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든 노숙자든 진정한 인간으로 대해야”

교대역 벽에는 대형광고판들이 걸려있다. 젊고 예쁜 모델 중에 인자한 할아버지 한 명이 빙긋이 미소 짓고 있다. 보기만 해도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푸근한 인상이다. 그가 국선변호의 아이콘으로 등장한 칠십 대의 심훈종 변호사다.
그는 법관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리고 합동법률사무소를 차려 30년간 능력에 따라 벌더라도 분배에는 완전한 평등원칙을 고수한 독특한 인물이다. 작은 이익으로도 치열한 다툼을 하는 이기주의 사회에서 보기 힘든 일이다. 그는 인생 제3막을 국선변호사로 지망해서 함께 사는 세상, 가진 것을 나누는 사회를 만드는 데 앞장섰다. 그는 법뿐만 아니라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소유하고 있다. 부장판사 시절 한 대뿐인 선풍기가 불편하다고 생각하자 회전 각도를 180도로 만드는 기술을 고안해서 특허를 받기도 했다. 손해배상청구소송이 법원에 겹겹이 쌓일 때 호프만식 계산표를 만들어 재판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2012년 1월 12일 오후 3시 반경 서초역 부근 그의 사무실로 갔다. 국선전담을 하는 변호사들의 공동사무실이다. 대부분의 변호사들이 법정에 간 듯 사무실이 텅텅 비고 입구의 여직원만 한가한 모습으로 지키고 있었다. 인터뷰하느라고 여러 사무실들을 다녀보았다. 대형로펌들은 늘씬한 여성들이 미소를 지으면서 찾아온 사람들을 화려한 콘퍼런스 룸으로 안내했다. 국선전담 사무실은 경제적 사정 때문에 아무래도 달랐다. 책상 하나 들어가는 작은 변호사의 방들이 연결되어 있고 그들을 보조하는 직원들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심 변호사는 아직 법정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입구의 대기실은 기역자 모양의 비닐 의자가 놓여있는 작은 유리방이었다. 방이라기보다는 대형 유리통을 연상하게 했다.
오십 대의 여자가 주눅이 든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 옆에 앉아서 심 변호사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곳을 찾아오는 의뢰인 대부분은 마음이 꽁꽁 얼어붙은 사람일 것이다. 그들이 돈을 내지 못하더라도 따뜻한 미소나 차 한잔이라도 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법정에서 돌아온 심 변호사와 그의 방에서 마주앉았다. 작은 방에 꽉 차는 책상 앞에 놓인 의자가 유일한 공간이었다. 국선변호사의 상징이 된 그의 모습을 먼저 알고 싶었다.
“닫혀있는 피고인들의 마음을 어떻게 열고 계십니까?”
내가 물었다. 대부분 사람들의 의식이 ‘싼 게 비지떡’이라고 국선변호제도에 대해 불신을 가지는 경우가 많았다.
“먼저 절대 친절해야 합니다. 내가 먼저 마음을 즐겁게 가지고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대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든지 다 들어주어야 합니다. 핵심을 얘기하지 않는다고 절대로 짜증을 내면 안 됩니다. 그래야 상대방이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엽니다.”
단순한 것 같지만 귀중한 진리다. 법조인들은 상대방이 요점을 말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요점을 파악하고 논리적으로 말하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그들은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중심을 잃은 상태다. 인내를 가지고 들어주어야 하는 게 변호사의 최고의 덕목이다. 그는 오랜 세월 법관으로도 지낸 사람이다.
“그러면 판사들은 피고인을 대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원로법조인인 그에게 법관의 윤리에 대해 물었다.
“피고인도 사람이고 감정의 동물입니다. 판사들이 성질을 내거나 신경질을 부리면 그들의 자존심을 다치게 되죠. 지금도 법정에 가보면 그런 판사들이 이따금 보입니다. 그런 태도로 사람을 대하면 판결을 해도 설득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판사들이 국민에게 신뢰를 받으려면 법률지식보다 평소의 언행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법조인의 행동과 인품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가 뭔가 떠오른 듯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요즈음 젊은 판사들이 인터넷에 함부로 글을 올리는 걸 보면 탐탁지 않아요. 제가 법관생활을 하다가 1977년 변호사 개업을 했으니까 변호사 생활만 해도 34년이 흘렀죠. 젊을 때는 저도 성질이 급했는데 나이를 먹어가니까 좀 누그러지더라고요. 요즈음 구치소에 가서 국선피고인을 만나면 고생 많이 한다면서 마음을 풀어주고 위로하는 일부터 먼저합니다. 인생을 너무 비관하지 말라고 하면서 이 얘기 저 얘기를 해요. 당장은 그 사람들이 내 말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언젠가 알 때가 올 걸 기대하면서 말이죠.”
그는 변호사이면서 사회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국선전담 변호사가 되실 생각을 했죠?”
모두 변호사사무실을 접고 은퇴할 60대 후반에 그는 국선변호사로서 새 출발을 한 셈이다. 은퇴하는 법조 선배들이 많았다. 평생 갈고 닦아온 그들의 지식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들 중에는 왕년의 명예나 자존심에 상처가 날까 두려워 귀중한 경험을 사장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제가 예순일곱 살 때 변호사 업에서 은퇴하려고 했어요. 후배변호사들이 막 쏟아져 나오는데 계속 법정을 드나든다는 게 좀 부담스럽더라고요. 그러다 다시 생각했죠. 인생 제3막을 봉사하는 생활로 지내보는 게 어떨까 하고요. 그래서 국선전담변호사에 지망했습니다. 처음 국선전담변호사를 하겠다고 지망했을 때만 해도 서울에서 네 명으로 시작한 거죠. 변호사들이 국선이라고 하면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전부 기피하려는 분위기였어요. 그렇지만 저는 이 국선변호에서 인생의 새로운 활기를 얻었습니다. 내 일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습니까? 건강에도 좋고 피고인에게도 좋은 거 아닌가요? 어느새 이 국선전담변호사 노릇을 한지도 7년이 흐르고 이제 계약의 마지막이 다가왔어요.”
70대 중반의 나이인데도 그의 눈빛은 형형했다. 그는 가장 낮은 자리로 무시되던 국선변호사제도를 이만큼 끌어올린 공로자가 됐다.
“국선변호사를 하면서 겪은 일들을 말씀해 주시죠.”
그의 추억 속에 여러 보물이 있을 것 같았다.
“처음 국선전담 변호사가 되어 구치소로 갔을 때 피고인들이 시큰둥한 태도로 대했어요. ‘도움도 안 되는데 왜 왔나?’ 하는 얼굴들이더라고요. 그럴 때 답답하고 정말 힘들었죠. 저는 꾹 참고 그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 애썼어요. 그러다 국선변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겐 특징이 있는 걸 발견했죠. 그들은 작은 친절에도 큰 감명을 받는다는 겁니다. 한번은 사형수가 교도소 안에서 다시 다른 사람을 때려 기소가 됐습니다. 사형수들이 삶에 대해 자포자기하는 사람들이니까 무슨 일은 못하겠습니까? 그 사람도 교도소 안에서 여러 번 문제를 일으켰죠. 국선변호인이 되어 찾아가 그의 말을 열심히 들어줬습니다. 나중에 법정에 가니까 재판장이 편지를 전해주더라고요. 그 사형수가 내 주소를 모르니까 법원에 편지를 보낸 거예요. 너무 친절하게 대해줘서 고맙다는 내용이었죠. 전과가 많은 사형수인 자기를 사람으로 대해줬다는 겁니다. 그들을 진정한 인간으로 봐야 합니다. 서로 소통이 되어야 이해하고 납득을 하는 겁니다. 가끔 노숙자 출신의 전과자들을 봅니다. 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대해야 합니다.”
그의 일관된 인간에 대한 행동은 일시에 생긴 단순한 게 아닐 것 같았다. 그를 통해 지금과는 다른 50년 이전의 판사생활을 들여다보고 싶어 물었다.
“지난 1960년대의 법관생활을 알고 싶습니다.”
“서울법대에 들어가 대학 3학년 때 사법고시에 합격했어요. 그리고 일찍 판사생활을 시작했죠. 1964년경 제주도에서 판사를 했었는데 당시만 해도 사건이 거의 없었어요. 제주도는 도둑도 없고 주민끼리 싸움도 없는 좋은 곳이었죠. 이따금 육지에서 온 관광객이 사고를 치는 정도라고 할까. 재판보다 오히려 신혼여행을 온 동료 판사들 뒷바라지가 더 많을 정도였어요. 굳이 재판에 올라온 사건의 기억을 떠올리면 밭에서 기르는 고구마 가지고 싸우는 정도라고 할까요. 그 후로 서울로 올라왔는데 판사를 하면서 열심히 일본어를 공부했습니다. 학원도 나가고 일본어로 된 삼국지도 읽었죠. 그때 미우라 아야코 여사가 쓴 소설 ‘빙점’부터 시작해서 문학작품들은 거의 다 읽은 것 같아요. 그 시절은 그랬습니다. 서울형사지법 부장이 되어 일할 때 배석판사로 온 분이 지금의 양승태 대법원장이죠. 그때부터 사람이 달랐죠. 겸손하고 논리가 정연하고 기록도 정확하게 보고 사건을 파악했어요. 우수한 품성이 눈에 당장 들어오더라고요. 부장인 저에 대한 태도도 겉으로만 아니라 마음속으로 받들어주는 걸 느꼈었습니다.”
“그러다 왜 법관을 그만뒀습니까?”
소수의 법관이던 당시 가만히 있어도 서열에 따라 법원장이나 대법관이 되는 게 어려웠던 시절은 아니었다.
“이거, 나온 이유도 다 말해야 합니까?”
그가 그렇게 말하면서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그가 얘기하기 시작했다.
“제가 1977년에 법원에서 사표를 쓰고 나왔는데 그때 서울법원에서 형사부장을 했었어요. 저한테 긴급조치위반 같은 시국사건이 많이 맡겨졌는데 그걸 재판하기 아주 괴로웠어요. 재판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묵비권으로 일관하는 경우도 흔했죠. 제가 당시 민청학련사건을 맡아 심리했는데 전부 입을 다물어 버리더라고요. 이런 사법부는 믿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피고인 한 사람 한 사람을 판사실로 불러서 얘기했습니다. 일본강점기 독립 운동가들도 일본법관 앞에서 말하면서 재판을 받았다고 말입니다. 당신들이 말하는 모든 걸 공판조서에 기록해 주고 필요하다면 속기도 해주겠다고 했죠. 그들의 요구대로 최후진술도 끝까지 다 들어주고 녹음까지 해 두어 자료로 남게 해 줬습니다. 남들은 제가 대법관까지 갈 거라고 모두 생각했는데 판사에 대해 회의가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사표를 내고 합동법률사무소를 차리게 됐습니다. 개인변호사만 있던 시절 로펌의 전 단계인 합동법률사무소도 제가 시조 중의 하나인 셈이죠.”
그는 양심을 가진 판사가 틀림없었다. 그 무렵 독재정권이 요구하는 판결을 해 주고 승승장구하던 법관들도 많았다.
“합동법률사무소는 어떻게 운영하셨습니까?”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초창기 공동사무실을 알고 싶었다.
“석진강 변호사, 송영욱 변호사와 함께 합동사무실을 30년 했습니다. 30년 동안 완전 공동관리제로 운영했죠. 수입을 완전히 똑같이 나누는 거죠. 구성원 세 사람 모두 단 한 번의 불평도, 이익분배를 놓고 싸움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모두 대단한 인격의 소유자임이 틀림없다.
“사람마다 돈복도 제각각이고 심지어 아들과도 돈을 가운데 놓으면 싸움이 일어나는 법인데 어떻게 그렇게 변호사끼리 평화롭게 지내면서 사무실을 운영할 수 있습니까?”
돈이 들어오지 않을 때도 문제지만 수입이 많을 때 분쟁의 요소가 더 많은 게 변호사들 사회이기도 하다.
“전 솔직히 30년 동안 경리 장부 한번 들여다보지 않았어요. 믿어야 합니다. 돈을 빼내 쓰려고 마음만 먹으면 교제를 해야 한다느니 등 별별 명분을 세울 수도 있는 거죠. 또 누구는 사건이 많았고 어떤 것은 내 사건이다라고 따져서도 안 됩니다. 양보하고 내어줄 수 있어야 공동체가 굴러가는 겁니다. 사무실을 키우려는 욕심도 내지 않았어요. 로펌들이 생기는 초창기에 사무실을 키울까 하는 제안도 있었죠. 그렇지만 하던 그대로 있던 그대로 남기로 결정했습니다.”
“변호사와 돈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의견을 말씀해 주시죠.”
“돈은 잡으려고 해도 절대 잡히지 않는 겁니다. 일을 열심히 하면 먹을 만큼 굴러 오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매일 만나는 사람들에게 친절해야 합니다. 그들이 당장 고객은 아니더라도 성실하고 친절하면 먼 훗날 고객이 됩니다. 인생을 길게 봐야죠.”
“앞으로 남은 인생계획은 어떠십니까?”
“국선전담변호사 생활도 어느새 7년이 흐르고 이제 그만둘 때가 됐어요. 형사사건만 하느라고 그동안 민사를 손을 놓았었는데 민사는 잠시만 중단해도 실력이 줄어들어요. 다시 공부해야겠어요.”
사회에서 그의 나이는 칠십 대 중반의 노인이더라도 그의 내면은 영원히 늙지 않는 젊은이가 틀림없었다. 왕성한 활력으로 일하는 사람은 늙어도 노인이 아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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