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하는 마음으로 변호사를 하라”

선선한 바람이 부는 12월 1일의 오후 3시다. 나는 삼풍아파트 단지 13동 앞을 걷고 있었다. 꼬마 두 명이 세발자전거를 타고 내 옆을 지나쳤다. 오래된 낡은 아파트 입구는 어두침침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서 내렸다. 두 아파트가 마주 보고 있었다. 나는 501호의 벨을 눌렀다. 잠시 후 회색양복을 단정하게 입은 이진강 변호사가 문을 열어주었다. 어느새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린 노신사의 모습이었다. 이미 칠십을 눈앞에 둔 법조 원로였다. 그의 안내로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아파트를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거실 중앙에 그의 책상이 놓여 있고 앞에 ‘변호사 이진강’이라는 오래된 자개명패가 놓여 있었다.
“여기가 딸아이의 아파튼데 애가 부산에서 로스쿨 교수를 하고 있어서 일주일에 한 번 올라오기도 힘들어. 그래서 내가 사무실로 대신 쓰고 있지.”
아파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주방 쪽 싱크대도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된 듯 물기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파트는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했다. 그가 냉온수기 쪽으로 가더니 더운물을 받아다 다탁에 놓인 녹차 잔에 직접 따랐다.
“비서나 일하는 사람은 안 쓰십니까?”
내가 물었다.
“없어. 난 삼성동 집에서 아침에 출근했다가 저녁에 퇴근해. 낮에는 이 동네에서 변호사들과 점심을 같이 하는 정도고.”
“그러면 이 아파트 청소는요?”
“내가 직접 청소하지 뭐.”
“왜 다시 로펌에 가서 일하지 않으십니까?”
“변협 협회장을 한 사람이 바로 로펌에 들어가 일을 한다는 게 맞지 않는 것 같아요. 들어오라는 권고도 있었는데 안 갔지. 대신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장을 하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거 2년하고 나왔죠.”
둘만 앉아 있는 아파트는 고요했다. 이따금 윗집에서 청소기라도 끌고 다니는 듯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사건을 맡아 처리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떻게 시간을 보내십니까?”
“어린왕자부터 시작해서 생텍쥐페리에 심취해서 그가 쓴 책들을 다 읽었어. 연관돼서 앙드레 지드도 읽고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도 재미있게 봤어. 니체도 공부하고 있어.”
그는 젊은 날 놓쳤던 고전에 심취해 있었다.
“이제 남은 세월 동안 하시고 싶은 일이 뭐죠?”
“예전에 일본변호사연합회 회장을 만나 식사를 한 적 있어요. 그 자리에서 일변연 회장이 하는 말이 ‘저는 가난한 생활을 합니다’라는 거예요. 그분은 욕심을 버리고 소박한 생활을 하면서 남을 돕는 생활을 가난한 생활이라고 표현하더라고요. 저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요. 내게 주어지는 하루하루가 선물이고 축복인데 뭐. 집사람과 둘이 살아요. 아침에 일어나서 동네 산책을 하고 이 아파트사무실로 출근을 하지. 점심에는 변협 협회장 할 때 친했던 사람들과 즐겁게 얘기하면서 밥을 먹고 저녁에는 돌아가서 자. 그래도 아직 남은 에너지가 있다면 봉사라고 할까? 며칠 전에도 신임검사들 앞에서 강연을 하고 왔어. 변협에서도 불러주면 가서 할 거야.”
고려대 법과대학 시절 사법시험에 합격한 그는 22년간 검사생활을 하고 변호사개업을 했다. 변호사 생활 17년도 서울지방변호사회 부회장, 회장 그리고 변협 협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공익활동에 더 바빴던 삶이었다.
“지금 과거를 회상하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사법시험에 합격한 이후 45년이 흘렀어요.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지. 잘못한 게 많다는 생각 때문에 말을 아껴야 할 입장입니다.”
“나중에 오싹하지 않으려면 법조계가 어때야 합니까?”
“법관은 공정해야죠. 그리고 검사는 권한을 자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변호사는 봉사가 기본 덕목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법조 삼륜이 균형을 이루며 나아가야 합니다.”
“요즈음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가 젊은 여검사에게 벤츠 승용차와 명품을 사주고 내연의 관계를 맺은 사건이 벌어져 사회적으로 물의가 일어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요즈음 검찰을 보면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검사가 양적으로도 엄청나게 팽창했고 국민이 검사를 바라보는 시선도 많이 달라졌죠. 내부의 상하관계나 검사 개개인의 직무수행의식도 변한 걸 느낍니다. 예전과는 달리 상당히 자유분방한 것 같더라고요. 나의 경험으로는 검사를 선발할 때 정말 잘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 교육을 잘 시켜야죠. 검사의 책임이 뭔지를 알려줘야 합니다. 검사를 하려면 외롭게 살아야 해요. 아무나 만나서는 안 됩니다. 소수의 일탈한 검사 때문에 검찰조직 전체가 잘못 인식되는 게 아쉽습니다.”
얘기를 변호사 쪽으로 돌릴 때가 된 것 같다.
“요즈음 변호사업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문을 보면 내년부터 쏟아지는 변호사들이 ‘취업대란’을 맞이했다고 하는데 그 소리가 듣기 싫어요. 우선 국민들이 수긍을 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 말 속에는 변호사 자격만 얻으면 삶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으니까요. 왜 변호사만 시험에 합격하면 보장이 되어야 합니까? 그 인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변호사로서 사명감부터 가져야 합니다. 예전에는 극소수의 사람들만 뽑는 사법고시에 합격을 하면 그 자체로 신분이 상승되고 직업이 보장됐었죠. 애를 쓰지 않아도 어느 정도 삶의 수준이 유지된 게 사실이죠. 그러나 지금은 근본적으로 달라졌습니다. 신분이 상승되는 것도 아니고 물질적 보장을 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변호사의 자격만 주는 겁니다. 상황이 바뀐 거죠. 이제부터 출발하는 변호사들은 하나하나 차근차근 쌓아나가야 합니다. 적정 수임료를 받고 사회에 기여하면서 자기의 전공분야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훌륭한 성공한 전문변호사가 되면 그때 가서 대접을 받는 게 맞습니다.”
그가 잠시 말을 쉬었다가 계속했다.
“흔히들 돈을 많이 번 변호사를 성공한 것으로 평가했었는데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성공은 재물을 얻은 게 아닙니다. 변호사의 본분을 지키면서 욕을 먹지 말아야 합니다. 법관이나 검사들로부터 저 사람 일을 잘하더라는 소리를 듣고 의뢰인들로부터는 그 변호사 괜찮다, 믿을만하다 라는 평가를 받으면 그게 성공한 변호사죠. 거창한 게 아닙니다. 변호사는 조력과 봉사가 기본 덕목입니다. 남을 도와주는 거죠. 변호사를 해보니까 봉사의 마음으로 해야 떳떳하고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돈을 쫓아가면 기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어떻게 변호사 생활을 했는지 경험을 얘기해 주시죠.”
“저는 1994년에 변호사 개업을 하고 나서 국선변호사 일을 해 봤어요. 돈을 받고 하는 것보다 훨씬 좋았어요. 마음이 부자가 되는 걸 느낀 거죠. 돈이 없어서 쭈뼛하는 의뢰인에게 공짜로 일해주기도 했어요. 그런데 공짜가 공짜가 아니더라고요. 물론 그 의뢰인이 다른 사건을 소개해주는 건 아니었죠. 그런데도 뭔지 모르게 후에 수임료를 많이 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서 주머니가 채워지는 거예요. 그리고 주변에서도 변론을 열심히 하는 성실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고요. 돈은 자연스럽게 따라와야지 그걸 쫓아가면 돈에 눈이 달렸기 때문에 도망을 간다고요.”
그가 싱긋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변협 협회장을 역임했다. 리더십이 강한 회장으로 평가되고 있다.
“변협 협회장으로 가져야 할 리더십은 어떤 겁니까?”
“똑똑한 수많은 변호사들을 이끌어가려면 내가 먼저 사심이 없어야 합니다. 가식이 아니라 진심을 보여줘야죠. 그걸 봐야 사람들이 따라옵니다. 진심이냐 꼼수냐는 옆에서 다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동시에 법원이나 검찰 정치권에도 할 말을 다해서 앞장서는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합니다. 솔선수범하고 시대의 흐름을 빨리 캐치해야죠.”
“변협 협회장으로 앞장선 경험이 있다면 어떤 겁니까?”
“한화 김승연 회장의 폭행사건이 일어났을 때였어요. 재벌회장이 직접 장갑을 끼고 몽둥이를 들고 사람을 때린 거죠. 경찰과 검찰이 미적대더라고요. 그래서 변협 협회장인 제가 수사를 촉구했죠. 청와대에서 즉각 수사지시가 내려가고 한화 회장이 구속됐어요. 대한변협이 반응을 보이면 엄청난 효과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바른말을 하면 모두들 무섭게 생각해요.”
말을 해야 할 때 침묵하면 그건 사회정의가 아니었다. 그가 계속했다.
“촛불집회가 일어났을 때였어요. 전 청와대에 대고 잘못한 게 있으면 분명히 하고 책임을 지라고 건의서를 냈죠. 그 무렵 민정수석부터 시작해서 청와대의 전면개편이 있었습니다. 한때 종교인이 촛불집회에 대거 참여하려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대한변협 이름으로 성명서를 냈습니다. 제목을 ‘흔들리는 촛불 너머 길 잃은 법치주의를 우려한다’라는 제목으로요. 당장 언론들이 받더라고요. 대한변협은 권력에 대해 말할 때는 무섭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무서운 걸 압니다. 예전에는 대통령이 협회장을 불러 국정을 의논하기도 했습니다. 자기 위치를 지키고 권력에 대해 할 말을 해야 대한변협의 위상이 제대로 서는 겁니다.”
“변협이 자기위치를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큰일을 해야죠. 자질구레한 일을 하면 별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저기 껴서 아무 말이나 하면 국민들은 정부나 권력이 콧방귀도 안 뀐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나설 때 나서야 합니다. 성명서를 발표하려면 아픈 데를 꼭 찌르고 국민이 후련하게 해 줘야 합니다. 대한변협의 권위가 서야 하는 거죠. 그 과정에서 의견수렴을 꼭 했습니다. 지방회장들한테 팩스도 보내고 상임위도 개최했었죠.”
“회장시절 어떤 개혁을 하셨습니까?”
“대한변협이 법조계의 중추적 역할을 하겠다고 제1성을 내놨습니다. 모든 게 법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반기를 들었죠. 법률가대회를 개최해서 학계까지 참여시키고 그 자리에 대통령을 오게 했습니다. 대통령이 참석한다고 하니까 당시 법무부가 자기네가 주도하는 것처럼 행동하기도 하더라고요. 대한변협이 중심이 되어 대법원장, 헌재소장 등이 참여하는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어떤 변화를 주도하셨죠?”
“저항적 인권보다는 생활 인권 쪽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법을 몰라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막자는 거죠. 브런치 시민법률학교라는 걸 개설했어요. 시민을 상대로 매주 화요일 밥도 주고 법상식을 알려주는 활동이었지요. 30~40명의 변호사가 참여해서 두 학기를 진행했었는데 효과가 좋았어요. 초등학생을 상대로 하는 만화도 제작하고요, 그 외에도 해외출장에 대해서도 검소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전의 경우를 보면 비행기 일등석을 이용한 경우가 종종 있더라고요. 해외 세미나도 개회식 때 얼굴만 내밀고 노는 쪽으로 방향을 돌린 경우도 있었어요. 일등석을 타지 않고 그 돈으로 다른 이사들과 함께 나갔습니다. 또 해외에 나가서도 각 세션마다 참석해서 진지하게 공부했습니다. 다른 나라 변호사들을 모아 토론회를 열기도 했었습니다. 그 외 청년특위를 만들어 활발히 활동을 하게 했었는데 요즈음은 지지부진한 것 같네요.”
“최근의 변호사협회에 대해 조언을 주실 건 없습니까?”
“대한변협이 잘 되어가려면 지방회와 갈등이 없어야 할 것 같아요. 요즈음 변협 협회장 직선제 문제 때문에 서울회와 반목이 있는 걸로 압니다. 대한변협은 지방회들의 연합이기 때문에 갈등이 있으면 안 됩니다.”
“변협 협회장의 직선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회장을 할 때도 검토해 보니까 지금까지 해 왔던 간선제는 합리적이지 못했습니다. 대의원 중 서울회 회원이 65퍼센트의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니까 불공정한 게임이었죠. 직선제로 바꾸는 방법을 강구했죠. 제가 회장을 할 때도 지방회들은 직선제로 하자고 하고 서울회는 반대를 했죠. 지방회들은 자신들이 푸대접을 받는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간선제의 불합리한 점을 개선해서 지방에서도 협회장이 나올 수 있도록 하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서울회 회장이 됐다고 해서 반드시 다음에 변협 협회장이 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양보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한변협도 소통을 해야 합니다. 서울회의 회장도 돈의 위력을 대한변협에 행사하면 모두 찌그러지게 됩니다. 제가 서울변호사회 회장을 할 때 로아시아 대회가 있었어요. 그때 변협 협회장이 김창국 변호사였는데 서로 사고나 색깔은 달라도 성심껏 도와드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변호사들의 소통과 화합을 원로로서 강하게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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