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사회 정화할 법조윤리협의회에 기대 커”

연수생들에게 각자 자기의 묘비에 쓸 비문(墓碑銘)을 써서 제출하라고 한 사법연수원장이 있었다. 권광중 판사였다. 연수생들에게 자기가 어떤 법조인으로 남을 것인가를 그리게 하려는 것 같았다.
권광중 판사는 법조계에서 실력파로 알려진 엘리트 법관이다. 서울민사지법 수석부장판사를 지내면서 회사정리절차 등 도산절차의 기초를 다졌다. 동시에 회사정리, 화의 및 파산사건실무 등 여러 논문을 썼다. 컴퓨터에도 해박해 ‘컴퓨터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다. 나이 칠십에 가까운 그는 금년 법조윤리협의회 위원장을 맡아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그가 사법연수원장으로 있으면서 만든 연수원 31기생들의 비문집 ‘아름다운 약속’을 구해 읽어보았다. 재치 있는 문장 속에 삶의 지혜가 반짝거린다.
‘그대 서재에 있던 꽁초 가득한 재떨이처럼, 항상 타인의 아픔을 받아주었고, 그 아픔을 대신하기 위해 힘썼었네.’
연수생의 따끔한 지적에 나는 가슴이 움찔한다. 의뢰인의 아픔을 업무로만 받아들였지 공감하며 아파본 적이 거의 없다.
연수생 지정길 씨의 비문이었다. 법조인 명부를 찾아보니 그는 지금 서울에서 변호사를 하고 있다. 좋은 변호사가 틀림없을 것이다. 또 다른 비문들을 찾아본다. 연수생 이규영 씨의 비문 중에 이런 말이 들어있다.
‘밥보다 술을 더 좋아했으니 술꾼이라고 할 수 있고, 나를 보고 얼굴 찌푸리는 자보다 웃는 자가 더 많았으니 개그맨이라고 할 수 있고, 돈을 버는 것보다 쓰는 것을 더 좋아했으니 자선사업가라 할 수 있겠다. 지금 행복하게 반 평 땅에 눕는다.’ 그는 지금 인천에서 변호사를 하고 있다. 그의 사무실은 즐겁고 밝은 공기로 가득 차 있을 것 같았다. 이런 글도 있었다.
‘세상 사람들 다 그렇게 살아가는 대로 때도 묻고 흐르는 물결대로 휩쓸려도 다니면서 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왜 그리도 자네는 고집이 세었던지.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려 애를 태웠는가. 한 줌 흙밖에 안 남을 인생, 물결 흐르는 대로 그렇게 살아가지 뭘 그리 부딪치고 깨어지며 지냈는가. 세상 속에 거하되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며 사람들과 함께 하기를 즐겼으되 그 속에 매몰되지 않으며 자네의 길을 걸어간 홀로 걷는 사람이었다네.’
내면의 깊이가 느껴지는 이병일 씨의 비문이었다. 그는 지금 수원에서 변호사를 하고 있다.
‘이제까지 고생했다, 푹 쉬어라’라면서 웃음을 짓게 하는 비문도 보였고 ‘그대 왜 그 안에 있는가? 안 답답한가? 별도 없다. 바람도 없다’고 답답해하는 비문도 있었다.
연수생들에게 비문을 써보게 한 권광중 판사는 내용이 많은 사람이 틀림없을 것 같았다. 이미 그 행위 자체로 법조윤리교육을 완성했을 수도 있었다. 그는 사법연수원장을 끝으로 지난 2000년 정든 법원을 떠나 변호사가 됐다.
쌀쌀한 바람이 불던 2011년 11월 22일 명동 부근에 있는 그가 근무하는 로펌 광장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나에게 나타난 권광중 변호사는 법조인이라기보다는 드라마 전원일기에 나오는 농촌의 마음 좋은 동네 아저씨 같은 느낌이었다. 그동안 그가 이룩했던 깐깐한 판사의 업적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그는 대통령의 아들인 김현철에게 조세포탈죄를 인정,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한 준엄한 법관이기도 했다.
“30년의 법관생활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먼저 그가 오랫동안 근무했던 사법부에 대한 소회를 묻고 싶었다.
“다른 직종에 간 친구들을 보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습니다. 더러 모략을 하기도 하고 말이죠. 그런데 법관이란 각자 자기 기록을 보고 양심에 따라 스스로 판단을 하는 게 일이었죠. 밀치고 끌어내리고 그런 치열한 싸움이 없는 직업이었습니다. 대체로 만족합니다. 다만 일이 너무 바빠 인생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 것 같아요.”
“판사들이 너무 틀 속에 박혀 있다고 생각은 안 하시나요?”
내가 물었다. 사회의 시선 속에서 그들은 너무 경건하게 살도록 강요되는 면이 존재한다는 생각이었다.
“판사들은 모든 게 틀 속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판결문을 보십쇼. 사실 인정도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라 증거법칙이라는 틀을 통해 결론을 내야 합니다. 법령적용도 마찬가지구요. 업무자체가 틀에 박힌 거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시 그에게 물었다.
“최근에 사회를 들끓게 한 영화 도가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반인들은 그런 나쁜 놈들을 석방해 준 법관들에 대해 분노하는데요.”
“저는 국민과 판사들 사이에 인정한 사실이 다르다는 생각입니다. 판사들은 기록을 보고 국민은 영화를 본 거죠. 판사들 보고 그 영화를 보고 판결을 하라고 했으면 결과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역시 오랜 세월 법관을 한 사람답게 날카로운 면이 있었다.
판사들이 본 수사기록은 성폭행 사실 하나였다. 합의서가 있었고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표시가 있었다. 그게 판사들이 본 전부였다. 법조인의 입장에서 집행유예는 당연한 결론인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판사와 일반국민 사이에 왜 그렇게 인식의 차이가 멀고멀다고 보십니까?”
나는 그 원인을 알고 싶었다. 얼마 전 한 고등법원 부장판사에게 물어보았다. 자기도 가슴에 확 와 닿는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다고 솔직히 대답했었다. 잠시 생각하던 권광중 변호사가 신중한 어조로 이렇게 설명했다.
“예를 들어 지나가다가 조폭들이 싸우는 광경을 본다면 무시무시할 겁니다. 그런데 재판에서 공소장을 보면 별 게 아닌 듯한 느낌을 받아요. 사법경찰관이나 검사가 그런 생생한 장면들을 전혀 글로 묘사하지 못하는 거죠. 범죄의 잔혹성을 죽은 문장으로 표현하니까 현장감이 없는 거예요.”
그는 보통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부분을 일깨워 주었다. 30년 법관경력의 그는 현실재판의 부족한 부분을 알고 있었다. 그가 덧붙였다.
“판결문도 역시 논리만 있지 미흡합니다. 그걸 벗어나려면 읽는 사람에게 설득용으로 인문학적 지식과 멋이 가미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가 사법연수원장을 끝으로 법원에서 나와 변호사 생활을 한 지도 벌써 10년이 된다. 질문의 방향을 바꾸었다.
“변호사란 어떤 직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판사 생활에서 변호사로 넘어와 느끼는 점을 알고 싶었다.
“제 나이가 칠십인데 또래의 친구들은 대개 일을 하지 않고 집에서 쉽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 법정에도 나가고 로펌에도 근무할 수 있다는 그 자체만 해도 얼마나 좋은 직업입니까? 다른 분야는 전직을 하려면 새로운 공부와 경험을 쌓아야 하는 힘든 과정이 장애물 같이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판사에서 변호사로 넘어오는 길은 평탄합니다. 같은 법리를 다루기 때문에 특별히 공부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법정도 같은 장소입니다. 장점이 많은 직업이죠.”
“지금도 법정에 나가시는데 그게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법정에서 어떤 것들이 보이시는지 말씀해 주시죠.”
대부분 로펌의 변호사들은 어느 나이가 되면 법정에 나가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다른 뭔가가 보일 게 틀림없었다.
“팽이가 돌아야 쓰러지지 않죠. 노인티를 내면 금방 쓰러지게 되는 겁니다. 또 아직도 나를 보고 오는 고객들이 있고 후배들도 다 바쁩니다. 내가 법정에 갈 수 있으면 가야죠. 요즈음 법정에 가보면 저 두꺼운 기록을 보고 판사가 결론을 내는 게 참 용하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젊은 판사들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잘하는구나 하고 감탄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판사가 저래서는 안 될텐데 하고 걱정도 합니다. 기록을 완전히 파악하고 구체적인 입증을 요구하는 능숙한 판사는 칭찬해 주고 싶죠. 그런데 변호사가 서류를 제출했는데도 그걸 모르고 법정에서 다시 묻는다거나 기록을 읽지 못한 채 법정에 들어오는 판사를 보면 저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변호사를 하시면서 서글펐던 일
은 없으십니까?”
내가 물었다. 고참 법관들은 데리고 있거나 가르치던 후배판사에게 재판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때 선배법관이 열심히 연구한 법리적 주장을 후배가 이유 없다며 한마디로 기각할 때 서글퍼진다고 하기도 했다.
“재판부가 내가 생각한 법리나 의견과 다르게 결론을 내렸을 때나 형식적으로 재판을 끝냈을 때 섭섭했죠. 그렇지만 이런 때 재판부를 욕하면 누워서 침 뱉기가 됩니다. 법률에 관한 견해차이라고 이해하고 의뢰인도 그렇게 설득해야죠.
그렇지만 무조건 감싸서는 안 됩니다. 판사 중에도 더러 실력 미달인 사람이 있고 판사답지 못한 태도를 나타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모습이 보이면 법원장에게 얘기해 줘야 합니다. 깨끗한 사회가 되려면 관계인들의 고발정신이 투철해야 합니다. 전에는 법조계가 좁아 한 다리 걸치면 거의 다 아는 사이여서 힘들었지만 앞으로는 서로 잘 모르는 익명의 사회가 될 겁니다. 그런 때 내부자 고발이 중요합니다.”
그는 얼마 전 법조윤리협의회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전관출신 변호사의 사건수임을 제한한 개정변호사법이 시행된 중요한 시기에 위원장을 맡은 것이다. 그에 관해 묻고 싶었다. “요즈음은 어떤 일에 열중하십니까?”
“매일 신문기사에 변호사가 사고친 걸 살핍니다. 그걸 조사해서 징계를 해야 하니까요. 수시로 변호사들이 구속되고 처벌받는 현실입니다. 보관 중인 돈을 횡령하는 경우도 있고 로비해서 빼준다고 하면서 편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들 알면서도 그 짓을 합니다. 선배변호사를 모략하고 고소하는 상어변호사(shark lawyer)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제 내년부터 변호사가 대량으로 배출되고 먹잇감이 없을 때 어떻게 될지 걱정입니다. 법조윤리협의회가 그 임무를 완수하고 폐지되는 날이 와야 할 텐데, 변호사들의 법조윤리 위반 사고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니 안타깝습니다. 할 수 없이 법조윤리협의회가 더 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검사가 파견되어 나와 일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외국같이 판사의 윤리, 검사의 윤리도 조사하는 기관이 되어야 할 걸로 봅니다.”
“지금은 변호사들에 대해 어떻게 조사하시고 계십니까?”
“공직 퇴임 후 2년 내의 변호사, 상반기 또는 하반기에 예컨대 형사사건 30건 이상, 다른 변호사 평균의 2.5배 이상의 사건을 수임하는 특정변호사에 대해 수임 자료와 처리 결과를 제출 받아서 수임 경위, 변론의 성실성 등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어떤 관계로 사건을 의뢰했는지 등 당사자에게 일일이 전화를 해서 확인합니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담당경찰관이 소개했다는 경우도 있고 여러 가지입니다. 또 사무장을 경찰서에 파견해 사건을 유치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동료변호사들이 제일 잘 압니다. 각 지방변호사회마다 저희 법조윤리협의회에 이를 통보해 주면 변호사 사회를 맑게 정화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상어변호사의 출현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는데요. 어떤 변호사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말씀해 주시죠.”
“얼마 전에도 대법관을 지낸 제 동료가 상어변호사한테 걸려서 혼난 변호사 얘기를 해 주더군요. 변호사가 변호사를 잡아먹는 거죠. 일본 로펌의 경우 의뢰인의 주장에 대해 ‘그게 사실입니까?’라면서 수시로 진실 여부를 챙긴답니다. 의뢰인의 사실 주장에 대하여 그것이 진실인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변호사는 의뢰인의 대서인도 아니고, 의뢰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하수인이 아니니까요. 변호사윤리장전을 보면 옳지 못한 일은 돕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제14조). 의뢰인의 범죄행위 기타 위법행위에 대하여는 협조하지 말아야 하는 겁니다. 당사자의 말을 듣고 백퍼센트 믿고 그대로 해줬는데 뭐가 어떠냐는 식으로 상어변호사의 변명이 통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변호사들은 법조윤리위원회에 제소해서 징계처벌을 받게 해야 합니다. 모략성이 그 자체로 드러나는 변호사의 막무가내식 소송 제기는 막아야 합니다.”
그는 아직도 일에 대한 정열이 끓고 있었다. 이야기를 부드러운 삶의 일상으로 돌렸다.
“일 이외에 어떻게 생활을 즐기고 계십니까?”
“저는 젊어서부터 아내와 함께 미술전시회에 다니는 게 취미입니다. 지나가다가도 화랑이 있으면 들러서 그림을 감상합니다. 이번 달에는 어디서 큰 전시회가 있나 보고 그곳을 찾아 갑니다. 전시회에 가서 좋은 그림을 보고 혼자 느끼는 거죠. 좋은 음악을 들으려면 돈이 들지만 그림감상은 거의 비용이 들지 않아요. 지방에서 법원장을 하면서도 전시회가 있으면 빠지지 않고 다 가려고 노력했습니다.”
“인생 후반부에 마지막으로 특별히 하고 싶으신 일이 있다면 어떤 겁니까?”
나는 그에게 버킷리스트를 물었다.
“제 친구들 중에는 판사생활을 접고 미국에 새로 물리학을 공부하러 간 사람도 있어요. 굳이 미국까지 갈 필요가 없는데도 이 사회는 공부를 하려면 학사나 그런 경력을 요구하더라고요. 꿈을 끝까지 놓지 않는 그 모습을 보면서 부러웠죠. 저도 그렇게 살다가 ‘웰 다잉(well-dying)’하면 좋겠어요.”
그가 순박한 웃음을 씩 지으며 말했다.
/ 엄상익 공보이사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