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들의 상황·고통 대변하는 변호사단체 바란다”

몇 년 전이다. 블로그를 통해 한 사법연수원생이 내게 자신의 고민을 보냈다. 변호사를 하려고 하는데 앞이 캄캄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자신의 의지를 시험하기 위해 번지점프를 해 봤다고 적어 보냈다. 그 정도의 용기라면 뭘 해도 성공할 것 같아 나의 쓰라린 변호사 시절을 담은 책을 선물로 보냈었다. 그리고 그는 망각 속으로 사라졌다.
작년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 선거 때였다. 아직 앳된 티가 남은 삼십대 중반 쯤의 젊은 변호사가 가슴을 파고드는 금속성의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여성변호사가 임신만 해도 쫓겨나는 로펌에 과연 노동법이 존재하냐며 문제를 제기했다. 나는 변호사가 이제 노동자의 위치일 수 있구나 하고 자각했다.
보수적인 변호사 사회에서 병아리 변호사의 회장 당선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변이 생겼다. 갑자기 돌출한 그의 당선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기겁을 한 보수층의 불끄기 작전으로 그는 26표라는 아슬아슬한 차이로 낙선했다. 놀란 서울회는 급히 규칙을 개정해 청년변호사의 피선거권을 일정기간 제한했다.
금년 초 청년변호사들이 대검찰청 앞에서 시위를 했다. 모래알같다는 변호사 사회에서 이례적인 일이었다. 현장에 가 보았다. 작달막한 덩치의 젊은 변호사가 현장을 주도하고 있었다. 선거와 시위를 배경으로 30대 무명의 나승철 변호사가 혜성같이 나타났다. 나중에야 그가 번지점프를 했다고 내게 연락을 했었던 사법연수원생인 걸 알았다.
늦더위가 맹위를 떨치던 지난 8월 27일 토요일이었다. 서초역 근처에 있는 냉면집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쉬는 날 모처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기로 했었다.
“번지점프를 할 때 어땠어요?”
내가 물었다. 나는 그럴 용기가 없다.
“죽지 않을 줄 알아도 떨어지는 순간은 철렁하던데요.”
“변호사를 해보니까 어때요?”
“사법연수원 시절 공익소송을 하는 변호사들의 모임인 공감에 1호 시보로 가서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저도 그런 일을 해보고 싶었죠. 연수원을 마치고 법무법인에 들어가 일을 배웠습니다. 예전에는 국가권력에 대해 인권을 지키는 게 중요했다면 이제는 개인의 재산권이 대기업에 의해 침해되는 걸 막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거기서 일년 정도 상담이나 준비서면을 쓰는 걸 배우고 법률사무소를 차렸죠.”
“독립해서 변호사를 해보니까 어떻습니까?”
최근 청년변호사의 실태를 알고 싶었다.
“지난달에 8800원 벌었습니다. 그것도 송달료가 반납된 게 통장에 들어와 있더라고요. 그래도 제 경우는 괜찮은 편입니다. 사무실을 차리고 처음에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뚝 끊기기도 하고 어쩌다 또 사건이 들어옵니다. 그런데 1~2년 차이밖에 나지 않는 후배변호사들은 절망적입니다. 이러다가는 변호사 사회도 치과의사같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내가 되물었다.
“환자들을 끌어 모으는 코디네이터가 운영을 하는 의원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마케팅을 담당하죠. 치과의사들은 그들의 노예가 되어 지시하는 대로 신경치료하라고 하면 하고 임플란트를 하라면 합니다. 돈을 목적으로 하니까 과잉진료가 되는 거죠. 치과의사들이 많이 나오면 의료비가 저렴해 질 걸로 생각했지만 반대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변호사들이 쏟아져 나오면 그렇게 될 걸로 생각합니다. 사건을 만들어야 먹고 사니까 앞으로 브로커한테 고용된 젊은 상어변호사들도 많이 탄생할 걸로 저는 봅니다. 그 사람들이 국민들을 물어뜯고 배가 고프면 선배들도 공격을 하겠죠.”
“현재 청년변호사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상당한 괴리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솔직히 젊은 변호사 중에는 선배변호사들한테 착취당한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같은 변호사이고 선배가 아니라 고용주라는 생각이죠. 한번 현실을 보십시오. 고용변호사로 들어가도 계약서를 쓰는 곳이 없습니다. 첫 달이 지나서야 비로소 자기의 연봉이 얼만지 아는 게 현실입니다. 휴가도 없습니다. 야근이 일상입니다. 여성변호사들의 경우에는 임신이나 출산을 하면 사무실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퇴직금조차 없습니다. 이런 상황이면 스스로를 근로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이제는 변호사란 자격만 공통될 뿐이지 선배변호사들과는 전혀 다른 생각과 성향의 젊은 층이 탄생한 겁니다. 젊은 변호사들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데 선배변호사들이나 협회와는 소통이 안 되는 겁니다. 이미 돈을 벌어놓고 안정을 찾은 선배변호사들은 전혀 우리 같은 젊은 변호사의 사정을 모르고 알려고조차 하지도 않죠.”
그는 선거 때 그런 청년변호사들의 공통의 분노와 증오를 끌어 모았는지도 모른다.
“그에 대해 해결방안을 모색해 봤습니까?”
“저와 함께 일하는 청년변호사들이 전·현직 변호사단체 임원들을 만나 여러 사정을 얘기해 봤습니다. 소통이 안 되는 것 같아요. 특히 서울회 쪽에서는 저를 그저 다음 번 회장에 출마하려는 사람으로만 인식하고 깎아내리기 바쁜 것 같았습니다. 서울회 임원 중 한 분이 로스쿨 교수를 만나서 저를 로스쿨을 반대하는 이기적 집단의 주체쯤으로 매도하고 있다는 걸 전해 듣기도 했습니다. 선배의 행동이라고는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연수원 출신들이 더 대접받아야 한다는 그런 좁은 이기주의를 대변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로스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나도 그를 오해했던 점이 있었다.
“로스쿨 쪽에서 많은 오해를 받기도 하고 평소 친했던 사람들마저 멀어졌습니다. 일부에서 제가 진정으로 얘기했던 취지를 묘하게 굴절시켜서 끌어내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주장한 건 그게 아닙니다. 돈 있는 사람들만 변호사가 되는 그런 제도가 돼서는 안 된다는 거였습니다. 바닷가 바위에서 바지락을 까서 공부시킨 부모가 있습니다. 또 치킨 집에서 닭을 튀기면서 아들을 법조인으로 만든 부모가 있습니다. 고시제도였기 때문에 그게 가능했던 겁니다. 그 부모들이 엄청난 등록금과 학비를 어떻게 댈 수 있겠어요? 당장 제가 다니던 법대 교수님이 분노해서 저에게 말씀해 주신 게 있습니다. 법대에서 분필 하나면 다 가르칠 수 있는데 도대체 왜 그렇게 학비가 비싸냐는 거죠. 제 말은 그런 뜻이었습니다.”
그의 열정적인 반론이 계속됐다.
“검찰이 로스쿨 원장의 추천을 받아 검사를 임용하는 방안만 해도 그렇습니다. 저는 좋은 품성의 원장이면 추천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꼴통이 원장으로 앉을 때의 폐해를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시스템이 제대로 되려면 이상한 사람이 원장으로 앉아도 최소한 중간은 갈 수 있게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부패한 인간이 앉아서 검사직을 아무에게나 시키는 걸 얘기한 겁니다.”
변호사 사회도 이미 기득권층과 쏟아져 나오는 신참 변호사연수원 출신과 로스쿨 출신 등 여러 가지로 나눠지는 것 같았다. 그가 얘기를 계속했다.
“저는 어머니가 약사인 평범한 가정에서 원만하게 자랐습니다. 다만 어머니의 직업 때문에 기억이 나는 건 약사회에서 밤 9시면 모든 약국이 문을 닫아야 한다는 통지가 내려왔던 적이 있어요. 젊은 약사들은 한밤중에 박카스 한 병이라도 팔아야 하는 처지인데 기득권을 가진 약사들은 젊은 약사들이 밤에 장사를 하는 게 배 아픈 거죠. 그런 건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젊은 변호사들을 대표하는 사람이 회장으로 나오는 걸 뿌리부터 잘라버리는 규칙개정을 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 번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 선거 때 회장 후보들이 모두 청년변호사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선거가 끝난 후에 그들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그 문제에 대해 뭘 하는지 의문입니다. 회장이 되지 않더라도 청년변호사 문제를 계속 끌어안고 고민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변호사협회의 활동에도 의문이 많습니다. 의뢰인을 등쳐먹는 악덕변호사에 대한 정보제공을 변호사협회에서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여과작용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법조인명부도 법률신문이 아니라 대한변협에서 만들어야 합니다. 국민에 대한 변호사의 정보제공만 해도 그렇습니다. 대한변협에서 못하니까 로마켓이라는 회사가 나와서 변호사들의 인적상황이나 사건 수임 수 등을 파악해서 점수화하지 않았었습니까? 시대가 달라졌는데 변호사협회는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로펌에 취직해 있는 청년변호사들에 대한 근로기준법 준수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일 년에 한 번만이라도 20대 로펌에 대한 문제를 변협에서 실태조사를 해서 발표만 하면 절대 그렇게들 못할 겁니다.”
변호사 초년생인 그는 선거운동 과정을 거치면서 변호사 업계에 대해 눈이 열려 있었다.
“선거과정에서 어떤 걸 보고 느꼈습니까?”
“당연히 조직도 없고 자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 주위에 스무명 가량의 변호사님들이 모였습니다. 그동안 제 언행을 보고 도와주시려고 한 거죠. 제가 직접 알던 분은 없었습니다. 그 분들의 격려로 용기를 얻어 출마하고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변호사란 직업이 화려한 걸로 생각했는데 돌아다녀보니까 정말 그게 아니었죠. 북부와 동부법원 쪽에 정말 열악한 사무실들이 많은 걸 봤습니다. 초라한 건물에 변호사 사무실이 있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변호사는 없고 허름한 난로 주위에서 불을 쬐고 있는 모습도 봤습니다. 변호사는 없고 직원이 인터넷만 하고 있기도 하더라구요. 어떤 건물은 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화장실냄새가 확 끼치는 곳도 있었어요. 청년변호사뿐만 아니라 힘든 변호사들의 현주소를 본 거죠. 여성변호사분들도 저에게 많이 와서 열악한 환경을 알려주셨어요.”
“조금 전에 그동안의 활동을 보고 변호사들이 모여 도와줬다고 하는데 변호사를 하면서 어떤 일을 했죠?”
내가 물었다.
“변호사를 하면서 보니까 여러 문제가 있는데 모두들 말하기를 꺼리는 겁니다. 로스쿨 시험문제가 발표됐는데 제가 보니까 대입수능의 ‘법과 사회’수준보다도 못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공인중개사 시험보다도 쉬운 것 같았어요. 변호사협회에서는 그에 대한 아무런 의견도 없었죠. 그래서 제 생각을 보고서 형식으로 써서 법무부에 보냈죠. 그랬더니 법무부에서 반가워하면서 주관식 시험에 대한 의견도 보내달라고 오히려 요청을 하더라구요. 변협에서 일주일동안 강기갑 의원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어요. 설문지를 보니까 앞의 한 개를 제외하고 뒤의 네 개 문항은 전부 같은 소리를 가지고 말장난을 하더라구요. 의도가 분명한 조사죠. 그리고 이틀 만에 바로 성명을 발표하는 걸 봤습니다. 변호사들의 의견을 수렴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한 겁니다.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죠. 이메일로 변호사 50명의 동의를 받아 의견을 언론사에 보냈죠. 당장 그게 이슈화 되더라구요. 그전 로펌에 있을 때 보도자료를 만들어 기자들에게 이메일로 보내는 걸 봤습니다. 그걸 보고 배운 거죠. 로스쿨의 시험문제에 대해서는 법무부가 오히려 저에게 성명을 발표해 보라고 하더라구요. 로스쿨 합격률을 정할 때도 그랬습니다. 대한변협이나 서울회에서 아무런 의견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변호사들의 동의를 받아 의견을 발표했었습니다. 어떤 문제를 사회이슈화하는 걸 우연히 알게 된 겁니다. 그랬더니 주위에서 저보고 서울회 회장선거에 출마하라는 소리가 나오더라구요. 그 전에는 입후보한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죠.”
그의 파괴력은 무서웠다. 그가 덧붙였다.
“선거가 끝난 후에도 저는 계속 행동을 했습니다. 로스쿨생이 아니라 자격을 가진 변호사가 검사가 되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서울회는 성명서 한 장 달랑 내고 그치는 겁니다. 시위라도 해서 의견을 확실히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의견서를 적고 변호사 500명의 동의를 얻어냈습니다. 시위도 하고 백분토론에도 나갔습니다. 그때부터 로스쿨 측에서는 저를 적대시하고 개인적 친분이 있던 사람들마저 섭섭해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한 취지는 법에서 정한 자격문제였습니다. 저는 이기적인 집단행동의 주도자로 매도됐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소득은 ‘저 사람이 선거에서 떨어졌는데도 계속 열심히 일하는구나’ 하는 인정을 받게 된 겁니다. 회장을 하고 싶은 욕심이라는 오해가 풀린 거죠. 당선 못시켜줘서 미안하다고 하는 변호사가 있었어요. 그 말을 들을 때 가슴이 뭉클하더라구요. 얼굴을 모르는 변호사님들이 저를 지지해주는 건 제가 잘해서가 아니라 기존의 변호사단체가 일을 못한 겁니다.”
청년변호사인 그는 이미 먼 앞날을 내다보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변호사가 어떻게 가야 할지 그 길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회장에 출마했던 건 명예욕이 아닌 진정한 마음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그는 장래의 훌륭한 지도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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