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변호사들, 매주 노숙인에 밥주는 봉사합니다”

2011년 8월 11일 오후 2시 30분. 대한변협 협회장실로 장준동 변호사가 와 있었다. 부산지방변호사회 회장인 그는 부리부리한 눈을 번쩍이면서 쓴 소리를 내뱉었다.
“미국 변호사들이 왔었어요. 대한민국은 변호사회 자체에 징계권이 없다는 데 놀라더라구요. 말이 안 된다는 거죠. 변호사회 자체에서 철저히 조사해서 잘못이 있으면 제명을 하거나 영업정지를 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징계위원회를 보면 거기 참석하는 변호사들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잘못을 범한 변호사들에 대한 솜방망이 징계에 대해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대한변협에 대해서도 불만을 토로했다.
“대한변호사협회 협회장을 전국의 변호사들이 직접 뽑는 직선제를 대의원총회에서 가결을 했는데도 협회장이 바뀌었다고 다시 원점에 놓고 논의하자는 의견에 휘둘리고 있는 꼴을 봅니다. 몇몇 야심 있는 인물에 의해 변호사 사회의 기본이 흔들리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면 안 된다고 봅니다.”
그는 적극적인 행동파다. 계속 대한변협이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보이면 머리에 띠를 두르고 당장 일어설 태도다. 그가 덧붙였다.
“대한변협 회칙개정위원회에서 직선제 문제를 가지고 다시 시간만 끌면서 주물럭거리고 있는데 저뿐 아니라 지방변호사회 회장들이 그 의도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지금 지켜보고 있는 중입니다.”
그의 말은 강한 경고였다. 흥분한 그의 말을 대충 다 들어줬다. 그의 흥분이 조금은 가라앉은 것 같다. 이제부터 그에게 과연 변호사라는 직업은 무엇인지, 왜 해야 하는지 본질적인 것을 묻고 싶었다. 그는 부산의 변호사들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다. 또 시민들에게 다가서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있다. 혼자 조용히 개인사무소를 하는 사람과는 살아가는 모습이 다를 것 같았다.
“20년 경험의 변호사를 정의한다면 어떤 걸까요?”
내가 물었다. 변호사마다 느낌이 조금씩 다 달랐다.
“겉으로는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었지만 뒤에서는 욕을 먹고 시기의 대상이 되는 직업이죠. 인권의 대변자라는 말은 허울에 불과하고 정확히 직시를 하면 하나의 직업에 불과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는 본질을 꿰뚫고 있다. 변호사를 도둑놈이라고 욕하면서 아들은 시키려고 하는 게 세상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사실 지금까지 변호사가 의뢰인의 시각에서 문제를 보려고 하지 않았죠. 한 단계 높은 곳에 앉아 판례의 입장만 앵무새같이 지껄인 것 아닙니까? 또 문제가 생겨도 일선에 나가서 뛰려고 하지도 않았어요. 도대체 이런 사람들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이제부터라도 자신을 낮추고 희생과 봉사를 하면서 시민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시민들의 의식 속에는 변호사를 생래적으로 싫어하는 감정이 숨어있는 걸 저는 몸으로 느낍니다. 우리가 그걸 없애도록 노력해야죠. 변호사를 싫어한다는 건 그들의 오해가 아니고 우리의 책임입니다. 스킨십이 없었던 거죠. 소통이 안 된 겁니다. 이제는 서로 마음이 흐르도록 행동을 해야 합니다.”
“부산지방변호사회의 경우는 어떻게 다가갔습니까?”
내가 물었다.
“매주 부산시청 광장 뒤에서 1000명의 사람들에게 밥을 퍼주는 운동부터 변호사들이 나섰습니다. 우리들의 손으로 직접 밥과 국 그리고 반찬을 줬죠. 노숙자들만 오는 게 아니라 옷을 깨끗하게 입은 노인들도 많이 섞여서 오시더라구요. 처음에는 저 분들이 정말 가난해서 밥을 얻어먹으러 오는 걸까 하는 의문도 가졌습니다. 역시 아니더라고요. 그런데 현실에서 보니까 노숙자들만 오라고 하면 창피해서 안 온다는 겁니다. 섞여야 몰려온다는 거죠.”
그들의 명예와 자존심을 실감한 것이다. 그가 계속했다.
“역시 직접 봉사를 해 봐야 가슴으로 뭔가 들어온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래서 직접 다가가는 ‘아름다운 인연'이라는 변호사 봉사단을 만든 거죠. 변호사 사무직원들이 힘을 합쳤어요. 그 전에는 노조를 만들고 대립적인 시각도 있었는데 함께 봉사활동을 하면서부터 유대감이 형성되는 것 같아요.”
그는 변호사의 지도자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화려한 경력의 잘난 법률가도 중요하지만 헌신하는 지도자가 더 중요한 시점인 것 같다. 변호사회의 회장은 한 개인의 명예를 위해 화려한 사무실에서 외빈과의 교제만을 즐기는 자리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장준동 변호사 개인에 대한 소개를 해줄래요?”
내가 물었다.
“남해의 섬 출신입니다. 창선도 사람이죠. 아버지가 고등어와 삼치를 잡았습니다. 어릴 때 저도 멸치잡이 배를 타고 일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물을 잡아당기고 일을 할 때면 허리가 끊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멸치잡이는 남이 보기는 쉬워 보여도 강인한 체력을 가져야 하는 일입니다. 섬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뭍에 있는 진주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고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변호사가 됐습니다. 남들이 하는 공부과정 비슷하게 겪고요.”
“지난 20년의 변호사 생활이 어땠습니까?”
“제 경우는 섬 사람 특유의 결집력의 도움을 그래도 많이 받은 셈입니다. 고향 분들이 많이 찾아와 줬습니다. 고향의 혜택을 받은 셈입니다. 그리고 제 개인적으로는 의뢰인의 눈높이를 맞추는 걸 철저히 업무의 기본원칙으로 삼았습니다. 내가 높은 곳에서 법을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사무실을 찾아온 사람이 얼마나 다급하고 힘든 심정일까 그가 원하는 게 뭘까를 생각했습니다. 사무장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제가 직접 상담하고 준비서면 하나하나를 제가 작성했습니다. 그렇게 일하면서 의뢰인들과의 인연을 쌓아갔죠.”
“변호사로서 힘들 때는 어떤 경우였죠?”
“모든 변호사들이 공통으로 겪는 시련과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 년에 몇 번씩은 돈 받아먹고 뭐했느냐면서 와서 행패를 부리는 의뢰인들이 있습니다. 아예 이해를 하지 않으려고 작심하고 와서 엉터리 소리를 늘어놓죠. 쌍욕을 먹어본 적도 있습니다. 받은 돈을 다 돌려주고 텅빈 사무실에서 혼자 회의에 빠진 적도 있습니다. 열심히 일했는데 그런 결과를 보면 충격이고 상처였으니까요. 지나보니까 변호사란 어차피 그런 경험을 겪으면서 프로가 되어가는 거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제 경우는 시름을 달래느라고 술도 많이 마셨습니다.”
그가 말 끝에 뭔가 떠오르는 표정으로 바뀌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변호사가 좋을 때도 있죠. 무죄를 선고받고 당사자가 진정으로 감사한 눈빛을 보낼 때 그게 보람 아닙니까?”
그가 싱긋이 웃었다.
“20년 동안 돈은 많이 벌었습니까?”
내가 물었다. 사실 가장 궁금한 대목이기도 하다.
“다른 변호사들도 마찬가지라고 확신합니다. 사업과 달라서 이 직업이 절대로 부자 되지 못합니다. 먹고 살고 아이들 교육시키면 만족해야 하는 겁니다. 선배님들을 보면 젊은 시절 땅을 사둔 몇 분이 재산가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 중에도 자식 사업에 담보를 대줬다가 지금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행방불명이 된 분도 있고요. 부자라는 건 팔자에 있어야 하나봅니다.”
그가 보는 부산지역의 법원이나 검찰은 어떤 것일까 궁금했다. 소위 향판(鄕判)이라고 해서 지방색이 강한 곳이기 때문이다.
“지난 20년간 경험한 부산지역의 법원은 어땠습니까?”
“그동안 법원은 군림해 왔죠. 그런데 법관평가제가 실시된 이후 달라지고 있습니다. 법관평가제에서 우수법관이 되면 판사로서는 전국적으로 영웅이 되는 셈입니다. 실력 없는 판사가 엉터리 판결을 쓰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어느 법원에서나 그런 판사가 몇 명은 있어요. 변호사 중에는 준비서면을 통해 그걸 지적하는 분도 계시고 법관평가제를 통해 의견을 제시합니다. 그렇게 계속되면 법원 자체에서 처리 못하는 실력 없는 법관이 걸러질 겁니다. 요즈음은 법원 판사한테서 오히려 전화가 오기도 합니다. 자기에 대한 평가가 하위권인지 상위권인지 알려달라고 말입니다. 하위권이면 옷을 벗겠다는 판사도 있습니다. 법원을 보면 오히려 법관평가제를 바라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요즈음은 법원 자체가 직접 시민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합니다. 어느 순간부터 의식이 변해서 법관평가제가 당연한 일 같이 되어가고 있어요. 그걸 통해서 법원과 변호사회의 관계도 제대로 되는 것 같습니다. 다만 법관평가가 공정하게 이뤄지도록 대한변협에서 지침을 전국적으로 내려줬으면 합니다.”
“검찰은 어떻게 보십니까?”
“검사평가제도 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는데 검찰 출신이 아닌 이상 변호사들이 직접 만나는 경우가 별반 없으니까 그건 쉽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보기에 요즈음의 검찰은 오히려 동정해야 하는 기관이 아닌가요? 국민에게 두들겨 맞고 법원에 치이는 꼴이죠. 영장 재청구를 해도 발부되는 수가 거의 없는 현실이죠. 국회를 가 봐도 전부 경찰편을 들지 검찰 쪽에 손을 들어주는 의원이 없는 것 같아요. 검찰 자체도 중심도 없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검찰 스스로가 조직의 앞날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인 것 같습니다.”
“부산지역의 전관예우 문제는 어떻게 보십니까?”
내가 물었다. 지방의 경우가 더 심한 면도 있었다.
“지방의 경우는 돈을 많이 벌어서 국회 나가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검찰에서 나와 변호사를 하면서 돈을 싹쓸이하고 서울로 튀는 경우도 봤죠. 그런데 요즈음은 세태가 변하고 있습니다. 법원장을 하고 나와서 맡은 첫 사건 의뢰인이 법정구속을 당하기도 합니다. 인심이 바뀐거죠. 법원에서 고위직을 한 사람들은 작은 법정에는 가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 재미없는 거죠. 지방의 경우엔 큰 사건은 서울의 로펌에서 내려와서 직접 합니다. 검찰 출신 변호사의 경우는 거액의 선임료를 받아 무리를 일으킨 경우가 있습니다. 진정도 당하고 고소도 당하고 그렇죠. 그러면서도 몇 년 버티다가 서울로 올라가는 경우를 봤습니다. 그게 부산의 실정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한 명이 나와서 휩쓰는 시대는 지난 것 같습니다.”
“현 변호사 사회에서 바뀌어야 할 점이 있다면 어떤 걸 지적하시겠습니까?”
내가 물었다.
“변협 협회장이 당적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데 왜 그런지 이해를 할 수 없어요. 변리사나 법무사회 회장 모두 현역 정치인이 하기도 하는데 말이죠. 우리가 공무원도 아닌데 그렇게 정치인이 되는 걸 제한 받아야 할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 그걸 바꿔야 합니다. 변호사들의 정치적 주장으로 목소리도 키우고 많은 정치인을 배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못할 게 뭐 있습니까? 현실로 어떤 일들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우리는 보지 않습니까? 명분은 그럴듯 하게 만들어 포장하지만 실질은 뭡니까? 여론조작과 정치인에 의해 악법도 만들어지지 않습니까? 그 과정에 로비력이 실질적인 영향을 발휘하고 말입니다.”
그의 거침없는 시원스런 말이 한 시간 동안 콸콸 쏟아져 나왔다. 부산 가는 비행기시간이 바쁘다면서 그는 마지막으로 대한변협회장이 선거공약으로 내세운 변호사들의 적극적인 정치참여가 빨리 이루어져야 한다며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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