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겨울의 냉기가 날카롭던 1995년 2월말경이다. 동아일보의 이수형 기자가 안상운변호사의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가 다짜고짜 한마디 던졌다.
“안 변호사님, 통장 좀 봅시다.”
법조출입인 이수형 기자는 정의파로 통하는 인물이었다. 안 변호사는 책상 서랍을 열고 자신의 통장을 보여주었다. 마이너스 통장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이수형 기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 같이 중얼거렸다.
“왜 통장을 보자고 그래요?”
안 변호사가 이 기자에게 물었다.
“조금 전에 서울지검 부장검사실에 갔더니 글쎄, 안 변호사가 지금 맡고 있는 명예훼손 사건에서 의뢰인인 정 교수한테서 착수금으로 5000만 원이라는 거액을 받았다는 거예요. 소송대상도 안 되는 걸 맡아 거액을 편취하려는 사기꾼이라는 거죠. 안 변호사의 세무자료나 신용카드 사용내역을 확인해 봤더니 탈세하고 룸살롱이나 드나드는 부도덕한 인간이라고 매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직접 확인해 보려고 왔습니다.”
저질의 모략이었다. 소송 상대방인 방송사의 공작이 틀림없었다. 그 방송사에서는 법조기자를 통해 검찰에 악의적인 거짓정보를 흘린 것이다. 언론사의 힘은 전방위로 막강했다. 의뢰인인 정 교수가 있는 학교 총장을 통해 소 취하를 강요하기도 했다. 담당판사는 안 변호사 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얼마 후 방송사는 법원 근처의 옥상건물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판사들의 지각 여부를 시사프로그램을 통해 방송했다. 방송사에서 계속 법원을 괴롭히자 법원행정처에서 방송국 관계자를 만나 무마작업을 시도했다. 변호사가 된 법원행정처 담당 판사가 나중에 안 변호사에게 말해준 얘기였다.
안상운 변호사는 지난 20여 년간 언론의 횡포와 정면으로 맞서 싸운 인물이다. 언론법을 전공했지만 전문가라기보다는 투쟁가의 성격이 더 강하다. 원로 언론인들에게조차 그는 거북한 존재다. 대신 언론의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은 주저 없이 그를 대리인으로 선택한다. 그만큼 그에 대한 믿음은 확고하다.
그를 만나보고 싶었다. 2011년 11월 10일 오후 교대역 13번 출구 앞에 있는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안 변호사는 아직 사무실에 돌아오지 않았다. 직원의 안내로 좁은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작은 방이었다. 긴 탁자를 가운데 두고 의자가 세 개씩 마주 보고 있었다. 구석에는 신문들이 정갈하게 꽂혀 있었다. 조선일보는 ‘괴담의 나라’라는 일면 톱기사를 내보내고 있었다. 동아일보의 일면 톱은 ‘거짓말 블랙홀에 빠진 대한민국’이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무책임한 말들이 떠돌고 있었다. 안 변호사가 외출에서 급히 돌아왔다. 그는 미안하다고 하면서 얼른 탁자 위에 놓인 내 찻잔을 대신 들고 자기 방으로 안내했다. 작은 행동에서 그의 내면이 들여다보였다.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구석에 베토벤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고전음악가의 CD가 보였다. 투쟁일변도의 삭막한 사람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와 소파에 마주앉아 얘기를 시작했다. 그가 먼저 이렇게 입을 열었다.
“변호사나 국민의 아픔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을 대법원장으로 해야 하는데 대한변협에서 판사만 한 분을 추천하는 걸 보고 실망했습니다. 변협이 말로는 개혁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지난번 젊은 나승철 변호사의 지적도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가 대한변협 공보이사인 나를 의식한 듯 따끔한 일침을 놓았다. 그는 민변 소속이고 대변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우리 사회의 좌우파 논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내가 물었다.
“제가 민변 활동을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대한변협에 인권위원으로 지원을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험을 했습니다. 우리 사회를 보면 좌우라는 진영의 논리로 사람들을 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제 생각은 합리적 진보와 개혁적 보수가 공존해야 한다는 겁니다. 떼쓰기 식의 진보는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겁니다. 대안을 제시하면서 책임을 지도록 해야겠죠. 동시에 사회변화를 거부하고 기득권에만 집착하는 사람을 우파라고 한다면 그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꼴통이라는 조롱만 받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저는 이 둘이 공존하지 못하고 적대시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는 사회변화를 넓고 길게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성장배경과 변호사로서 지나온 삶을 얘기해 주시죠.”
내가 말했다.
“신안군에 있는 섬 암태도에서 농협 직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목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를 해서 연세대학교 법과대학에 들어갔어요. 재학시절 학교에 뒹구는 유인물에서 언론기본법 폐지를 자주 봤었는데 그때는 그게 뭔지 잘 몰랐죠. 그러다 동아리에서 세미나가 있었는데 제가 그 발표자가 되면서 언론과 인연을 맺게 됐다고 할까요?”
그는 대학재학 중 우수한 성적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한 인재였다. 어쩌면 그는 타고난 반골기질인지도 모른다. 주위사람들에 의하면 연수원 시절 그는 유일하게 변호사를 지망했다. 대부분이 판검사를 원하던 시절이었다.
“처음부터 변호사를 하려고 결심한 동기는 뭡니까?”
“연수원 시절이던 1986년 봄이었어요. 광주의 YMCA에 들렀다가 권인숙 양 성고문사건에 대한 자료를 보게 됐죠. 그걸 보고 경악하면서 ‘권력의 속성이 이런 거구나’하고 인식했습니다. 검찰과 법원의 시보생활을 하면서 그곳에 가면 어떨까 하는 마음도 조금은 있었는데 관료체계 속으로 들어가면 어쩔 수 없이 매몰될 것 같았죠. 그 무렵 저는 틈틈이 소설 태백산맥이나 장길산 같은 것들을 읽고 있었습니다. 권력에 저항하는 쪽을 택하기로 한 겁니다. 그래서 연수원을 수료하고 바로 변호사를 시작했죠.”
“병아리 변호사시절 생활을 얘기해 주시죠.”
“일 년간 국회의원 변호사 사무실에 취직해 실무를 익혔습니다. 그리고 1988년 서소문에 있는 빌딩의 옥상 열 평을 빌려 사무실을 차렸죠. 엘리베이터도 없었어요. 당시만 해도 구치소 접견은 물론이고 법원에서 서증조사나 현장검증이 많았어요. 차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죠. 몇십만 원짜리 고물차를 사서 직접 운전하고 다녔습니다. 20대 젊은 변호사니까 찾아오는 의뢰인이 없었습니다. 3년간은 가까운 사람조차 사건을 맡기지 않더라니까요. 저 스스로 시국사건을 찾아다니며 선배변호사들의 말석에서 무료변론을 시작했죠.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안기부로 접견을 갔을 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아침에 가서 변호사 접견신청서를 제출하면 오후가 될 때까지 감감무소식이에요. 그렇게 늑장을 부리면서 변호사들을 골렸어요. 항의하고 난리를 치면 그제야 마지못해 피의자를 만나게 해 주는 겁니다. 그런 자리에서는 안기부 수사관들이 여러 명 죽 함께 있었죠. 그들은 변호사가 접견하는 장면을 촬영해 수사기록에 첨부해서 법정에서 진술의 임의성을 보강하기 위한 증거로 악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을 보면서 권력에 대한 사법적 감시와 통제는 변호사들의 몫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경찰을 상대로 소송도 많이하셨던데요?”
그는 미란다 원칙을 준수하지 않은 사실을 불법행위로 보고 위자료를 청구해서 100만 원을 주라는 대법원의 확정판결을 이끌어냈다. 뿐만 아니라 북한이탈주민이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판례도 얻어내고 국적법에 대한 위헌결정을 두 번 받아냈다.
“미란다 원칙에 관한 민사판결이 신문에 보도되니까 당장 효과가 있더라고요. 일주일 후 경찰에 가보니까 형사들이 미란다원칙을 고지하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연히 군 수사기관으로 현역병의 접견을 갔더니 거기서도 진술거부권을 사병에게 알려주고 있었어요. 오히려 그 실행이 가장 더딘 부서는 검찰청이었죠. 변호사의 역할이란 시민과 권력과의 중간에서 그 균형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죠.”
“언론의 횡포에 대해 눈을 돌린 건 어떤 계기였죠?”
“국가권력의 횡포가 줄어들고 민주화가 이루어졌어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언론의 보도태도는 권위주의 정권 시절과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어요. 전에는 기자들이 진실을 보도하고 싶은데도 권력이 그걸 막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언론사들이 다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어요. 언론기본법이 폐지됐는데도 여전한 느낌이 들었죠. 특정언론사는 자기들이 대통령도 만들 수 있다는 교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재판도 받기 전에 수많은 사람이 언론재판에 의해 죄인이 되어 버리는 현실을 목격했습니다.
1989년 3월경이었죠. 방북했던 문익환 목사가 베이징에 도착해서 외신기자들과 회견을 했는데 다음날 신문을 보니까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취지로 기사제목을 뽑은 거예요. 진실은 그게 아니라 감옥에 들어가기 싫다는 뜻이었어요. 문 목사의 아들 문성근씨가 문제 제기를 해 달라고 부탁을 했었고 제가 다른 변호사와 함께 정정보도와 승소판결을 이끌어 냈죠.”
“일반인의 경우는 물론이고 변호사들도 언론사와 싸우기를 꺼리는데 의뢰인들의 태도가 어땠나요?”
“언론에서 때리면 아파도 참을 거냐 아니면 끽소리라도 해볼 거냐의 선택이죠. 진실이 여럿 있을 수도 있는데 주요언론사들은 자기들 생각만이 진실이고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독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서 독자들하고 인식의 차이가 생기고 그 갭이 점점 커지는 것 같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송을 하기 전에 물어보는 게 나중에 보복당하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변호사인 저 역시 언론에 의해 감시당하고 보복을 받았으니까요.”
그는 집중적인 세무조사를 받았던 씁쓸한 경험들을 내게 얘기해 주기도 했다. 그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제가 한 교수의 언론소송을 맡고 있었어요. 그랬더니 상대방 언론사는 그 교수가 있는 재단과 총장에게 압력을 넣어 소송의뢰를 취하하게 하는 공작을 하더라고요. 기자 한 명이 교육부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현실을 봤습니다. 민주화는 국가권력에 대해서만이 아닙니다. 언론권력도 시민과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는 보통의 변호사들이 보지 못한 세계를 몸으로 경험한 것 같았다. 그가 계속했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는 시위가 주종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합법적인 틀 안에서 법률과 논리로 각종 권력에 대한 견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변호사운동을 주장하는 입장입니다.”
“변호사 운동이라뇨?”
“세상은 변호사가 돈만 밝힌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불신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형 로펌에 들어가 많은 보수를 받는 게 성공의 기준이 될 수도 있습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큰 로펌의 경우 수임료도 비싼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변호사들이 자기가 노력한 만큼만 돈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의뢰인이 만족한 정도에 따라 보수를 받는 게 정당하겠지요. 국민들에게 수백만 원 수천만 원이면 아직도 부담이 되는 액수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의 시민운동을 보면 그곳은 법의 사각지대였고 법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합법적인 틀을 벗어나 사회변혁을 이끌어내려는 시도였습니다.
시대가 점점 바뀌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시대변화에 맞추어 변호사가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변호사가 의미 있는 활동을 하기에 따라서는 이 사회에서 판검사가 할 수 없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거죠. 그게 제가 추구하는 변호사운동의 방향입니다.”
“언론분쟁에 관해 전문가로 평가되는데 그 길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앞으로 나올 새내기 변호사들을 위해 물었다.
“변호사가 돼서 사건을 해보면 관심 있고 잘할 수 있는 분야가 각자 있을 겁니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전문가의 길이 상대적으로 열려 있습니다. 당장 돈은 안 된다고 하더라도 수업료를 내는 셈 치고 한 가지 분야에 파고들 필요가 있는 거죠.”
그는 지금까지 23년 동안 줄기차게 외길을 걷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나이를 먹을수록 무력감이 드네요. 패기도 없어지고 말이죠. 이대로는 오래가기가 힘들구나 생각이 들어요. 새로운 공부를 모색해 보기로 했습니다. 금년에 책을 두 권 냈습니다. NGO의 설립과 운영에 관한 것이죠. 내년에는 정보공개법에 관한 책자를 내려고 합니다. 시간이 되면 그동안 해왔던 인권이나 언론사건을 대중 서적으로 쓰려고 합니다.”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