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이야기

짙푸른 에메랄드 빛 파도가 넘실대고 눈앞에 무한히 펼쳐진 연녹색의 잔디가 정겹다. 통통한 다리가 귀여운 조랑말이 소심하게 만들어놓은 똥 무더기에 신발 뒤꿈치가 더러워졌지만 멀리 보이는 글래스 하우스가 신기하기도 했다.
“안도 다다오는 일본 건축가인데 극도의 단순함과 절제미가 특징이죠. 노출 콘크리트와 커튼월 공법을 사용했는데… 지니어스 로사이는 말이에요, 이 땅을 지키는 수호신이라는 뜻이래요. 이것도 역시 안도 다다오의 작품인데 돌의 정원과 건물 안에 담긴 자연 같은 것을 보면 역시 그의 건축 철학을 알 수 있다네요.” 제주도 섭지코지 구석에 있는, 깊디깊은 시멘트로 만든 지하벙커 같은 건물 속으로 돌고 돌아 들어가면서 그는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커튼월 공법이 뭐에요?” 예쁘고 귀여운 민 변호사가 애교 섞인 콧소리를 내면서 물었다. “커튼월은 쉽게 말하면, 건물 외벽을 구조체로 사용하지 않고 자유롭게 구성하는 건데, 장막벽이라고도 하는 비내력 외주벽으로 건축물의 외주벽을 구성할 때 프레임의 외부에 금속재나 무기질 재료 같은 걸 부착해서 만드는 거에요. 주로 비와 바람 같은 것으로부터 건축물을 보호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거죠.”
무언가에 열중하면서 말을 할 때 그는 왼쪽 콧구멍을 벌름거리는 경향이 있다. 개는 한쪽 콧구멍으로만 냄새를 맡기 때문에 그 냄새가 어디서 나오는 건지 정확하게 알아차릴 수 있는 거라는 얘기를 며칠 전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본 적이 있는데, 갑자기 그의 옆모습이 포동포동한 시추같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지금 한 가지 정보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일까?
“제가 너무 말이 많았죠?” 갑자기 내가 너무 조용하다고 느꼈는지 그는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어대고 있다. 너무 사랑스럽다. “아니에요. 변호사님은 어떻게 그런 걸 다 아시는거예요?” 분명히 그는 나에게 한 말인데 예쁘고 귀여운 민 변호사는 눈치도 없이 자기한테 한 말로 알아듣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얼굴이 약간 붉어지면서도 무언가 우쭐대는듯한 느낌의 그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정작 눈치 없는 사람은 민 변호사가 아니라 나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왼쪽에 서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예쁘고 귀여운 민 변호사였다. 그가 왼쪽 콧구멍만 벌름거린 건 어쩌면 그녀를 보고 흥분했기 때문이었을까? 그의 눈을 쳐다보며 살짝 몸을 움직일 때마다 부드러운 아이보리색 시폰 나시가 흔들리면서 보일 듯 말 듯 그녀의 가슴이 돋보이는 게 느껴졌다. 게다가 그녀는 앙증맞은 꿀벌이 꿀을 찾아 헤맬 때 내는 소리처럼 작은 콧소리로 그에게 연신 달콤한 페로몬을 뿌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저는 정말 변호사님처럼 이렇게 다방면에 유식하신 분은 처음 봤어요.” 점입가경이다.
기업간 부패행위 방지를 위해서 변협에서 마련한 워크숍 때문에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내려오면서 어쩌면 그와 낭만적인 데이트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점심을 먹고 오후 세미나를 시작하기 전에 잠깐 비는 시간이 있어 숙소 주변을 산책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중간에서 민 변호사를 만나게 되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세미단발에 투명한 피부가 인상적인 그녀는 조그마한 체구에 항상 애교 섞인 콧소리를 내는 걸로 유명했는데 그 때문에 내가 불의의 피해자가 될 줄은 몰랐다.
경수씨가 내 얼굴에 물 잔을 끼얹은 날, 나는 그와의 2년간의 지루한 연애에 종지부를 찍었다. 오히려 생각보다 담담하고, 이상하게도 후련한 느낌이었다. 그는 그 이후 한 달 동안 저녁마다 문자를 보내고 발신번호 없는 전화를 걸어대더니만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연락이 없었다.
3개월이 지난 지금은 그와 내가 과연 사랑을 했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항소기간을 도과시켰던 것 때문에 마음 졸였던 의뢰인에게는 부장님이 약간의 위자료를 지급하는 선에서 해결이 되었다. 더 이상 나를 괴롭히는 자잘한 문제들은 사라져버렸고, 이제는 자유라고 생각했다.
녹두죽이 나오고, 전복 버터구이를 먹었다. 중간 중간 소주와 맥주가 들어오고 있었다. “도대체 반부패 행위 방지가 왜 필요해요? 기업들이 부패를 많이 저질러야 사건이 많이 들어오는 거 아니에요?” “하하. 그럴 수도 있겠군요.” 50이 넘은 부회장이 농담조로 말했다. “문제는, 그 사건이 나한테 안 들어온다는 데 있는 거죠.” “하하!!”
경수씨와 헤어지던 날, 그는 마지막 술잔을 내게 끼얹으며 차갑게 말했었다. “훌륭하신 변호사 나으리, 끼리끼리 만나서 어디 한번 떵떵거리고 잘 살아보시지.” 그가 내뱉었던 그 말대로 변호사가 떵떵거리고 잘 살 수 있던 시절은 이미 지나가버린 것이었을까? “서 변호사님은 어떠세요?” 콧소리로 한껏 애교를 섞으며 은근히 서변 쪽으로 고개를 숙이는 민 변호사의 가슴이 오늘따라 유난히 풍만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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