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변호사 8단’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보통의 변호사들은 기존의 법리를 찾아 논리를 엮기도 힘들어 하는데 그 고수는 기발한 법리를 그때그때 창조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같은 직업사람들이 인정하는 걸 보면 그는 마스터가 틀림없었다.
돌아가신 변호사 선배 중에도 고수들이 더러 있었다. 故 김정규 변호사가 그런 분이었다. 완성에 가까운 인품은 물론이고 그가 쓴 몇 줄의 준비서면 내용은 항상 그대로 판결문이 되어 나왔다.
소문에 들은 ‘변호사 8단’은 또 신체적 장애를 극복한 인간승리자라는 소리도 들었다. 2012년 1월 26일 오후 3시경 남대문 부근의 대우재단빌딩으로 들어섰다. 주인공인 송영욱 변호사의 사무실이 거기 있었다. 법조인 명부에 나와 있는 그의 약력을 찾아보았다. 아주 간단했다. 1937년생으로 나이 칠십대 중반인 그는 1963년부터 지금까지 거의 50년간 변호사 외길 인생을 걷고 있었다. 그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소박한 방이었다. 책상 뒤에 꼿꼿한 자세로 앉은 그가 나를 맞이하며 말했다.
“제가 몸이 불편한 사람입니다.”
자리에 앉아 있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하는 것이다. 그의 옆에는 오래된 손때 묻은 목발이 보였다. 책상 앞 의자에 앉으면서 물었다.
“원래 다리를 쓰지 못하셨습니까?”
“나서부터는 아니고 서울법대 3학년 시절 갑자기 열이 나면서 원인도 모르게 양다리가 마비된 겁니다. 희귀병에 걸린 거죠. 그때부터 걷지 못하는 인생이 됐습니다. 지금은 다리 양쪽에 보조기를 사용해서 일어설 수는 있습니다.”
그가 느꼈을 좌절이 가슴 찡하게 공감이 됐다. 얼핏 내가 본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고시공부를 하던 주인공에게 루게릭병이 찾아들었다. 몸이 점차 돌같이 굳어갔다.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이 사법연수원생이 되어 그를 위로하러 온다. 그는 꿈을 버리지 않고 병실 창가에 법서를 가득 쌓아놓고 읽었다. 그러나 몸이 점점 마비되고 마지막에는 뺨에 앉은 파리 한 마리를 쫓을 수 없었다. 그의 눈에서는 하얀 절망의 눈물이 흐른다. 그리고 그는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저세상으로 간다. 어쩌면 비슷한 마음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송영욱 변호사는 희귀병을 극복한 현실의 인물이었다.
“그 당시 절망이 크셨겠네요.”
“공황상태에 빠진 적이 있죠. 몸이 불편해지니까 사귀던 여자가 떠나갈 때 슬프더라고요. 움직이면 다칠 우려가 있으니까 바깥세상으로도 못나갔죠. 나가기가 무서워지기도 하고요. 정신적으로도 심한 우울증을 겪었습니다. 혼자 클래식을 많이 들었어요.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서 영혼의 위로를 많이 받았죠.”
그는 병실에서 공부해서 1961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당시 고시란 극소수의 선택된 사람만이 통과하는 바늘구멍 같은 등용문이었다. 힘든 만큼 사회적 존경을 받고 법관자리가 보장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장애인의 차별을 실감한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다리를 못 쓰니까 법관지망에서 탈락이 되더라고요. 저보다 아버님의 좌절이 더 가슴 아팠죠. 저는 의사인 아버님의 외아들이었어요. 대학에 다니던 아들이 어느 날 희귀병에 걸려 주저앉은 걸 보고 자신이 얼마나 원망스러우셨겠어요? 그런 아들이 고시에 합격해 정말 기뻐하셨었는데 장애인이라고 임관에서 탈락하는 걸 보고 참담해 하셨죠. 그때 제가 오히려 아버지를 위로하던 게 기억이 나요. 판검사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것도 법학을 공부하는 한 과정이니까 염려하지 마시라고요.”
그렇게 그는 장애를 가진 변호사로 사회로 나왔다.
“어떻게 변호사 일을 하셨습니까?”
변호사도 몸이 불편하면 하기가 힘들다.
“법원이 서소문에 있을 때는 저같이 몸이 불편한 사람은 접근하기가 불가능한 구조였었죠. 저를 보조해 주는 사람을 두고 그 사람 도움을 받아 법정을 다녔습니다. 2층이고 3층이고 보조인이 저를 업고 다녔죠. 옛날에는 현장검증이나 감정이 많았어요. 그때마다 업혀 다니면서 변호사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내가 몸이 불편해지니까 세상이 보이더라고요. 길거리나 건물에서 장애가 있는 사람이 드나들기 쉽도록 턱을 없애는 운동을 하기 시작했죠.”
그는 자연스럽게 장애인들의 인권운동을 병행하게 된다. 그런 그에게 천사 두 명이 친구의 모습으로 다가간 것 같다. 대학동기인 심훈종, 석진강 변호사가 그와 함께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한다. 그가 계속했다.
“친구 두 명과 함께 합동법률사무소를 30년 동안 해 왔습니다. 그 긴 세월 동안 우리는 완전 풀제로 사무실을 유지해 왔습니다. 모든 수입을 철저히 평등하게 배분한 거죠.”
사람마다 사건이 들어오는 게 들쑥날쑥하고 돈복도 다르다. 30년간 수익을 평등하게 분배했다는 사실은 변호사업계의 기적 같은 일이다. 동료였던 심훈종 변호사는 그 세월 송영욱 변호사를 믿고 경리장부 한번 들춰본 적이 없다고 했다.
“힘들었던 그 시절 어떻게 극복했는지 말씀해 주시죠.”
“저도 몸 건강하게 대학에 다닐 때는 출세욕도 있었죠. 그러다 불행이 온 겁니다. 어떤 고난이 왔을 때 그걸 거부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집착하고 매달린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좌절하지 말고 대안을 찾아 거기에 충실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제 경우는 변호사를 하면서 기업체 일 쪽으로 눈을 돌렸죠. 은행 일을 많이 했어요. 은행 관리부에서 송사(訟事)를 맡았죠. 은행원끼리 자기네 부서는 뒷설거지를 해 준다고 걸레부라고 말하기도 했죠. 의사사회에서 예방의학이 있는 것처럼 법학에서도 분쟁을 예방하고 싸움을 하지 않게 하는 일이 더 중요해요. 저는 거기에 착안한 겁니다. 요즈음 젊은 변호사들이 취업도 어렵고 혼란스런 상황으로 아는데 생각을 돌려야 합니다. 송무(訟務)가 아니더라도 일거리가 많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다만 한가지 덧붙일 건 이제 변호사가 모든 분야를 포괄해서 처리할 수는 없습니다.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 거죠. ‘마스터’가 되어 일할 때 연구하는 자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외국어도 하나쯤 정통하고 말입니다.”
동료들이 그를 ‘변호사 8단’이라고 했다. 50년 세월의 변호사의 비결을 알아볼 차례라는 생각이 들어 물었다. 문득 그의 복장과 사무실이 초라함이 느껴질 만큼 소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형로펌의 경우 입구 인테리어나 콘퍼런스룸 등이 화려한 게 일반적인 추세였다. 또 근무하는 중견변호사들을 보면 최고급명품 양복이나 시계 그리고 액세서리를 착용하기도 했다. 클라이언트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문득 그가 입고 있는 오래된 듯한 감색 양복에 눈길이 갔다.
“입고 계신 양복은 어떤 겁니까?”
내가 물었다. 그의 사무실과 입고 있는 옷 그리고 가구들은 모두 세월의 이끼를 뒤집어쓴 듯 가라앉아 있었다.
“16년 전에 산 표준사이즈의 기성복이죠.”
“요즈음 중견변호사들 중에는 명품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은데 어떻게 보십니까?”
“저는 변호사란 부자 손님을 맞아 화려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직업이 아니라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맞는 지식과 예절 교양을 갖추고 있으면 상담을 할 때 인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겁니다.”
“좋은 변호사가 될 수 있는 비결을 알려주시죠.”
“사건에 미친다는 생각으로 몰입해야 할 겁니다. 학자가 아니라 체계적으로 공부를 하지 못하더라도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그때마다라도 열심히 공부하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요즈음 보면 전문화한다고 로펌에서 일부 분야만 취급하는 변호사들이 있는데 너무 그렇게 기형화되는 건 안좋습니다. 왜 의사들도 너무 세분화돼서 자기 일 이외에는 전혀 모르는 경우가 많죠. 그렇게 돼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근본에 충실해야죠.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법률상 추인(追認)을 하나 다루더라도 무효행위의 추인 무권대리의 추인 등 그에 관련된 모든 법리가 항상 유기적으로 머릿속에서 활동해야 하는 겁니다.”
왜 그를 동료변호사들이 변호사 8단이라고 하는지를 알 것 같았다. 법학과 실무에 관한 그의 내공이 만만치 않은 게 느껴졌다. 그가 덧붙였다.
“그리고 말이죠, 어떤 경우에도 ‘착수금 변호사’가 돼서는 안 됩니다. 처음에 돈 받을 때까지만 친절하고 그 뒤로는 불성실한 변호사를 말하는 거죠. 변호사는 돈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법이라는 좋은 지식을 도구로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론 살아가는 데 돈이 필요하죠. 그렇지만 돈이 사람을 따라줘야지 내가 따라가면 안 됩니다. 제 경우는 필요하면 돈이 생기는 것 같았습니다. 먹고 살고 자식 키우면 되지 집이 궁전 같을 필요가 없는 거죠.”
그가 말을 잠시 끊었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사건이 올 때마다 먼저 질이 좋은 것인지 아닌지를 감별했습니다. 도덕적으로 판단해서 이건 아니다 하는 게 질 나쁜 사건이죠. 보면 압니다. 사기 쳐서 재판 이겨 달라고 하는 부탁은 거절해야 합니다. 무죄가 아닌데 무죄를 만들어줘서는 안 되죠. 변호사는 고용된 총잡이라고도 하는데 그렇다고 나쁜 짓을 도와줘서는 안 됩니다. 같이 사기꾼이 되는 거죠. 그걸 알면 당장 사임해야죠. 하지 말아야 할 사건은 안 해야 합니다. 죄가 있는 사람을 억지로 무죄로 만드는 건 변호사윤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합니다. 변호사가 진범인 걸 알면서도 엉뚱한 변론을 했을 때는 범인은닉죄라고 생각합니다.”
변호사보다 더 큰 그의 사회활동을 물어볼 때가 됐다. 그는 ‘장애가 장애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활동해 왔다. 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조화로운 공존으로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는 세상’이 그가 추구하는 사회운동의 목표였다.
“평생 몸이 불편하게 사시면서 여러 운동을 해 오셨는데 그에 대한 소회는 어떠십니까?”
“장애라는 개념자체도 이제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과연 뭐가 장애냐는 거죠. 국제기구에서는 사회참여나 활동에 제한을 받느냐에 따라 그걸 따지기도 합니다. 사회적 환경을 개선해주고 취업 등을 통해 세상에 참여시킬 수 있다면 장애가 극복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차별받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장애가 있다 보니 그들의 삶은 빈곤 그 자체입니다. 공부할 기회도 없죠. 법은 화려하게 마련되어 있습니다. 차별금지법도 있고 장애인권리협약도 있어요. 그렇지만 사람들에게 실제로 인식되어 있지 못하고 장애인 자신들도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직접 체험한 아픔에서 나온 철학이었다. 그가 계속했다.
“장애인을 따로 교육을 시키고 있는데 일반인들과 함께 교육도 시키고 살아나가게 해야 합니다. 그들을 도와주면서 일반학교에 다니게 해야 합니다. 그게 ‘함께하는 사회’죠.”
“장애인을 위해 어떤 활동을 해 오셨습니까?”
“젊은 장애인들이 자연스럽게 제 주위에 모이게 됐습니다. 저는 장애인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지 않으면 근본적인 개선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장애인 쪽의 어려움을 써주는 신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장애인복지신문을 만들었습니다. 1989년경 변호사해서 번 돈 중 몇 억을 신문 만드는 데 썼죠.”
그가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 무렵 서울의 아파트 몇 채에 해당하는 돈을 사회를 위해 기부한 것이다.
“나이가 칠십대 중반이신데 남은 시간동안 하시고 싶은 일이 있다면 뭘까요?”
“지금도 몇몇 장애인단체를 이끌어 가고 있어요. 죽을 때까지 그 일을 하는 거죠. 그 사이사이에 시간이 있으면 책을 보고 글을 쓰고 좋아하는 음악도 듣고 싶어요.”
절망을 극복하고 업혀 다니는 변호사를 하면서 칠십오년의 인생을 그는 아름답게 산 사람이 틀림없었다. 변호사 8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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