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한 인생역정, 변호사로 마무리할 터”

김영우 변호사가 지난 달 18일 사무실을 찾아왔다. 처음 보는 변호사였다. 부리부리한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느낌이었다.
“건국대 로스쿨 교수로 있습니다. 왜 내 논문을 다시 수정하라고 했습니까? 누가 썼는지 심사에서 노출돼도 됩니까?”
그가 따졌다. 나는 대한변협의 학술지인 ‘인권과 정의’의 편집위원장으로 되어 있다. 변협의 공보이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질적인 일들은 거기에 참여하는 교수들이 전담하고 있었다. 그와 소파에 마주앉아 얘기를 하다가 그가 독특한 삶을 살아온 기인임을 알게 됐다.
이 만남이 이번 인터뷰의 계기가 됐다. 그는 옷을 훌떡 벗듯이 삶을 거리낌 없이 털어놓았다.
“저 말이죠, 초등학교 때까지 밥은 굶지 않고 산 것 같은데 갑자기 아버지가 망해서 집안에 온통 빨간 딱지들이 붙은 거예요. 그래서 중학교도 못가고 공장으로 직행했죠. 그때만 해도 제대로 된 공장도 없었어요. 미군들이 먹다버린 깡통을 잘라서 아궁이에 불길이 들어가게 하는 길다란 통을 만드는 일을 했죠. 웅천바닷가에서 조개도 잡고 풍로를 만드는 공장에서 쇳물도 만졌어요. 그러다 군대 가기 전 공사장 만뽀일을 맡았어요. 만뽀라는 용어가 일본어 같은데 모래차가 나갈 때 숫자를 세는 일이었어요.”
요즈음은 거의 발견하기 힘든 신산스러운 인생의 굽이를 넘어온 사람이었다. 그는 나와 나이가 같았다. 6·25전쟁이 끝날 무렵 태어난 우리세대는 가장 불쌍한 세대일 수 있었다. 세계에서 바닥인 가난한 나라였다. 다른 나라의 구호물자를 받아먹고 입고 큰 세대였다. 탄피에 몽당연필을 끼워 쓰고 총알을 박은 팽이를 돌리며 놀았다. 그중에서도 그는 고생을 더 한 것 같았다. 그가 계속했다.
“그래도 공부는 해야 할 것 같아 공장 일을 하면서 중학교 검정고시를 봤죠. 그리고는 해병대에 갔어요. 해병대 제대할 무렵 몰래 공부해서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했죠. 제대 후 플라스틱공장에 들어가 일을 하는데 유독가스가 심해서 정말 견디기 힘들더라구요. 직업을 바꾸고 싶었어요. 그래도 그때 아무것도 없으면서 오기는 있었어요. 언젠가는 나도 잘 살아보겠다는 각오가 있고 기도 죽지 않았죠. 누나가 쌀 두말을 구해 주더라구요. 독서실에서 그걸로 버티면서 서울시 9급 공무원시험을 준비했죠. 합격이 됐어요. 공무원이 돼서 첫 근무지가 가리봉동 동사무소였어요. 조금 시간이나 정신적으로 여유가 생기더라구요. 그런데 제가 대학 학벌이 없잖아요? 대학을 가기로 마음먹고 건국대학교 야간학부에 들어갔어요. 동사무소 말단공무원으로 마냥 세월을 보낼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다시 공부를 해서 7급 세무공무원시험에 합격했어요. 그리고 을지로 세무서로 발령을 받았어요. 제 생각으로는 다음 계획은 회계사였죠. 그런데 세무서 풍경, 이게 내 길을 바꾸어 놓더라구요.”
그가 싱긋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끊었다.
“길을 바꾸어 놓다뇨?”
내가 되물었다. 그는 현실에 잠시도 안주하는 성격이 아닌 것 같았다. 갈매기 조나단이 떠올랐다. 훈련을 거듭해 높이 날아오르는 소망이었다. 그가 계속했다.
“일반 국민한테는 군림하는 세무공무원들이 검찰청 서기가 들어오라고 전화 한 통만 해도 벌벌 떨면서 서류를 끼고 들어가는 거예요. 검찰이 참 끗발이 대단한 기관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때 우연히 신문에 보니까 사법시험 인원을 3백 명으로 늘린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제는 한번 검사에 도전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부가세과에 근무했는데 마침 담당과장이 서울 법대를 나온 분이었어요. 그래서 과장님한테 나도 사법고시에 도전하고 싶다고 말해봤죠. 그랬더니 그 분 말씀이 김 주사는 바둑이 1급인데 그런 능력이면 합격할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해 주시더라구요. 일단은 세무서에서 노른자라고 하는 부과세과에서 한적한 상담실로 보직을 옮겼죠. 거기서 법서를 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직장을 다니면서 공부하기가 쉽지 않아요. 공부 그 자체만 해도 합격하기 어려운 시험인데 직장에서 일하면서 되겠습니까? 모험을 강행했죠. 사표를 쓰고 그동안 모은 돈으로 버티기로 했어요. 돈을 딱 계산해 보고 신림동 고시원으로 들어갔죠. 그게 떨어지면 공부도 못하는 거죠. 목숨 걸고 공부해서 25회 사법시험에 합격했어요.”
나는 그와 사법연수원의 동기생이었다. 나 역시 직업장교 생활을 하면서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직장을 다니면서 공부를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같이 고스톱을 치고 놀 때는 아뭇소리 하지 않던 상관이 책만 들추면 못마땅한 표정을 짓곤 했다. 그게 세상이었다. 그가 계속했다.
“연수원을 졸업하고 검사가 됐죠.”
“그만하면 다 성공했네. 입지전적인 인물로 말이죠.”
내가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이 검사라는 직업이 세무서에서 주사를 할 때 보던 것과는 영 달라요. 검정고시에 이류대학 출신, 거기다 나이 먹은 놈이니까 그 조직에서 내 앞날이 보이지 않는 거예요. 지방을 떠도는데 이거 어떻게 된 게 나한테는 골 때리는 사건만 배당하는 거예요. 책상 위에 높이 쌓인 기록더미만 보면 골이 지끈거리더라구요. 다시 다른 데로 튀어볼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사표를 내고 변호사를 개업했어요.”
그의 도전의식은 중단이 없는 것 같았다. 법조인으로서는 이례적이었다. 특히 검찰출신은 과거 조직에서 느낀 고민들을 잘 털어놓지 않았다. 또 다른 그들만의 자존심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거리낌이 없었다.
“변호사 개업하고 어땠어요? 검사 한 덕 좀 봤겠네.” 내가 물었다. 전관예우의 실체에 대해서도 속일 사람이 아니었다.
“마지막에 서부검찰청에서 근무했는데 개업지 제한도 없었어요. 바로 그 앞에 법률사무소를 차렸죠. 더구나 제가 세무서 주사를 한 경력도 있으니까 사건이 몰려들어오는 겁니다. 제가 90년도에 개업을 했는데 당시로서는 5백만 원도 큰 돈이었어요. 저는 돈이 들어오는 걸 보면서 변호사란 정말 혜택을 받은 직업이구나 생각했죠. 재미 봤어요.”
상당히 돈을 벌었다는 얘기였다.
“그 다음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돈만 벌고 그만둘 사람이 아니었다.
“정치를 할 생각이 들었어요. 고향에 내려가 선거캠프를 차렸죠. 무소속으로 한번 당선 돼 볼 생각이었어요. 먼저 창원시장으로 출마했죠. 그런데 이 정치라는 게 알고 보니 학을 떼겠더라구요. 밑자리를 닦는데 돈이 너무 들어가는 거예요. 고향마을부터 시작해서 종친회다 뭐다 여기저기서 요구하는 게 너무 많아요. 공천이 없는 상황에서는 당선 가능성도 없는 게 현실이고. 내 성격상 도저히 맞지 않았어요. 한편으로는 오만해 지는 것 같기도 하고. 깨끗하게 포기하고 서울로 다시 올라와 서초동에 변호사 사무실을 다시 차렸죠.”
“변호사는 계속 잘 됐어요?”
내가 물었다.
“그렇지 않아요. 제 경험으로 외환위기가 오기 전까지는 그래도 세법관계 사건이 더러 들어왔는데 그 이후는 사건이 딱 끊기는 거예요. 로펌에 사건이 집중되는 현상이 생긴 거죠. 솔로로 변호사를 하는 사람은 신뢰를 받지 못하는 시대가 왔어요. 그때 다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새로 사건이 들어와도 받지 않고 고시원에 들어가서 박사과정을 공부했죠. 그리고 로스쿨 교수가 됐어요.”
그의 항의성 방문은 집념을 가진 그의 적극성의 표출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전혀 그런 적이 없었다. 어느새 저녁때가 됐다.
“밥을 먹으면서 얘기를 더 들읍시다.”
내가 제의했다.
“좋죠. 이 근처에 내가 잘 아는 복집이 있는데 그리로 갑시다.”
잠시 후 우리는 근처의 복집으로 옮겼다. 음식점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가 복지리를 시켰다.
“가난뱅이 출신은 복지리의 맛을 모르는데?”
내가 농담을 했다. 입맛도 어려서부터 싱싱하고 좋은 음식을 먹어봐야 맛을 제대로 알기 마련이다.
“복지리 맛은 변호사가 되고 돈을 번 후에 안 거죠.”
그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맨날 공부하고 도전만 했는데 도대체 놀아는 봤어요?”
내가 물었다.
“엄형, 그러지 마슈. 한번 태어난 인생 돈이나 권력보다는 의미를 찾아야 하는 거 아니요? 난 지구를 부지런히 구경하다가 죽자 생각하고 열심히 세계를 돌아다녔죠. 지구를 아마 열바퀴쯤은 돌아 다녔을 거야. 아프가니스탄에도 가고 인도도 가고 이집트도 가고 칠레로 해서 혼자 남극대륙까지 갔으니까 말이요.”
그는 여행광인 것 같았다. 살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험한 인생역정에서 여과되어 바닥에 침전된 금 같은 철학을 캐고 싶었다.
“돈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내가 물었다.
“돈은 진짜 가져야 할 사람이 가져야 돼요. 내 경우는 그걸 가질 자격이 못됐어요. 번 것 마저도 관리하지 못했으니까. 내가 살아보니까 돈은 어느 정도까지는 정말 절실하게 필요해요. 그런데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적용되더라구요. 어느 선을 넘으니까 비효율이 시작되던데요. 그리고 변호사로 부자는 절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얘기하다가 그는 갑자기 뭔가 떠오르는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돈? 그거 자식에게 물려줄 필요 없어요. 오히려 독이 될 수 도 있어요. 내가 살던 고향의 시골의 부자들 자식을 보면 별로 잘 된 걸 못 봤어요. 대부분이 피폐해 있어요. 서울 법대를 나오고도 아버지 재산 바라보느라고 제 갈 길을 못가는 걸 봤죠.”
“앞으로 변호사들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내가 물었다. 그의 도전정신은 어떤 새로운 길을 알 것 같았다.
“변호사끼리 같은 밥그릇을 놓고 싸우는 거 안 좋아 보여요. 전부 송무에만 얽매여서 그래요. 직역을 넓혀야 합니다. 변호사는 하나의 자격으로 생각하고 자기를 아주 특화해야 합니다. 저는 개발하기에 따라서 다양하고 엄청난 분야가 있다고 생각해요.”
“남은 인생을 뭘 하고 사는 게 소망이죠?”
내가 물었다. 그의 버킷리스트를 알고 싶었다.
“교수로 있으니까 이것도 돈만 생각하지 않으면 참 좋은 직업이다 싶어요. 여기 있다가 정년퇴직하면 다시 변호사를 할 겁니다.”
소주잔을 놓고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에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
음식점 유리창으로 어둠이 번들거렸다. 음식점 문 앞에서 헤어지면서 그가 한마디 했다.
“앞으로 우리 좋은 친구합시다.”
친구가 한 명 생긴 날이었다. 돌아가는 그의 발길이 허허로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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