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이야기

큰 사건은 큰 로펌으로만 돌아간다. 대구의 어떤 변호사는 한 번의 소송으로 300억을 벌었다고 하고, 누구 누구 변호사는 성공보수로 10억원을 받기로 했다고 하지만, 도대체 그런 사건들이 나한테는 왜 안 오는 것인지, 큰 사건의 연결고리는 어떻게 잡아야 하는 건지 나로서는 알 수도 없었다.
“그래도 부회장님은 예전에 많이 벌어놓으셨잖아요. 새내기 변호사들이 문제가 되는 거죠.” “그러게요. 내년에 로스쿨생들까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면 정말 어떻게 감당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유쾌하게 시작되었던 대화가 갑자기 변호사 밥벌이 문제로 귀착되면서 잠시 테이블 분위기가 싸해졌다.
애써 신경 쓰기 싫어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민 변호사가 고개를 숙이면서 테이블 아래로 서 변호사의 다리를 살짝 건드리는 모습이 보였다. “예? 저요?” 서 변호사가 우물쭈물하는 이유가 질문 때문인지 그녀가 건드린 다리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가 살짝 보여주고 싶어 하던 풍만한 가슴 때문인지 알 수 없었고 갑자기 정신이 아찔했다.
민 변호사는 뽀얀 피부에 어깨까지 내려오는 세미 단발이 단정해보이기도 했지만, 오렌지 빛 조명 아래에서 반짝이는 눈을 보면 무언가 시선을 잡아끄는 섹시함이 있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도톰한 입술을 오물조물 놀리면서 짐짓 무언가 궁금하다는 듯 쳐다볼 때면 내가 남자라도 너무 귀여워서 볼이라도 꼬집고 싶을 것 같았다. “서 변호사님은, 요즘 어때요?” “뭐가요?” “국선 하기 힘들지 않으세요?” 조청 같은 끈적거림이 묻어나는 목소리다.
“누나, 개업하시니까 바쁘시죠?” “그러게. 몸은 바쁘고 돈은 안 되고. 당사자들한테 시달리고. 죽겠다.” “하여간, 엄살은! 참, 누나 인혁이 형하고 친하다면서요?” “인혁이 형?” “네. 국선하는 서인혁 형이요. 중앙에 있는데.” “아, 서 변호사. 뭐, 친하다기보다는. 근데 왜?” “인혁이 형이 우리고등학교 선밴데요. 지난번에 누나 얘기를 얼핏하더라구요.” “그래?” “인혁이 형이 외모는 소탈하게 생겼잖아요? 근데 알고 보면 완전 골드맨이에요.” “골드맨? 킹카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ㅋㅋ. 사실 골드맨은 제가 지어낸 말이긴 한데요. 그 형네 집이 끝내줘요. 그래서 국선한다는 말도 있고!” “그래?” “네. 그 형, 연수원 때 공부도 엄청 잘했어요.” “근데 왜 국선을?” “그게 다 뜻이 있고, 이유가 있는 거예요. 그 형네 아버님이 누군지 아시면 누나는 깜짝 놀랄걸요.” “그래?” “그 형 노리는 사람 많았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유명했거든요.” “그래?”
계속 바보같이 “그래?” 소리만 두 시간 내내 중얼거리다가 돌아온 셈이었다. 지난 조 모임 때 준익이가 들려준 서 변호사에 대한 얘기는 무슨 드라마 속 왕자 스토리처럼 해괴하기만 했었다.
계속해서 조청 같이 끈적거리는 목소리로 한시도 서 변호사에게서 눈을 떼지 않던 민 변호사가 이제는 노골적으로 눈빛을 보내는 것 같다. 갑자기 테이블 밑 그들의 다리가 궁금해졌다. 다시 한번 아래를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너무 구차했다. 구질구질하기도 하고.
경수씨와 헤어지고는 당분간 일에만 전념하리라 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울리던 전화벨 소리가 들리지 않고 무뚝뚝한 문자 메시지가 오지 않으니 가슴 한쪽이 허전했다. 정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인가, 사람은 사람으로 잊으라고 했던가. 유행가 가사처럼 이별을 그려내지는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만, 어쩔 수 없이 문득 문득 그가 생각나는 건 막을 수 없었다. 후회해서도 아쉬워서도 아니다. 그냥 일종의 습관처럼 되어버린 내 인생의 일부가 어디 길거리를 헤매고 있는 느낌 때문이었다.
“이 변호사님도 다음 주 시간 괜찮으시죠?” “네?” 갑자기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드니, 서 변호사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서 변호사님이 다음 주에 서울회에서 하는 청계산 야유회에 같이 가자고 하시는데, 가실래요?” 니가 가는 건 썩 내키지 않으니 알아서 빠지라는 투로 여전히 싱글 싱글 웃으면서 민 변호사가 보충설명을 하고 있었다.
“아, 네. 가죠. 뭐” 뚜껑을 열어 놓은 지 두 시간 쯤 된 사이다를 마셨을 때처럼 밍밍하고 맛없는 표정으로 민 변호사가 실망감을 표하고 있다. “근데 요즘 날씨도 쌀쌀하고 몸도 안 좋은데 야유회를 가도 될지 모르겠어요. 서 변호사님~” 건강이 뚝뚝 넘쳐나 보이는 민 변호사가 갑자기 몸이 안 좋다는 등 헛소리를 하는 걸 들으니 어이가 없었다. “하하, 옷 두껍게 입으시고 오세요. 제가 바람막이 잠바도 빌려 드릴게요.” “진짜요? 와~그래요. 그럼….”
갑자기 민 변호사가 서 변호사의 손을 부드럽게 꽉 잡는다. 정말 가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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