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세번째 이야기

“변호사님, 지난 번 유말자 씨 사건 있잖아요. 구상금 청구사건이요.”
“그게 왜요?”
“오늘 법원에서 항소장 각하 명령이 왔는데요.”
“아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 사건 항소했는데, 각하 명령이라니요? ”
“저기, 그게…”
김 대리가 우물쭈물 말을 흐린다.
유말자 씨는 조그마한 회사를 운영하던 남편이 지병으로 고생하다 사망한 지 얼마 안 돼서 뜻하지 않게 은행에서 구상금 청구를 당했다면서 사무실에 사건을 의뢰한 할머니였다. 서초동에 사무실을 꾸리고 정신없이 사건이 밀려들던 와중에 맡게 된 사건이었는데, 상대방 은행은 망인이 연대보증채무를 졌으니 상속인들이 그 채무를 갚아야 한다면서 5억 원을 청구해온 것이었다.
“아무리 봐도 이상해요. 아버지가 병석에 1년 이상 누워 계셨었고, 연대보증서에 서명했다는 때는 특히 눈도 안보이고 거동도 불편한 데다가 거의 제대로 말씀도 못하셨었거든요. 근데 뜬금없이 연대보증을 했다니 정말 기가 차네요.”
“이거 좀 보세요. 이 글씨체가 아버지 필체하고 비슷하기는 한데, 사실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돌아가실 날 받아놓은 양반이 무슨 연대보증을 했겠어요. 그 당시에는 이미 대표이사 자리도 다 정 이사한테 넘긴 상태였는데요.”
비교적 교양 있어 보이는 유말자 씨의 딸이 다소 흥분된 목소리로 미간을 찌푸리며 억울함을 호소했고, 유말자 씨의 둘째 아들 역시 목소리를 높이며 부친의 서명이 위조된 것 같다고 했었다.
사건을 훑어보니, 은행 측에서 제출한 연대보증서 작성일자에 망인이 거의 의식 불명 상태로 입원해있었다는 점과, 특히 연대보증서에 적힌 서명 날인이 망인의 것하고는 조금 달라보여 성공 가능성도 꽤 높아 보였었다.
검사 생활을 몇 년 하고 보니 민사사건은 좀 부담스럽기도 했었는데, 그 사건은 연대보증서의 진정 성립만 다투면 될 것 같아서 가볍게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특히 사건 하나 맡겨놓고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고 닦달하는 의뢰인들에 비해 유말자 씨네는 사무실에서 요구하는 증거를 갖다 주는 외에는 그닥 우리를 귀찮게 하지도 않았었다.
소송이 어느 정도 진행된 중간에 맡은 사건이어서 실제 법정에는 두 번밖에 안 나갔고 재판장이 계속해서 변론종결을 외쳐대는 바람에 좀 찜찜하기는 했어도, 연대보증서가 작성되었다는 날에 은행 직원이 망인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직접 방문해서 서명을 받았다고 시인했기에 내심 승소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외로 1심에서 우리는 패소를 했고, 더군다나 우리가 주장했던 문서의 진정성립에 대한 판단도 판결문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았었다. 필적 감정을 다시 정밀하게 하고 망인의 의사무능력을 주장하면 항소심에서 뒤짚어질 가능성도 많다고 생각했었다.
조금 미심쩍어 하는 의뢰인들을 설득해서 항소를 하기로 하고 여직원에게 항소장을 접수시키라고 말했었는데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김 대리 어떻게 된 일이에요? 항소장 기간 맞춰서 잘 냈잖아요?”
“저기, 변호사님, 그게….”
“어휴, 답답해. 말을 똑바로 해봐요.”
김 대리가 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우물쭈물 말을 잇는다.
“제가 그때 분명히 항소장을 만들어 놓고는 오후에 법원갈 때 다른 사건들이랑 같이 한꺼번에 접수시키려고 준비해두었었는데요. 그날 하필이면 구충민 씨 가족들이 영장 발부되었다고 사무실에 찾아와서 수임료 돌려달라고 난리치던 때여서 제가 놀래기도 하고 좀 당황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만 접수를 못시켰었거든요.”
“아니, 그런 일이 있었으면 그 다음날이라도 접수시키면 되잖아요. 어떻게 항소장 각하가 나와요?”
“그런데 제가 항소장 접수시킨 줄 알고 있다가 나중에 사건 검색해보니까 접수된 사실이 없는 걸로 나와서 부랴 부랴 늦게 항소장을 냈는데 그때는 이미 기간이 도과된 상태였었나봐요.”
“뭐라구요? 그런 일이 있었는데 왜 내게 말을 안했던 거죠? 부장님은 알고 계세요?”
“그때 제가 얼핏 말씀 드리기는 했는데 두 분 다 바쁘셔서 제 말을 잘 안 들으시더라구요.”
정말 기가 막히고 하늘이 노래지는 상황이었다. 항소기간을 도과해서 항소장을 접수시키고는 변호사들한테 말도 안하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강도상해로 영장실질심사 받았던 의뢰인이 구속 수감되자 가족들이 사무실에 와서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경찰을 부르네 마네 실랑이를 하다 결국에는 수임료를 거의 다 돌려준 일이 있었는데 아마 그날 경황이 없어서 여직원이 실수를 했었던 것 같다. 순하고 착하기는 한데 일처리가 느리고 꼼꼼하지 못한 게 늘 마음에 걸렸었는데 결국 일을 치고 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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