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번째 이야기

계단이 많고 유난히 긴 청계산 자락을 울긋불긋 등산복을 차려 입은 변호사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고 있다.
“요즘 무슨 일 있어?” “왜?” “그냥, 나한테 좀 화난 것 같기도 하고.”
“그런 거 없어!” 니가 민변이랑 너무 친하게 지내는 것 같아서 내심 기분이 안 좋다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지 말고, 우리 다음 주에 어디 좋은 곳으로 바람이나 쐬러 갈까?” 갑자기 가슴이 콩당거렸다.
영애랑 파스타집에서 수다 떨던 날 서변을 만난 이후로 서로 자연스레 반말을 할 정도로 가까워지고 가끔가다 삼겹살에 소주를 몇 병씩 비워내기는 했지만, 그는 아직 나에게 이렇다 할 언질을 준 적도, 영화를 보거나 달콤한 말을 해준 적도 없었다. 경수씨랑 헤어졌다고 말해주었을 때도 단 한번 환하게 웃으며 “그래? 와, 이제 완전 솔로네”라고 말했을 뿐, 그 이상은 없었다.
“아~얏!” 갑자기 민 변호사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민 변호사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서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러게, 아무리 청계산이라도 겨울 산행은 위험하다니까요. 얕게 쌓인 눈 때문에 미끄러지기 십상이거든요.” 언제 달려갔는지, 서 변호사가 너무 걱정된다는 듯 민 변호사의 다리를 매만지면서 말하고 있었다. 감기 때문에 몸이 안 좋다던 민 변호사는 노스페이스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된 신제품 구스 다운 부츠와 에틱 글로브까지 챙겨 입고 있었는데, 종아리에 살짝 피가 맺혀 있는 모습에 남자 변호사들이 어쩔 줄 몰라하는 눈치였다.
“서 변호사, 아가씨 다리를 너무 만지는 거 아냐? 잘못하면 500만원이야. 누구 반창고 가진 사람 있으면 여기 좀 줘보세요.” 이웃집 삼식이 아저씨 같이 생긴 정 변호사가 옆에 있다가 나를 쳐다보며 살짝 윙크를 하고, 민변은 서변이 다리를 만질 때마다 예의 그 도톰한 입술을 움짓거리면서 살짝 몸을 뒤틀고 있었다.
나하고 놀러가자고 할 때는 언제고, 비명소리가 들리자마자 쏜살같이 달려가서 남의 다리나 주물럭거리는 서변을 보고 있자니 어이가 없고 화가 치밀었다. “민 변호사는 다리를 삐어서 더 못 걸을 것 같으니, 제가 밑으로 모시고 내려 갈게요. 여러분들은 올라갔다가 내려오시고, 저녁 먹을 때 합류해요.” 더 이상 뭐라고 대답할 새도 없이 서변은 민 변호사를 부축하며 아래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저 두 사람 아주 잘 어울리지 않아요? 하하, 역시 처녀 총각이 만나니 즐겁네. 안 그래요?” 부글 부글 속이 끓어오르고 있었는데, 눈치없는 정 변호사가 한마디를 덧붙인다.
“예. 그렇네요.” “김 변호사님 아직 결혼 안했죠? 누구 사귀는 사람 없어요?” “예, 저는 아직…” “그렇게 눈 높게 구시다가 금방 시간 갑니다. 이상하게 주변에 보면 정말 괜찮은 여자 변호사들이 많이 남아있단 말이에요.” 뒤에서 걸어오던 오 변호사까지 정 변호사 말에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정 변호사님, A, B, C, D 이론 그 얘기 아시죠?” “무슨 얘기요?” “결혼 시장에 나온 여자와 남자를 각각 A, B, C, D 등급으로 나눌 수 있는데, 남자 A 등급은 여자 B, C, D 등급까지 고를 수 있지만, 여자 A 등급은 남자 A 등급하고만 매칭이 되요. 결국 그러다 보면 마지막에 여자 A 등급과 남자 D 등급이 남게 되는데 그쯤 되면, 여자 A 등급은 너무 나이가 많이 들어서 더 이상 선택의 폭이 없어지고, 할 수 없이 홀로 살거나 D 등급짜리 남자하고 결혼하게 된다는 거죠.” “와, 듣고 보니 그럴듯한데요.” “김 변호사님도 너무 눈 높이지 마시고 적당히 포기하셔야겠어요. 게다가 김 변호사님은 검사 출신이잖아요.” “아, 맞다. 정말 김 변호사님 큰일나겠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정 변호사와 오 변호사는 자못 진지하게 남의 미래를 구체적으로 걱정해가면서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지 말고, 우리 이참에 한 명씩 김 변호사님 소개팅 시켜주기 하는 거 어때요?” “아~ 그거 참 좋네요. 마침 우리 와이프가 자기네 병원에서 레지던트하는 친구가 괜찮다고 누구 한 명 소개시켜달라고 하던데.” “오 변호사님이 레지던트 소개해주면, 저는 방송국 PD 한명 소개시켜 드릴까요? 요즘은 방송국 아무나 못 들어가잖아요?” “그러게요. 정말 격세지감이에요. 우리 때보다도 경쟁이 엄청 치열한가 보더라고요.”
혼인 적령기 등급을 논하며 소개팅 얘기를 주고받던 두 남자는 어느새 방송국에 들어가려면 집안이 좋아야 한다느니, 누가 혼테크로 재미를 좀 봤다느니 하며 웃고 떠들고 있었지만, 민변과 단 둘이 내려간 서변이 신경 쓰여 내 귀에는 더 이상 그들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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