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네번째 이야기

“증인이 또 안 나왔네요. 다음 기일은…”
“재판장님, 죄송하지만 오늘까지 증인이 4회 연속 안 나오고 있는데요. 이만 변론을 종결하면 안 될까요?”
원고가 피고회사와 1억 원에 물건을 납품하기로 하는 계약을 체결한 뒤 물건을 납품했는데 피고가 5000만 원만 지불하고 2년이 흘렀다. 나머지 채무를 이행하라고 소송을 제기한 건데 그 사이 상대방 회사의 사장이 바뀌고 담당자가 퇴사한 상태였다. 대학교 CEO 과정에서 알게 된 중소기업 사장인 의뢰인이 전관 변호사님한테 이렇게 작은 사건을 맡겨서 미안하다며 읍소한 것도 있었지만, 계약서도 있고 상대방이 채무를 일부 이행한 것도 있어 간단하게 해결될 거라 생각하고 사건을 맡았던 내가 어리석었던 것 같다. 경기도 인근 지원까지 오가는 것도 짜증났지만 상대방은 대리인이 없어 절차 진행도 매끄럽지 않았다.
피고회사 사장은 자기가 회사를 새로 맡고 보니 모르는 채무가 많이 있었다면서 이미 퇴사하고 사라진 전 담당직원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있었다. 계약서에 날인된 도장이 자기 회사 법인 인감인 건 맞지만 전 직원이 문서를 위조한 거라고하면서 그 직원을 증인으로 신청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4개월 이상 기일이 공전되도록 그 직원은 증인신문에 나오질 않았고, 피고회사 사장은 재판날 아침까지도 그 직원하고 통화를 했는데 꼭 나오기로 했다고 우기고 있었다. 더 이상의 기일 지연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글쎄요. 증인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보죠.” “네?” “증인이 나올 때까지 계속 소환하는 걸로 하죠.” “언제까지 계속 증인을 기다려야하나요?” “상대방에게 유일한 증인인데 나올 때까지 계속 해야겠죠?” 어이가 없었다. 방청석에서 재판을 보고 있던 의뢰인의 큰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전 직원이 안 나오면 전 대표이사를 증인으로 부르면 되는 것이다. 계약 체결 당시 회사에 있지도 않았던 새로 온 사장이 기존의 채무를 부인하면서 문서위조 운운하는 것도 귀찮았지만 대리인 없이 소송 하는 피고를 불쌍하게 본 듯한 재판장의 태도가 서운했다.
갑작스럽게 결정된 변호사 개업이라 차근차근 따져서 준비를 할 시간도 없었고 한꺼번에 밀려오는 의뢰인들 상대하고 서면 쓰고 법정 가는 일이 만만치가 않았다. 게다가 민사사건이 들어오면 은근 신경이 쓰이기도 해서 현직에 있을 때는 몰랐던 개업 스트레스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었는데, 직원의 실수로 항소기간을 도과시킨 충격에서 채 빠져나오기도 전에 이미 잡혀있던 재판 때문에 서둘러서 사무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운전하는 내내 의뢰인 얼굴을 어떻게 볼 것이며, 또 얼마를 물어줘야 할 것인가. 머저리 같이 그리도 큰 실수를 해놓고도 제대로 보고도 하지 않은 김 대리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화가 났고, 직원들 믿지 말고 스스로 이중 삼중으로 챙겨야지 안 그러면 큰 코 다친다고 충고해주던 선배들의 충고가 떠올라서 나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스럽게 느껴졌었는데, 재판에서마저 어이없게 희롱당한 느낌이었다. 주체할 수 없이 흐르기 시작하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릴 때쯤 전화벨이 울렸다.
“오랜만이네.” 비아냥거리는 그의 말투가 거슬렸다. 막무가내로 오늘은 꼭 봐야겠다는 전화기 너머 그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었는데 더 이상 대꾸할 기력도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잔만 홀짝거리고 있었다.
“왜 대답이 없어?” “피곤하다. 오늘 정말 많이 힘든 날이야.” “언젠 니가 안 힘들다고 한 적 있어?”
부장님한테 처음 개업제의를 받은 날 한강변에서 늦게 서 변호사를 만났었다. 같은 직역의 사람이 나를 이해해줄 때 느끼는 편안함, 크고 따스한 그의 손이 내 볼을 감쌀 때의 야릇한 흥분감, 새로운 길을 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 같은 것 때문에 휴대전화가 계속 울려대는 것도 알지 못했다. 전화를 받지 않자 경수씨가 문자를 한 10개쯤 남겼던 것 같다. 그 날 이후 우리 사이는 예전 같지 않았고 사사건건 미묘한 신경전으로 불편해졌었다.
“정말이야. 오늘 사무실에 일도 있었고…” “너만 일하냐? 나도 힘들어.”
왜 하필 내가 이렇게 힘들고 비참한 날 그는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건지, 내가 왜 그에게 이런 저런 변명을 늘어놓고 있어야 하는 건지… 모든 것이 귀찮고 허망했다.
“이거 봐. 또 말 안하지? 매사에 너는 항상 이런 식이지. 너만 잘났고, 다른 사람은 다 무시하고.” 벌컥 벌컥 술잔을 들이키며 그는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검사 나부랭이 할 때는 무슨 신문인가 뭔가 한다고 매일 저녁마다 바쁜 척하더니, 변호사가 돼서는…” “뭐라고? 검사 나부랭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앙칼지게 그의 말을 가로챘다. 순간 움찔하는 듯싶더니 그는 쉬지않고 말을 이어갔다. 아니 끊임없이 주정을 하고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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