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약자 위해 투쟁하는 게 변호사의 사회정의”

2011년 2월 20일 겨울 파도가 밀려오는 해운대의 한 호텔 세미나 장에서 그곳에 모인 한국변호사들을 향해 예순이 훨씬 넘은 일본인 변호사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일본 야쿠자들의 사채를 보면 연간 1000퍼센트, 1만 퍼센트의 이자를 받아냅니다. 돈을 열흘만 빌려도 40~50퍼센트의 이자를 받습니다. 이런 야쿠자들의 사채는 경찰도 단속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채에 걸려든 사람들은 빈민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결국 칼로 손목을 긋기도 하고 수면제를 먹고 죽음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일본 역시 우리와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도 조폭의 사채업이 곳곳에 뿌리를 뻗고 있었다. 작달막한 키의 일본인 노 변호사는 오래된 듯한 푸른색 정장에 하얀 와이셔츠를 단정하게 받쳐 입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서는 검소하고 반듯한 느낌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오랫동안 야쿠자에 대항해서 싸워온 변호사였다. 그는 일본 변호사업계에서는 존경받는 신화같은 존재라고 했다.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화차’에 나오는 변호사는 그를 모델로 한 것이라는 소개였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책도 여러권 썼다. 대부분은 폭력단의 검은 사채로부터 빠져나오는 방법들을 기술한 것들이었다. 또한 변호사가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하는 내용을 적은 변호사 수신서 비슷한 책도 있었다. 개인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면서 빈민운동을 했던 그는 2010년 2월 5일 3만 명 변호사의 대표를 뽑는 일본변호사연합회 회장선거에 출마해서 치열한 선거전을 치렀다. 그는 일본 전국 52개 변호사회 중 46개 지방회에서 최다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당선된 이후 그는 50회 이상 변호사들을 이끌고 정부청사까지 도보시위를 벌였다. 시민단체가 하는 일들을 일본변호사연합회가 끌어안게 한 것 같았다. 도대체 작은 체구의 어디에서 폭력단과 맞설 용기가 나왔을까 의문이었다. 일본에서의 사채놀이가 마땅치 않게 되자 야쿠자들은 한국의 조직폭력배를 앞세워 한국의 사채시장을 점령하려 한다는 것이다. 우쯔노미야 변호사는 야쿠자의 한국진출을 막으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그는 내용이 풍부한 사람 같았다.

부산에서 그를 본지 일곱달이 흐른 지난 9월24일 제주도의 한 콘도 로비라운지에서 개인적으로 그를 만났다. 한일법조지도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그가 한국으로 온 것이다. 일정에 바쁜 그를 억지로 잡아놓고 인터뷰를 요청했다. 훌륭한 변호사의 형태는 국경을 초월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일반적인 질문부터 던졌다.
“일본사람들의 장인정신은 어디서 왔습니까?”
일본인들의 대를 잇는 치열한 직업의식은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었다. 글이라는 것만 해도 그렇다. 우리는 자기 직업을 가지고 여가가 날 때 취미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일본작가들 중에는 목숨을 걸고 평생을 글에 전념하는 경우가 많았다. 목숨을 걸고 하는 일과 심심풀이로 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그 본질을 알고 싶었다. 그가 침착한 표정으로 생각하다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일본은 섬나라였고 토지가 척박해 살기 힘든 곳입니다. 그런 곳에서 살아남으려면 목숨 걸고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일본의 정신에는 그런 환경과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 환경이다. 거기서 오늘날의 IT 강국이 나타난 것인지도 모른다.
“일본소설 ‘화차’에 나오는 주인공의 모델이시라고 하는데 어떤 내용입니까?”
내가 물었다. 어쩌면 그는 변호사들의 멘토일지도 몰랐다.
“폭력단의 사채를 쓰고 파국을 맞는 신용불량자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를 도운 칠십 대 노 변호사의 모습을 묘사한 내용입니다. 그 변호사의 눈을 통해 사채를 쓰면서 빈곤으로 떨어지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세상에 고발하는 거죠. 드라마로도 만들어졌었습니다.”
얼핏 우리 사회를 들끓게 했던 ‘도가니’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장애학생에 대한 성폭력과 사회의 냉담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를 형상화한 공지영씨의 소설이 원작이었다. 나는 그에 대한 자료를 들춰 보면서 물었다.
“우쯔노미야 사건첩이라는 책도 내셨는데 내용은 뭡니까?”
“사건을 하면서 보낸 저의 변호사 인생을 적은 책입니다. 그 안에는 지하철에 사린가스를 뿌린 옴진리교의 교주에 대한 사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는 인권변호사로 굵직굵직한 사건을 많이 맡았다. 지하철 사린가스사건 이외에도 도요타상사사건, 오렌지 공제사건, KKC사건, 니치에이사건, 상공펀드사건 등이 적혀 있었다. 옴진리교의 간부에게 살해된 사카모토 변호사의 아내가 그의 사무실에 근무한다고 했다. 본격적인 질문을 할 때가 됐다.
“평생을 변호사 생활에만 전념하셨는데 변호사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내가 정중하게 물었다. 그는 도쿄대학시절인 1968년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1971년 변호사등록을 했으니까 40년 이상을 변호사로 활동해 온 셈이다.
“그거 상당히 어려운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가 잠시 후 이렇게 대답했다.
“일본 역시 변호사규정을 보면 사회정의와 인권을 위해 변호사가 일을 해야 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변호사생활의 본질은 사회정의라고 대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조심스러운 겸손한 대답이었다.
“말씀하시는 사회정의란 무엇입니까?”
내가 더 파고 들어갔다. 선문답으로 끝낼 수는 없었다.
“제 생각으로는 사회적 약자를 위해 권력이나 재벌과 투쟁을 해 주는 게 변호사가 추구해야 할 사회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공식적인 변호사단체의 대표치고는 특이한 대답이었다. 어느 나라나 변호사협회의 장은 경력 좋고 부유한 변호사가 가지고 싶어 하는 명예직이었다. 권력과 적절한 밀월관계를 유지하면서 장관급의 자리에 오르거나 의회로 가는 발판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의 나침반은 반대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것 같았다.
“약자를 위한 투쟁이 사회정의라는 신념은 어디서 온 거죠?”
내가 물었다. 아픈 체험이 동반되지 않으면 관념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건 또 다른 위선이기도 했다.
“배경에는 먼저 제 태생이나 어린 시절의 자란 환경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태어난 에히메현의 고향 다노하마우라는 생활의 반은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고 반은 밭에서 농사를 짓는 곳이었죠. 아버지는 전쟁 상이군인으로 오른쪽 다리에 장애가 있었죠. 제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열 살 무렵에는 가족 모두 오이타현으로 이주한 가난한 개척 농가였죠. 나무를 베고 보리를 심었어요. 수박과 귤 농사도 했죠. 일본사회는 우리 같은 가난한 농민과 근면한 노동자가 만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짓밟는 존재가 폭력을 동반한 악덕 고리대금업자인 겁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협박하고 착취해서 죽게 만들기도 하고 홈리스로 전락하게 합니다. 가난의 원인을 결코 그들의 게으름으로 매도해서는 안됩니다. 선량한 약자들을 짓밟는 존재들에 대항해서 싸우는 게 변호사의 소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본의 경우는 리먼쇼크 이후 노숙자가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그걸 방치하는 사회에 저항하는 네트워크를 구축했습니다. 히비야에 해고된 노숙자촌과 파면된 노동자촌을 만들었습니다. 제가 싸우는 대상은 새로 나타난 빈곤을 퇴치하는 운동입니다. 이걸 보세요.”
그가 자신의 양복깃에 달린 하얀 배지를 보여주었다. 해바라기 모양의 은색 변호사 배지 아래 ‘반 빈곤(反 貧困)’이라는 글씨가 박힌 배지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그의 행동은 이미 변호사를 넘어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건 변호사보다는 혁명가나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영역에 더 가깝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도 가난한 사람은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다는 속담이 있다. 그가 빈곤퇴치운동을 벌인다는 게 얼핏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의 빈곤퇴치운동이란 혁명가들의 공허한 구호 같기도 했다. 그가 침착해 보이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제가 도쿄대학교 법학부시절 학생운동이 붐을 이루었습니다. 그때 기숙사에서 토론을 하다보면 사회주의자들 중에는 도시 출신이고 유복한 사람들이 많았어요. 저같이 개척농민 출신으로 고생을 해보지 않은 그들이 주장하는 사회주의란 게 과연 뭘까 의문이었죠. 그들의 주장은 현실과 괴리된 관념의 유희였고 좌익엘리트주의였어요. 저는 관념론자인 그들보다 변호사가 되어 현실에서 뜻을 이루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변호사가 됐죠.”
“처음부터 그런 뜻을 세운 겁니까?”
의문이었다. 인간은 이기적이고 성악적인 요소도 있다. 사회정의를 부르짖지만 변호사가 되려는 실질적인 동기 중에는 잘살고 싶은 욕망이 똬리를 틀고 있다. 욕심이 바위같은 현실에 부딪치면서 파괴되어 좋은 변호사가 되기도 하고 더욱 악덕변호사로도 변질이 됐다. 인도의 변호사 간디도 처음에는 런던의 피카디리가에서 맞춘 고급양복에 금 시곗줄로 멋을 내고 일등칸을 애호했다. 그러다 일등기차 칸에서 쫓겨나고 마부에게 얻어맞으면서 사회의식이 싹튼 것이다. 처음부터 신적인 존재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이 일본인 변호사의 처음은 어떤지 궁금한 것이다. 그의 얘기가 계속됐다.
“저 역시 도쿄대 법학부시절에는 관료가 되거나 대기업에 가고도 싶었습니다. 돈을 벌어서 장애가 있는 부모님께 효도를 하고 싶었으니까요. 주변의 친척들도 정말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가난을 벗어나고 싶었던 거죠. 변호사가 돼서 법률사무소에 취직을 했다가 두 번이나 해고를 당했습니다. 영업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제가 시골 출신이라 그게 없다보니 목이 잘린 겁니다. 못나가는 변호사였죠.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해고를 당하니까 변호사를 때려치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우연히 마주치게 된 게 사채를 썼다가 야쿠자에게 걸려들어 사회의 밑바닥으로 추락한 사람들입니다. 자살하는 사람들도 봤어요. 그 사람들은 돈이 없으니까 어느 변호사도 사건을 맡아주지 않는 겁니다. 더구나 상대방이 폭력조직이니 누가 맡으려고 하겠습니까? 저야 그때 해고된 변호사니까 이판사판이고 시간이 많았죠. 그리고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기도 했어요. 법률사무소에 고용되어서는 그런 사건을 못합니다. 그런 걸 하면 나가라고 하니까요. 그래서 나 혼자 법률사무소를 개설하고 그런 사건에 전념하게 된 겁니다.”
그에 대한 기록을 보면 1983년 우쯔노미야 겐지 법률사무소를 개설했는데 그게 후에 도쿄시민법률사무소로 변경된다.
“찾아오기 시작한 사채피해자들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내가 물었다. 사채를 쓰는 사람들 역시 인생막장이 분명할 것 같았다.
“허름한 옷에 눈이 충혈되어 오는 경우가 많았죠. 찾아오는 사람들의 반은 사채를 쓴 원인들에 대해 거짓말을 하기도 했어요. 어떤 사람은 108개의 사채업소에 1억3000만 엔의 빚을 진 경우도 있었죠. 빚진 금액이나 과정, 배경을 과대포장하기도 했어요. 좋은 변호사인지 나쁜 변호사인지 시험해 보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구요. 변호사를 해보면 의뢰인들이 시험을 해봐서 신뢰가 가야 진짜 얘기를 하죠.”
“그들의 소송의뢰를 받아 어떻게 하셨습니까?”
우리도 배워야 할 사항이었다.
“야쿠자들의 사채에 대해서 이자는 물론이고 원금조차도 갚을 필요가 없다는 판례를 이끌어냈죠. 법상 원금은 갚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판결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았습니다. 홈리스가 된 사람을 생활보호대상자로 만들어주는 일도 했습니다. 관청에 가서 신청을 할 때 입회를 해주었죠. 그리고 네트워크를 만들어 의회에서 약자를 위한 법안을 만들도록 조직적인 투쟁을 벌이기도 했고요.”
“개인 변호사로 거대한 야쿠자조직과 투쟁을 해오셨는데 위험한 일을 당하신 적은 없습니까?”
“왜 없었겠습니까? 매일같이 폭력단으로부터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을 받았죠. 아직까지도 압박을 받고 있는 입장이죠.”
“사채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사건을 처리하면서 내린 결론이 있다면 어떤 걸까요?”
내가 물었다.
“거기서 빈곤이라는 사회문제를 본 겁니다. 세상사람들은 가난하다고 하면 나태나 도박을 떠올리는데 현실에서 보니까 근면성실한 사람이 홈리스가 되어 바닥에 처박히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건 그 사람의 책임이 아닌 거죠. 제가 보니까 사회적 강자나 경제적 강자는 인권을 스스로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약자는 스스로의 인권마저 지킬 수 없는 게 우리 사회였어요. 바로 거기에 변호사가 할 역할이 있는 겁니다.”
중요한 지적이었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소송을 맡아서 하다보니 특이한 걸 발견했습니다. 겉으로는 조직폭력배인 야쿠자가 사채를 놓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 이면에는 경제적 강자들이 숨어있는 겁니다. 대기업이나 금융권으로부터 사채시장으로 돈이 흘러 들어가는 걸 알았습니다. 정부는 그런 사실들을 모르는 척 방관하고 있구요.”
우리의 경우도 서민의 피를 싸낸 그런 돈들이 정치권과 관료 재벌에게 들어가고 있다. 그의 말은 마치 우리의 현실을 아프게 지적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가 계속했다.
“저는 국민들의 피를 짜내는 조직적인 부정부패의 연결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변호사 혼자 소송을 통해 해결할 일은 아니었죠. 저 나름대로 그런 부정부패에 대항하는 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일본내 사회적 경제적 약자에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소수민족과 재일한국인들도 있습니다. 그들을 짓밟는 단체나 방관하는 정부와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일반시민들로부터 모금운동도 벌였죠.”
“그렇게 거대한 사회운동의 지도자가 됐을 때 재벌로부터의 유혹은 없었습니까?”
내가 물었다. 한국의 경우도 시민운동가가 재벌로부터 뒤로 여러가지 도움을 받아 말썽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걸 묻고 싶은 것이다.
“있었습니다. 큰 은행에서 고문을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죠. 그렇게 되면 자문료가 많이 들어와 수입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거절했습니다. 그 은행이 사채시장에 돈을 풀고 있는 걸 알았으니까요. 그 보다 저를 따르는 사람들의 신뢰를 배반할 수 없어서 거절했습니다. 제 경우 폭력단체나 극우단체 그리고 은행이나 대기업에서 의뢰하는 건 지금도 맡지를 않습니다.”
“돈이 나올 만한 곳을 그렇게 다 거절하시면 어떻게 살아갑니까? 변호사와 돈과의 관계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의 금전관이 궁금했다.
“제 경우 두 번째 해고당할 때 변호사를 그만둘까도 생각해 봤습니다. 그때 변호사에게 돈이 뭔가를 숙고해 봤죠. 변호사는 누군가 불행해져야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었어요. 그게 싫었죠. 거기서 저는 작은 수입으로 먹고 살더라도 세상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청빈하게 살겠다는 서원인 것 같았다. 그 청빈의 정도가 궁금했다.
“작은 수입으로 만족한다는 건 일본 사회에서 어느 수준의 생활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어요?”
“제 경우는 학생들이 사는 맨션에서 한동안 살았어요. 저뿐 아니라 그게 보통 변호사들의 생활상이기도 하죠. 저는 로스쿨에 가서 학생들에게 강연할 때 돈을 벌고 싶으면 변호사를 하지 말고 사업을 하라고 권합니다.”
“모든 변호사가 성자같이 살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사람마다 인생관이 다를 수 있는 것이다.
“물론입니다. 일본의 경우도 3만 명의 변호사가 각양각색입니다. 그러나 변호사사회의 중심이 되는 리더만은 청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변호사협회 임원을 돈을 따라가지 않는 사람들이 모이도록 했습니다. 봉사하고 헌신하는 변호사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같이 가난하고 능력이 없는 변호사를 전 일본변호사연합회 회장으로 뽑아준 뜻은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변호사와 권력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물었다.
“변호사는 인권옹호에 그 사명이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숙명적으로 권력과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긴장감이 없는 변호사회나 변호사는 있을 수 없는 거죠.”
변호사회는 야성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권력에 머리를 굽히면 관변단체의 하나쯤으로 전락한다. 인터뷰를 마칠 때가 된 것 같다. 그를 수행해서 온 여성 일본변호사가 옆으로 와서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다. 다른 일본변호사들이 회장인 그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떠나기 전에 그가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더니 이런 질문을 던졌다.
“변호사와 법비(法匪)의 차이를 압니까?”
법비란 법을 이용하는 도둑놈이라는 뜻 같았다.
“뭡니까?” 내가 되물었다.
“대기업의 고문을 하면서 법령을 준수하지 않고 어떤 사실을 은폐시켜 주거나 탈법을 하면 법도둑놈이지 변호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법비는 되지 말아야겠죠.”
한국의 변호사들에게 던지는 뼈있는 말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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