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적으로 생활에 파고들어 봉사하라”

독재정권 시절 대학생들이 신민당사에 들어가 민주선거를 외치며 항의를 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기소됐다. 정권은 직·간접적으로 담당재판부에 압력을 가했다. 판사가 저항하는 방법은 무죄를 선고하고 사표를 쓰는 것이었다. 김성기 판사는 법관을 그만두고 변호사가 됐다. 대법관이 되려는 꿈을 접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수많은 법조 후배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지도자다. 그와 함께 로펌을 운영한 적이 있다. 그에게 오는 많은 사건들을 그는 후배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겉으로는 점잖은 척하지만 이면으로는 야수같이 치열하게 사건을 놓고 경쟁하는 현실에서, 행동으로 보이는 그런 양보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을 역임했다. 로스쿨 출신 변호사의 배출로 변호사회가 거대해지게 되고 변협 협회장의 직선제 문제로 변호사 사회가 시끄럽다. 변호사업계의 빛과 소금인 그의 한마디를 꼭 들을 필요가 있었다.
2011년 12월 8일 오전 11시 학동역 부근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는 작은 로펌인 신우(信友)의 대표로 있다. 칠순의 나이에도 그는 후배 변호사들과 함께하기를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유리로 된 작은 방들이 벌집같이 차 있는 제일 끝 쪽에 그의 작고 소박한 방이 있었다. 그와 마주 앉았다. 십여년 전 같은 사무실에 있을 때보다 모습이 많이 변했다. 머리에 흰 눈이 덮인 듯 더 하얗게 빛이 나고 눈빛이 조금 흐려졌다. 눈 때문에 고생을 했다고 한다.
“요즈음 어떻게 지내세요?”
근황을 물었다.
“권위주의 정권시절 희생된 박종철이나 전태일 같은 사람들의 명예회복을 해주고 묘를 만들어 주는 민주화보상심의회에 나가 일해요. 또 오래전에 죽은 나병환자들의 억울한 한을 풀어주는 일도 거들죠. 왜 우리 어렸을 때 보면 문둥이라고 함부로 대했잖아요? 억울하게 맞아죽은 사람들도 있고 말이죠.”
부지런한 그의 성격은 아직도 쉬는 날이 없는 것 같다. 그가 계속했다.
“예전에는 서류 몇백 장 보는 게 끄떡없었는데, 나이 탓인지 이제는 돋보기를 쓰고 그걸 보는 것도 힘이 드네요.”
“이제는 좀 쉬시면서 다른 일을 하셔도 되잖아요?”
“내가 아는 건 법률이에요. 자격도 변호사고요. 그걸 가지고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이런 거죠.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 주신 자격인데 나도 그걸로 세상에 봉사하고 가야죠. 힘은 들지만 그래도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해요.”
온유하고 반듯한 그의 성품은 이 사회를 정화시키는 맑고 깨끗한 물 같은 존재다.
“하루를 어떻게 보내십니까?”
인생의 저녁을 맞은 선배변호사의 아름다운 삶이 궁금했다.
“아침이면 한강가를 산책하면서 이 생각 저 생각을 해요. 여러 추억이 떠올라요. 요즈음은 안 쓰던 일기까지 써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장면은 뭡니까?”
일흔을 넘긴 한 인간의 뇌리에 화석같이 각인된 기억이 어떤 것일까 궁금했다.
“6·25 전쟁 때 나는 열 살이었는데, 당시 인민군이 들어오니까 머리에 붉은 띠를 매고 눈에 살기를 띠고 거리를 다니던 사람들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요.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감옥에서 풀어준 사람들이죠. 인민군들이 버리고 간 부서진 탱크 안에 들어가 놀던 일도 떠오르고, 포도밭에 죽어있던 인민군 장교의 팔뚝에 걸려있던 손목시계도 영화같이 생생해요.”
6·25 전쟁은 극한의 좌우대립이 불꽃을 일으켰던 사건인지도 모른다. 요즈음의 우리사회도 이념대립이 심하다. 그의 기억은 대립의 처참한 끝을 알려주는 예언 같았다.
“요즈음 변호사회에 대해 한 말씀 해 주시죠.”
내가 본론을 꺼냈다.
“변호사회가 극도로 관료화되고 있어요. 몇 년 전의 일인데 아는 변호사가 일을 보러 서울지방변호사회에 갔어요.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는데 사무국장이라는 사람이 단추를 누르고 부동자세로 서서 회장님이 오시니까 타지 말라고 하더라는 거예요. 회장이 왕이고 사무국장은 비서인 모습이었죠. 그걸 본 변호사가 다시 변호사회에 가고 싶겠습니까? 그런 권위주의를 타파해야 합니다. 변호사회 회장이 되면 전용 승용차도 나오는데 회장 차보다 협회 일을 봐야 하는 차가 더 필요한 거 아니겠어요? 회장이 절대군주가 되고 임직원들이 심부름꾼같이 눈치만 보는 그런 변호사회가 되면 안 되죠.”
맞는 말이었다. 변호사의 대표는 소박하고 겸손해야 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이제는 변호사 회장 선거도 흑색선전이 난무하고 치열해요. 선거가 치열해지니까 변호사회를 전리품으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어요. 이제 변호사회 회장 선거가 국회의원 선거보다 깨끗하다고 단정할 수 없어요. 그러다 보니 선거가 끝나면 대립하던 후보자 진영이 서로 앙금이 남기도 하는 겁니다. 변호사회 회장들이 밖에 나가면 대접을 받으니까 그 직책을 벼슬로 착각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조직이 커지니까 관료화되고 있어요. 회장 중심으로 운영이 되니까 임직원이 그 얼굴만 바라보는 거죠. 그 말 한마디로 모든 게 결정이 나고 말이죠.”
“변호사회 회장의 리더십은 어때야 한다고 보십니까?”
“더러 시간이 없고 일이 지지부진해진다고 회장이 몇 사람하고만 얘기하고 독단적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있어요. 빠르게 일을 처리한다고 독단적으로 끌어가서는 안 됩니다. 여러 사람의 말을 골고루 듣고 해야 합니다. 그게 오히려 빨리 가는 방법이고 민주적인 절차죠. 회장과 몇 명만 일하면 나머지 임원들은 뭣 하러 회에 나가겠어요? 저도 전임 서울회장을 했다고 자문위원으로 가끔 현 회장이 불러서 밥을 사는 일이 있어요. 그런데 밥만 얻어먹고 돌아올 때면 왜 가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밥 얻어 먹을 데가 없어서 거기 가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좀 더 현 회장이 회의 운영에 관한 전임자들의 경험을 들어줬으면 합니다.”
“요즈음 직선제 문제로 대한변협과 서울지방변호사회가 강하게 의견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태까지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이 변협 협회장이 됐었는데 앞으로는 여러 지방변호사회장이 돌아가면서 변협 협회장이 됐으면 좋겠어요. 일본의 경우도 지방변호사회장들이 서로 계파별로 조용히 타협을 해서 교대로 전체 회장이 되고 있어요. 서울회가 인원과 자금이 많다고 계속 변협 협회장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에요. 직선제로 바꾸면 대한변협의 장악력이 강화됩니다. 앞으로는 지방변호사회 회장들이 골고루 대한변협 회장을 해야 합니다. 그걸 문서화할 수는 없지만 변호사라면 서로 그렇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와 양보심을 발휘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의 날카로운 지적과 대안제시였다. 얘기를 그의 근황으로 돌려 아름다운 선배변호사의 모습을 찾기 위해 물었다.
“요즈음도 사건을 하십니까?”
“돈 받고 하는 사건은 맡지 않은지 오래 되요. 늙은 놈이 머리 하얘 가지고 후배들 걸 빼앗는 거 같아서요. 그만큼 먹고 살았으면 됐지 뭐. 그 대신 일본어 문고판을 사서 일 년에 육칠십 권 정도 열심히 읽었어요. 문고판은 값이 싸니까. 역사 분야를 많이 봤는데 요즈음은 금융관계서적을 보고 있어요. 금융자본주의가 어떻게 세상을 말아먹는지 궁금해서 말이죠. 옵션거래나 선물거래가 어떤 건지도 알아보는 중이죠.”
“30년 이상 하신 변호사를 어떻게 정의하십니까?”
“정말 감사하죠. 내가 했던 시절의 변호사는 밥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던 직업이죠. 그렇지만 지금은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수많은 변호사가 일자리를 얻지 못해 헤매고 있는데 좋은 직업이라고 할 수는 없죠. 이제는 그냥 법률산업 종사자 중 일반직종의 한 분야로 봐야 할 것 같아요. 생각해 보면 그동안 나는 좋은 세상을 살았어요. 우리 때는 개발시대라서 그런지 아파트를 사도 가격이 올랐어요. 예금을 해도 이자가 상당히 붙었고요. 그게 생활의 터전이 되어 먹고 산거죠. 지금도 그걸 아껴 쓰면서 살고 있어요. 내가 돈 버는 재주가 있었던 게 아니라 시절을 잘 만났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지금은 부동산도, 주식도 그런 프리미엄이 없어요. 그러니까 후배들에게 할 말이 없는 거죠.”
그는 자신이 받은 행운을 정확히 알고 감사할 줄 알았다. 가진 것에 만족하는 진짜 부자였다. 다 그렇지는 않다. 나이를 먹고도 더 가지려고 혈안이 된 변호사들도 많다.
“인권문제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해 주시죠.”
“제가 무료변호를 한 살인사건이 있어요. 택시기사가 아내를 죽인 사건이었습니다. 그 무렵 대학교수가 아내를 살해한 사건이 온통 언론에 보도됐어요. 사람은 달라도 두 사건이 구조가 거의 비슷했어요. 그런데 말이죠, 대학교수에 대해서는 부검결과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면 법원이 바로 그걸 받아주고 다시 철저한 조사를 하는 거예요. 또 현장검증도 다시 나가고 말이죠. 그런데 내가 맡은 택시기사에 대해서는 신청을 해도 다 기각을 해 버리는 거예요. 사법부 내에서도 택시기사의 인권과 언론에 보도되는 대학교수의 인권이 다른 겁니다. 보이지 않는 그런 차이들이 점차 없어져 공평한 세상이 돼야 하겠죠.”
맞는 지적이었다. 판사의 시각이 기울고 선입견이 개입되면 그곳이 인권의 사각지대가 되는 것이다. 그가 뭔가 문득 떠오르는 표정으로 이런 말을 꺼냈다.
“얼마 전 젊은 변호사 두 명이 김천에 있는 이범열 변호사의 묘소를 찾아가 선고된 판결문 하나를 놓고 참배를 했답니다. 무슨 내용인가 하면, 이범열 변호사가 생전에 살인사건을 무료변론을 했었대요. 그런데 결국 무죄를 받아내지는 못했지. 그 후에 세상이 바뀌고 그 사건을 젊은 변호사가 다시 맡아 재심을 신청했는데 법원에서는 기록을 다 폐기해 버려서 아무런 내용도 증거도 남아있지 않았었대요. 그런데 이범열 변호사 유족이 당시의 기록과 증거들을 다 보관하고 있다가 젊은 변호사들에게 준 거예요. 돌아가신 이범열 변호사가 살아있을 때 내용들을 필사해 두고 타이핑 해둔 걸 거의 보관하고 있어서 그게 무죄의 결정적인 자료가 된 거죠. 변호사들이 대를 이어서 큰일을 해낸 거죠. 돌아가신 이범열 변호사같은 모습이 과거의 좋은 변호사상에 속하지 않을까요?”
이범열 변호사의 생전모습이 떠올랐다. 1970년대 사법파동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다. 주근깨가 가득한 털털한 얼굴에 막걸리를 마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새로 나오는 젊은 변호사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새로 배출되는 변호사들은 마음의 여유가 없을 게 분명하다.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그로부터 듣고 싶었다.
“여태까지는 변호사들이 스스로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해서 시민에게 다가서지 않았어요. 앞으로는 변호사 전체가 적극적으로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어야 합니다. 작은 일거리라도 찾아서 봉사해야 합니다. 그걸 안하니까 법무사들이 소액사건 하겠다고 하는 거죠. 어느새 다 뺏겼어요. 앞으로는 변호사들이 정치계, 경제계, 정부 어디든지 들어가야 해요. 법학을 한 사람들의 장점은 합리적인 사고입니다. 어떤 조직에서도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인간을 필요로 할 겁니다. 그리고 세상이 넓어진 만큼 변호사가 단번에 여러 분야로 가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럴 때 변호사회를 이용해야 합니다. 봉사활동도 조직적으로 할 수 있도록 협회가 만들어야 하죠.”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넘은 것 같았다. 그가 오후의 다른 회의에 참석하려면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런 말을 했다.
“엊그제 변호사를 하는 친구들 서너 명이 모였다가 우연히 ‘우리가 죽으면 후배변호사가 몇 명이나 문상을 올까?’ 하는 얘기가 나왔어요. 친구들 말이 아마 한명도 안 올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우리 선배변호사들이 대접만 받으려고 했지 후배들에게 베풀지를 않았잖아요? 선배가 먼저 다가가서 등을 두드려 줘야 해요. 이진강 변호사가 변협 협회장을 할 때 선후배간 멘토 맺어주기를 했었는데 지금은 흐지부지된 것 같아요. 선배가 다가서고 자주 만나야 마음이 열리는데…”
그의 말이 마음 속에 잔잔한 파문이 되어 퍼져나갔다. 선후배가 서로 마음을 열고 사랑으로 소통을 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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