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한 양심, 봉사를 실천하는 변호사 지도자

변호사회 직원으로부터 향기 나는 얘기를 들었다. 이준범 회장이 임기동안 서울회 돈을 쓰지 않고 자기 돈을 몇 억 썼다는 것이다. 심지어 직원 야유회 때 제공한 유니폼 파카조차도 회장 개인 돈으로 구입했다고 했다. 깔끔한 양심이었다.
그는 회장으로 있으면서 기득권조차 포기했다. 규정을 고쳐 서울회 회장이 바로 대한변협 협회장이 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서울회 회장 시절 그는 개개인 변호사의 이름을 박은 수첩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반짝이는 작은 아이디어였다. 또 ‘정의의 붓으로 인권을 쓴다’는 모토를 설정해 변호사들이 가야 할 방향을 명확히 했다. 그 표어 자체가 백만 불짜리 가치가 있는 잠언이었다.
그가 대한변협 협회장 후보로 뛸 때였다. 그를 돕는 사람들이 상대방 후보의 흠에 대한 자료를 가지고 있었다. 선거에 이기기 위해 그 사실을 폭로하자고 했다. 일단 출마했으면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낙선을 감수하면서도 네거티브 선거전을 거절했다. 당선보다 훌륭한 낙선이었다. 뛰어난 법률가는 많아도 변호사의 지도자는 많지 않다. 그는 훌륭한 지도자가 틀림없는 것 같다.
2011년이 저물어가는 12월 9일 오후 세 시경 법원 앞 정곡빌딩 3층에 있는 그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처음으로 마주앉아 대화하는 사이였다.
“요즈음 어떻게 지내십니까?”
내가 근황부터 물었다.
“서울회 회장을 마치고 다시 개인변호사로 돌아와 일을 하고 있죠. 요즈음은 일주일에 책 두 권씩 읽는 걸 목표로 하고 있어요. 영풍문고에 가서 책들을 돌아보면 제가 너무 행복한 것 같아요. 책꽂이도 새로 샀습니다. 세계 역사 쪽의 책들을 많이 보는데 그 중에서도 몽고초원을 둘러싼 그들 부족 간의 삶에 대한 책을 보고 있습니다. 그걸 보니까 우리가 잘 먹고 잘산다고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는 생각은 착각이더군요. 몽고나 동남아시아의 더 깊은 문화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씩 국립국악원에 가서 단소도 배우고 춤도 춥니다. ‘한량무’라는 전통춤을 연습하고 있습니다. 즐겁게 삽니다.”
그는 살 줄 아는 사람이 틀림없는 것 같다. 그의 사무실의 둥근 탁자에는 기록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걸 보며 물어보았다.
“지금도 사건을 많이 하십니까?”
서울회 회장을 하면서 몇 억원을 개인 돈으로 썼다면 상당히 여유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변호사를 해서 가족과 형제들을 돌보고, 서울회 회장을 하고 나니까 돈이 별로 없네요. 남들은 내가 돈이 많아 회장에도 출마하고 그런 줄 아는데 사실은 없습니다.”
그가 소탈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의 성장환경이나 배경을 알고 싶었다.
“어려서부터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물어도 될까요?”
“저요? 전라도 깡촌 출신입니다. 밭 두마지기가 재산의 전부였죠. 아버지가 술까지 좋아하시는 바람에 고생하면서 자랐어요. 어려서 소 키우느라고 풀 베러 다니고 산에 나무하러 다녔죠.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점심 먹은 기억이 없어요. 도시락을 못 싸가지고 다녔으니까요.”
현재 그의 환경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그가 계속했다.
“사촌형이 세탁소를 하고 있었어요. 그 형이 제가 안 됐던지 저를 서울로 끌어올렸죠. 당시 제가 살던 곳은 경기도 광주이주민 단지라는 곳이었는데 서울의 빈민들을 이전시키기 위해 조성한 지역이었습니다. 거기서 사촌형이 하는 세탁소 일을 도왔습니다. 물지게를 져 나르기도 했죠. 그때 이주민들이 격렬하게 데모하면서 저항하는 걸 보기도 했습니다. 광주대단지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버스를 불태우기도 했었고요. 하루 종일 다리미질을 하고 살던 사촌형은 저보고 공부를 하라고 했어요. 제가 가난해도 초등학교 시절부터 공부에는 독한 편이었습니다. 검정고시를 치르고 한양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대학 2학년 올라가면서 1차를 합격했고 4학년 때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그때 저는 고시계에 합격기를 쓰면서 ‘스타트 라인’이라는 제목을 붙였어요. 어려서부터 그때까지는 남들과 동일한 선상에서 공정하게 경쟁을 한 적이 한번도 없었어요. 그렇지만 그때부터는 동일한 선상에서 출발한다면 절대 남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습니다. 판사가 됐습니다. 이왕 판사가 됐으면 대법관까지 가고 싶었죠. 엘리트들이 모이는 법원행정처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 개업을 한 거죠.”
“왜 변호사가 됐죠?”
“판사시절 저는 집안의 기둥이었습니다. 술 좋아하시는 아버지와 어린 동생 넷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딱 밭 두마지기와 시골집을 남기고 돌아가셨어요. 삼우제를 지내고 올라오려고 하니까 군청 부근 술집주인들이 찾아와서 저보고 아버지 술값을 갚으라고 하더군요. 부의금으로 아버지 빚을 갚았습니다. 판사를 하면서 둘째 동생 대학을 졸업시켰습니다. 사표를 낸 직접적인 동기는 저를 이끌어준 사촌형님이 길바닥에 나앉게 됐기때문입니다. 세탁소에 불이 나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도 가게 얻을 돈 일부로 내게 검정고시 공부할 책을 사주던 은인이었죠. 사람이 좋아 남에게 잘해주고 사기도 잘 당하는 성격이었는데, 보증 서 줬다가 집까지 날린 겁니다. 이런 집안 형편에 제가 판사로서 명예만 추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법원을 떠났습니다. 그 후로 변호사를 15년간 했는데 그럭저럭 작년에 막내 동생 결혼까지 시켜 보냈습니다. 판사의 명예를 쫓지 않은 대신에 주변에 보답을 한 셈이죠. 남들은 내가 돈을 많이 번 줄 아는데 좌우지간 실속은 없어요.”
대충 그가 어떤 인격을 가졌는지 이해가 갔다. 본론으로 들어갔다.
“변호사란 어떤 직업이라고 생각하죠?”
내가 물었다.
“초창기 때 강도, 특수 절도 등 십여 가지 죄명으로 기소된 소년범들을 변호한 적이 있어요. 포장마차를 하는 엄마가 경찰서 유치장으로 면회를 가서 ‘왜 자백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엄마가 한번 맞아봐 안 불게 생겼나’라고 하면서 경찰관이 안 보는 틈에 아이가 몸을 보여주더랍니다. 맞아서 온통 시꺼멓게 멍이 들어있던 사건이었죠. 알아보니까 형사들이 미제사건까지 터무니없이 누명을 씌운 겁니다. 법정에서 증거들을 하나하나 탄핵해서 무죄를 선고받게 했습니다. 가난한 아이들이라 무료로 변호를 했는데 커서 제대로 되면 꼭 은혜를 갚겠다고 하더라고요. 변호사라는 라이선스를 가지고 내 돈까지 들여 무료변론을 해주고 멋있게 끝냈을 때 그게 기쁨 아닌가요? 지금도 감사편지를 읽으면 생활에서 있었던 모든 짜증이 없어집니다. 내가 받았기 때문에 베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변호사란 직업에서 능력보다 더 큰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변호사와 돈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변호사를 해 보니까 재물이라는 건 결국 운인 것 같습니다. 자기가 벌고 싶다고 따라가고 파고들어도, 운이 아니면 들어오지 않아요. 오히려 너무 돈에 집착하면 오해나 말썽이 생기고 자기뿐 아니라 남도 해치게 되죠. 스스로 최선을 다하면 돈은 따라온다고 생각합니다. 또 정도(正道)를 가다보면 주변에서 인정해 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구요. 복 있는 사람은 다른 인연으로도 돈이 모아지기도 하더라고요.”
“서울회 회장을 하시고 대한변협 협회장에도 출마를 했었는데 어떤 동기로 그렇게 된겁니까?”
“변호사회의 클라이언트는 변호사죠. 그런데 변호사회를 가보면 변호사가 수위한테 제지를 당하기도 하고 직원들이 변호사의 상전노릇을 하는 겁니다. 변호사회 직원들은 철밥통을 차고 무사안일이고 변호사들은 잠시 왔다가는 손님이었죠. 변호사회가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변호사회 자체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변호사회가 사랑을 받는 건 가지지 않은 자, 소수자들의 반려가 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목소리를 내줘야 하는데 그게 없는 겁니다. 요즈음의 예를 들자면 그래도 국무총리를 한 한명숙씨가 두 번이나 무죄를 선고받았는데도 변호사회에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또 판사들이 FTA에 대해 말하는데도 그에 대해 아무런 반응이 없어요.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발을 빼는 건지 의식이 없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그때도 그랬습니다. 주위에서 변호사도 어느 정도 했으니 봉사해 보라고 권했습니다. 어려서부터 혜택만 받은 셈이죠. 사촌형의 도움을 받고 대학에서도 장학금을 받고 변호사를 하면서 집도 사고 아이들도 유학을 보냈습니다. 받은 걸 봉사로 돌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서울회 회장에 나가게 됐습니다. 물론 공명심도 있었죠.”
“서울회 회장을 하시면서 어떤 개혁을 하셨습니까?”
“변호사들이 변호사회관에 들어서면 느끼는 불쾌함부터 없앴습니다. 퉁명스럽다는 수위를 주차장 관리인으로 보내고, 오는 변호사들을 보고 미소 지을 수 있는 여성도우미를 입구에 배치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변호사의 정체성을 살리기 위한 표어와 상징물을 만들었습니다. ‘정의의 붓으로 인권을 쓴다’라는 변호사들이 지향해야 할 목표를 설정했습니다. 서울회의 좋지 않은 폐습을 발견했습니다. 서울회 회장 중 일부가 임기도 마치지 않고 바로 대한변협 협회장 선거를 위해 회비로 선심성 선물을 마련, 사실상 선거운동을 해 온 걸 알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부터 그걸 끝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서울회 회장을 한 사람은 임기가 종료된 후 바로 대한변협 협회장이 되지 못하도록 규정을 개정했죠. 그리고 변호사회의 돈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는 직원들 위로금이나 점심값이 회비에서 나갈 게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말은 쉬워도 어려운 일을 그는 실천했다. 그가 계속했다.
“선거운동을 위해 돌아다니다 보니까 변호사들이 정말 비참한 실상에 놓여있다는 걸 알게됐습니다. 변호사가 개발부동산 시행에 가담했다가 감옥에 가기도 하는 형편이고요. 법원 앞 대로변의 사무실은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한 블록 뒤로 가 이면도로에 있는 작은 사무실들은 형편이 전혀 달랐죠. 몇 명의 변호사들이 작은 사무실에 모여 있고, 사건은 아예 없는 것 같았습니다. 상담이라도 해 봤으면 좋겠다는 변호사도 있었습니다. 회장이 된 후 그들을 위해 소액사건 전담변호사제도를 만들었죠. 힘든 변호사들을 법정에 보내기 위한 아이디어였죠. 또 개인회생이나 파산을 독점하는 변호사들이 있었어요. 사무장을 풀어놓고 사건을 끌어들이는 거죠. 젊은 변호사들이 그 영역을 받아 하게 했죠. 가격을 낮추게 해서 경쟁력이 있게 만들어 준 겁니다. 몇몇이 독점할 때는 한 건에 200만원 정도는 받았는데 그 가격을 확 다운시키고 다른 변호사들도 일을 하게 한 거죠. 독점하던 변호사들이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더라고요. 그렇지만 전 그들이 불법을 저지르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결국 다 물러가게 했습니다.”
그는 변호사업계의 현황을 손바닥 위에 놓고 보듯 파악하고 있었다. 그가 덧붙였다.
“이제 우리 변호사들이 큰 틀에서는 송무사건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전관 등 상위 20% 정도의 변호사들은 아직 사건이 있는 것 같으나, 나머지 80% 대부분의 변호사들은 아주 힘이 든 상태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이나 미국처럼 굳이 법원을 통하지 않는 선택적 조정제도를 입법화시키는 게 바람직합니다. 변호사회 자체에서 조정을 해 주는 거죠. 자격을 갖춘 변호사들이 인지대를 절반으로 받고 해주면 경제적이죠. 모든 걸 법원에서 전담을 하니까 지금 5초 재판이니 10초 재판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거 아닙니까? 도쿄재판소의 형사단독재판을 보면 오전에 두 건 정도가 보통이랍니다. 민사도 마찬가지고요. 요즈음 보면 우리 변호사들이 전자인증제도를 다른 분야의 사람들에게 빼앗긴 것 같아요. 뱅킹이나 상거래 인증은 사실상 변호사가 해야 할 분야죠. 전자결제에 법률적 문제점이 많습니다. 변호사들이 무관심해서 빼앗긴 거죠. 등기에 공신력을 주려면 매매계약의 공증을 전자인증으로 하면 됩니다. 선거 때 돌아다녀보면 공증서류를 보관하는 게 엄청난 부담인데 전자인증이 되면 전혀 그런 게 없죠. 전자공증을 하는 새로운 아이템 개발이 필요해요.”
그의 머릿속에는 끊임없이 아이디어가 들끓고 있는 것 같았다.
“변호사회와 관련하여 앞으로 꿈이나 계획이 있다면 어떤 겁니까?”
“언제가 될지 모르나 기회가 된다면 전체 변호사들을 위하여 기꺼이 봉사할 생각입니다.”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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