + 좋은 해석’보다는 ‘좋은 의도 + 나쁜 해석’의 조합이 더 빈번하게 일어나는데, 심리학에서는, 이를 상대방의 행동을 좋은 쪽으로 선해(善解)하여 안심하기보다는 나에게 불리하도록 나쁘게 해석하여 미리 대비하는 것이 진화론적으로 더 적응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번 주 들어서 내가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나의 행동 때문에 나도 모르게 받고 있었던 오해 두 가지를 알게 되었다.
그 첫째는 내가 공식적으로 표현한 생각들과 관계된 것이었다. 칼럼을 쓰거나 기사에 쓰일 한마디를 요청 받는 경우 대부분 어떤 문제점에 대해 비판적인 측면을 부각시켜달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본의와 다르게(?), 혹은 본의보다 과장되게(?) 주저리 주저리 말을 늘어놓기 십상이다. 그렇게 무심하게 여러 차례 의견이 표현되다보니 부정적인 사람으로 비쳤을지도 모르겠다.
“노변은 법원에 불만이 많은 사람인 것 같아.” 평소에 중립적이고 올곧은 판단력으로 존경해마지 않던 어떤 선배 법조인께 들은 이야기였다. 커다란 쇠망치에 머리를 얻어맞은 양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잠자고 화장실 가는 시간을 빼고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공부에 쏟으며 때때로 나약해지려는 자신을 추슬러가면서 열심히 인생을 살아, 어느덧 사회에서 존경받는 법조인으로 서게 된 판사님들을 나는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왔고 그들의 해박한 지식과 깊은 성실성에 감탄하면서 늘 부러워해 왔었다. 살인적인 업무량에 쫓겨 주말은 물론이고 때로는 공휴일과 명절까지도 밤늦도록 불을 밝히며 기록을 검토하고 연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연민의 정이 솟아오르기도 하였고, 겉으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어렵고 복잡한 법리와 소송법적 체계로 인하여 당사자들이 오해를 할 때 최선을 다해서 친절히 설명하고 이해시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가 부끄럽게 여겨지기도 하였었다.
그런데 아마도 그렇게 내가 속으로 가지고 있던 생각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그동안 내가 신문 등 언론을 통해서 떠들어대고 투덜대면서 쏟아냈던 말들이 나를 그렇게 부정적이고 체제 비판적이고 불만만 많은 사람으로 인식되게 한 것 같았다.
두 번째는 첫 번째 것보다 훨씬 심각하고 악취나는 오해이다. 연수원을 수료하고 계속해서 법인에서 근무하였던 나는 약 8개월 전에 조그마한 개인사무실을 열게 되었다. 개업한 지 얼마 안 되는 선배 변호사님이 각자의 이름으로 사무실을 같이 하자고 제안을 해왔다. 내 이름을 걸고 사무실을 운영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고, 연차가 좀 지나고 나니 의뢰인들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도 있던 터라, 니 사건 내 사건 딱히 구분 짓거나 니 의뢰인 내 의뢰인을 구별하기 보다는 상호 보완적으로 사무실을 운영하기로 하고 흔쾌히 승낙했다.
두 명의 변호사와 4명의 직원이 꾸려가는 작은 규모의 사무실이다 보니 주말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처리해야 할 사건 수가 상당했고,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많은 사건을 수행하면서 함께 의뢰인들을 만나고 긴급한 회의를 해야만 할 경우가 많았다.
특히 나는 집이 교대역 근처에 있었기에 수시로 사무실과 집을 오가며 일을 했었는데 외부활동을 많이 하고 저녁에는 의뢰인 등 사람 만나는 일을 주로 하는 편이어서 기록을 보거나 서면을 쓰는 등의 일은 주말이나 늦은 밤 혹은 새벽에 많이 하게 되었다. 꼼짝도 않고 미친 듯이 대여섯 시간씩 일을 하고 나면 새벽이 밝아오는 소리를 들으며 하나의 일을 무사히 끝냈다는 안도감에 파일을 전송하고 문자 등으로 이를 알리기도 했었다.
그런데 아마도 이러한 과정에서 불필요한 오해가 쌓였던 것 같다. 지난 월요일 갑자기 같이 사무실을 운영하는 선배 변호사의 부인이 남동생과 함께 우리 집 초인종을 눌렀다. 혼자 저녁을 먹으면서 기록과 씨름하고 있다가 난데없는 방문을 받은 나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도 하기 전에 그녀의 일방적인 원망과 변소(辯訴)를 들을 수밖에 없었고 10여분 되는 짧은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할 수조차 없을 만큼 불쾌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며칠이 지난 지금은 오히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겠구나’ 웃으며 그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 내가 아무 생각없이 한 자잘한 행동들이 쌓여서 불필요한 오해의 벽을 쌓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다. 오해란 정말 안타깝고 속상한 것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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