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로 인간본성 탐구하는 다재다능 변호사

윤상일 변호사는 서울지방변호사회장에 두 번 입후보했다. 모자라서 떨어진 게 아니라 너무 많은 걸 가지고 있어서 선택받지 못한 인물이다. 명문 경기고와 서울법대 졸업에 최연소 사법시험 합격, 로펌 김앤장 근무, 검사 경력까지 갖추고 있다.
그것도 화려한데 다른 재능도 넘치게 가지고 있다. 문재(文才)로 여러 권의 소설을 발표했다. 골프, 마작, 바둑, 당구가 프로급인데, 대학 때는 테니스부 주장까지 지냈다.
케임브리지 유학시절엔 유학생 부인들을 모아놓고 요리강습을 했고, 하모니카 연주도 일류급이고, 그 나이에 스키와 보드를 탄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는 세련된 엘리트의 모습이 전혀 아니다. 반들거리는 행동이나 위장된 겸손도 찾아볼 수 없다. 내용물은 화려한데 포장은 아주 허술해 보이는 인간이다. 전철로 출퇴근을 하고, 꼭 필요할 때 몰고 나오는 애마는 금방이라도 주저 앉을 것 같은 20년 된 소나타다.
그를 오랫동안 관찰해 왔다. 그의 옛 사무실을 여러 번 찾아간 적이 있었다. 태릉입구 역 북부지법 앞 중국집 등 온갖 허접한 업소와 사무실이 들어차 있는 낡은 건물 구석에 지독하게 초라해 보이는 사무실이었다. 1960년대 동네 다방에서나 볼 수 있었던 싸구려 비닐 소파가 놓여있던, 한마디로 지방도시 부동산 중개소보다 훨씬 못했다. 흰 페인트가 누렇게 변한 벽에는 그가 구상중인 소설의 스토리가 챕터별로 붙어 있곤 했다. 변호사의 방이 아니라 가난한 작가의 골방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지금 서초동의 작은 로펌의 대표로 있으면서 문가에 위치한 어항통 같은 작은 방을 쓰고 있다. 2012년 1월 26일 교대역 부근 식당에서 그를 만났다.
“최연소 사법시험 합격자로서 꿈이 뭐였죠?”
그 시절 대부분은 대법관이나 장관이 되고 싶어했지만 그는 의외로 변호사를 선택했다.
“연수원 입소식 때 단상 위에 앉아 있는 법원이나 검찰 원로들의 얼굴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한 분야에서 30~40년을 일하고 그 정도 지위에 올랐으면 도가 통한 신선같은 인상일 것 같았는데 정반대였죠. 한결같이 험악하고 탐욕스런 얼굴이었어요. 입도 비뚤어진 것 같고 전혀 행복한 표정이 아니었죠. 그게 삼, 사십년 후의 내 모습이라고 생각하니까 끔찍했죠.”
나도 비슷한 걸 느낀 적이 많았다. 법조계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얼굴이 왜 그렇게 됐을까.
“그 분들이 오로지 법만 공부했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정신적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하지 못한 거죠. 그래서 ‘법서 한권을 읽을 때 다른 분야 책 열배는 읽자’고 각오했었습니다. 그게 인간으로 성숙한 법조인이 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로펌 김앤장에 먼저 들어갔다가 나중에 검사가 된 경력이 이채로웠다.
“김앤장에서의 일은 투자관계나 계약서를 검토하고 법률의견을 내는 등 거의 페이퍼 워크였죠. 변호사라고 하면 법정에 나가 무죄주장도 하고 약자를 위해 일한다는 자부심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었어요. 그만두고 막상 변호사 개업을 하려고 하니까 자신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검사임용 신청을 하고 발령을 받았습니다.”
“검사 직무는 어땠습니까?”
“형사부 검사로 있으면서 경찰 수사기록에 의존하지 않고 가급적 당사자들을 불러서 억울한 얘기들을 다 들어주곤 했습니다. 나름 보람이 있었어요.”
검사 생활도 길지 않았다. 검사동일체의 원칙, 상명하복의 관계여서 방침이 정해지면 소신대로 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았다. 또 죄를 미워하고 엄정한 법집행을 해야 하는 검찰 성향과 반대로 사람들의 억울한 걸 변호해주는 일이 더 맞는다는 걸 깨달았다.
번잡한 곳이 싫어서 시골 같은 소박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북부지법 앞에 법률사무소를 차렸다.
“제가 깨달은 건 학력의 고하를 막론하고 의뢰인들의 법의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들 판검사와 통하는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죠. 로비나 뇌물로 일을 처리하려고 들지 정식 법절차는 의식에 없는 것 같았어요. 제가 아무리 설명해도 믿지를 않아요. 우리 사회 전부가 솔직히 법의 지배라는 관념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도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누구라도 법망에 걸리면 재판장과 친한 변호사를 찾아 로비를 부탁한다. 그걸 거절하면 한심한 변호사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의 그런 의식을 바꿀 방법을 고민하다가 법조계의 현실을 소설로 쓰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첫 소설 ‘하얀 나라 까만 나라’는 그렇게 태어났다. 법조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고 애쓴 작품이다.
“소설이 하루아침에 써지는 건 아닐텐데 수련과정을 말씀해 주시죠.”
“틈나는 대로 독서했습니다. 잘 쓰고 못쓰고는 부단한 연습과 타고난 글재주가 어느 정도 작용하겠지만 좋은 글은 결국 독서량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직접이든 간접이든 작가의 체험이 바탕이 된 소설이 감동을 주는 거죠. 법과 문학은 소재가 기본적으로 동일합니다. 법은 문제를 제도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 방식인 반면 문학은 인간의 갈등을 내면까지 들여다 보고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이죠. 법과 문학 다 좋은 세상을 만들자는 겁니다.”
순수 문학을 전공한 소설가가 특정 전문 분야를 소재로 작품을 쓰기도 하는데 그 분야를 제대로 모르고 쓰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전공을 안 했다고 용서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변호사 체험으로 쓴 첫 소설에 대한 반응은 어땠죠?”
“언론은 마치 저를 내부고발자인 것처럼 취급해서 대서특필했습니다. 된통 얻어맞았습니다. 대법원에서 연구관을 통해 내가 무슨 의도로 그 책을 썼는지 알아보더라고요. 사실 저는 법조의 현실을 알리고 어떻게 고쳐가면 되는가의 문제를 제시한 건데. 법조선배들한테서 ‘너 빨리 책을 수거하지 않으면 다친다’라는 말을 들었죠. 대법원 쪽에서도 책을 수거하는 게 좋겠다고 말을 전하더라고요.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거든요. 변호사를 더 이상 하기 힘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법조계는 그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그 후에 다시 ‘강변호사 이야기’라는 소설을 썼는데 그건 어떤 내용이었죠?”
“검찰의 강압수사로 피해를 입은 사람의 아들이 검사에게 보복을 하는 스토리였죠. 검사들은 수사할 때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일도 수사를 받는 사람들에게는 상처가 클 수도 있습니다. 검사의 강압수사로 피의자나 그 가족들이 느끼는 정신적 고통을 문학작품으로 발표한 겁니다.”
“법조에 대한 소재로만 소설을 썼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가 애가 셋이고, 교육에 관심이 있었어요. 1996년부터 학부모가 학교운영에 참여할 수 있게 돼 학교운영위원회 위원장에 당선됐습니다. 학교 안을 들여다보니 예산과 교재선택을 교장과 몇몇 교사들이 밀실에서 독단적으로 결정을 하는 겁니다. 엄마들만 모인 학부모회나 어머니회는 들러리 역할이었죠. 한데 자기 자식이 혹시 홀대받을까봐 엄마들이 끽소리도 못내는 겁니다. 제가 따지고 들었습니다. 여러 비리가 보이더라고요. 전표까지 하나하나 확인해 봤죠. 그리고 교육청에 교장을 바꾸어 달라고 끈질기게 요청했습니다. 새로 온 교장도 마찬가지더군요. 또 바꾸어 달라고 교육청에 민원서류를 넣었습니다. 그랬더니 상대방 측에서는 괴물 같은 변호사가 나타나 학교를 망친다고 모략하더라고요. 저 때문에 수업이 제대로 안 된다고 엄마들을 선동했습니다. 엄마들은 자기애에게 피해가 올까봐 모두 교장 편에 섰습니다. 제가 학교와 학부모 양측에서 따돌림을 받은 거죠. 그렇지만 학교사회에도 진정한 교육자가 많이 있더라고요. 그 교사들은 내가 내 아이만 잘 봐달라고 감투를 쓴 게 아니라는 걸 알더군요. 그분들과 의기 투합해서 싸움을 했습니다. 예산부터 교재, 그리고 방과후 활동을 하나씩 바꾸어갔죠. 혼자선 안 되지만 힘을 합치니까 조금씩 됐습니다. 강남의 노른자위에 있는 학교인데 1년에 교장을 한 사람씩 갈아치우다가 마지막에는 변두리에서 갈 곳 없어 하는 선생을 교장으로 모셔왔는데 그 분이야말로 참 교육자였습니다. 그 과정을 소설로 쓴 게 ‘아직 오지 않은 날’이라는 작품이었습니다.”
본인의 정체성에 대해 물어봤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어느 게 주업입니까? 변호사입니까, 소설가입니까?”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삶은 죽을 때까지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빅토르 위고가 ‘우리 생애 최고의 날은 아직 오지 않은 날’이라고 했는데 이 말을 무척 좋아합니다. 변호사도 열심히 하고, 소설도 열정을 기울여 쓰고 싶습니다. 이해관계가 걸린 법정은 인간의 본성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인간 본성을 탐구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그는 일반 법조인과는 다른 눈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최근 사법부의 추락에 대한 의견을 묻고 싶었다.
“부러진 화살이라는 영화가 사법부를 비난하고, 곽노현 교육감에게 벌금형이 선고되자 사람들이 판사집에 몰려가 계란을 던졌습니다. 대법원이 법치주의의 위기라면서 이례적으로 성명을 발표했는데 사법계의 현실을 어떻게 보십니까?”
“전관예우를 받는 변호사나 대형로펌이 맡은 재벌들에 대한 판결이 상식과 배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걸 본 국민이 어떻게 사법부를 신뢰하겠습니까? 상식을 벗어난 튀는 판결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법관의 소신도 상식에 부합하는 것이라야 하는데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사견을 법관의 양심이라고 강변하는 거죠. 변호사 선배들조차 이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법원의 판결 때문에 사건을 맡기가 겁이 난다고 하고 있습니다. 법과 판례만 알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거리낄 게 없다고 자만하는데 그런 판사들은 반쪽자리 지식인입니다. 저는 지금의 사태를 필연적이라고 봅니다. 스스로 자정능력이 없으면서 불신을 받으면 도태되기 마련입니다. 사회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인 사법부가 달라져야 합니다.”
그는 어떤 방법을 생각하고 있을까.
“사법부가 국민과의 사이에 성을 너무 높이 쌓았습니다. 이제부터 특권의식을 버리고 보호막인 성곽도 허물고 국민과 함께 가야 합니다. 성을 쌓으면 보호는 될지 모르지만 성 밖이 안 보입니다. 그 담을 허물면 불안할지는 모르지만 전후좌우 세상이 더 잘 보이게 되죠.”
판사들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 함부로 만나지도 않고 판사실도 꽁꽁 걸어 잠그고 있다.
“경제 수치가 높다고 나라가 발전하는 건 아닙니다. 저는 법치만 잘되면 지금보다 10% 이상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습니다. 법조인의 역할입니다. 우선 자기가 맡은 사건부터 최선을 다하는 거죠. 그 과정에서 바른 법적절차와 정의가 뭐라는 걸 국민들에게 인식시켜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정상적인 법적절차에 따라 작동된다는 확신을 갖게 될 때까지. 법을 악용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법조인 자격이 없는 겁니다.”
그의 날카로운 눈길이 법조계를 전방위적으로 감시하고 있다. 변호사협회에 대해서도 한 마디했다.
“시드니 셀던이 쓴 ‘천사의 분노’를 사법연수원 때 읽었습니다. 젊은 여성변호사가 먹고살기 위해 약간의 불법을 합니다. 징계위원이 그걸 조사하러 가면서 소설이 시작됩니다. 그걸 읽으면서 미국변호사협회는 이런 기능을 하는 단체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뭡니까? 형을 받아도, 추한 짓을 해도 아무 제한 없이 변호사로 받아줍니다. 변협에 자정능력이 없다는 얘기죠. 법조계가 바로 서려면 비리와 불법에 대해 엄격해야 합니다.”
소설을 쓰거나 변호사 일 말고는 뭘 할까.
“책만 본다고 좋은 글이 나오는 건 아니죠. 사색을 해야죠. 제 경우는 땅을 파고 채소를 기르는 게 적성에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20년 동안 농사를 지었습니다. 골프를 안 쳐도 그걸로 충분한 운동이 됐습니다. 땅이 가르쳐 주는 게 있더군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생명은 소중하고 귀하다는 걸요. 그걸 아니까 길거리에 파나 채소가 떨어져 있는 걸 보면 참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정도 그의 생각을 알았고, 이제는 좀 더 포장지를 뜯고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경북 예천군 용궁면 산골의 농사꾼 아들이지만 작은 농토마저 부친이 타짜에게 걸려서 날려버리는 바람에 서울로 야반도주하다시피 고향을 떠났습니다. 아버지가 막노동도 하시고 택시기사도 하고 그랬죠.”
화려한 그의 경력과 어울리지 않는 전혀 뜻밖의 얘기를 거침없이 내뱉었다. “선린중학교에 들어간 후 대학졸업 때까지 줄곧 장학금으로 공부했어요. 부친의 수입이 일정치 않아 대학 때부터 과외를 해서 두 여동생 학비와 집안 생활비를 책임졌습니다.”
나머지 인생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물어보았다.
“외곬인 삶보다는 여전히 다양한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제가 해야 할 것들도 즐거운 마음으로 하려고 합니다. 요즘 매주 한번씩 가락시장에 들러 장봐다가 요리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영화도 좋아하고 드라마도 웬만한 건 다 봅니다.”
그가 싱글싱글 웃는데 그의 얼굴이 갑자기 불화(佛畵)에 나오는 푸근한 보살 같았다. 연수원 시절 법조원로들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자신은 그런 얼굴이 되지 않겠다던 그의 소원이 거의 이루어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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