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인은 담력은 크되 욕심은 작아야”

법조계란 지내놓고 보면 참 좁은 동네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 같아도 평생 그 모습을 보며 함께 늙어가게 된다. 법대 위의 재판장도 시간이 흐르면 극이 끝나고 무대 위에서 내려온 배우같이 자연인으로 돌아온다.

요즈음 대한변협 회의에 나가면 구석에 묵직한 바위같이 앉아 있는 성문용 변호사를 보곤 한다. 그를 보면 1973년 겨울이 기억 저쪽에서 청록색 빛으로 어슴프레 떠오른다. 냉랭한 공기 속에 종로5가 뒷골목의 허름한 건물들이 낮게 웅크리고 있었다. 그 중 오래된 콘크리트 3층 건물의 2층 좁은 방에 수강생 몇 명을 앞에 두고 형법총론을 강의하는 20대 청년이 있었다. 사법연수원생 성문용이었다. 하얀 와이셔츠를 받쳐 입은 감색양복 옷깃에는 연수원 배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검찰청에 시보로 나가고 있습니다. 검사실에서 가서 업무하는 걸 보니까 이거 검사라는 게 별 거 아닌 것 같더라구요.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 두꺼운 기록을 뒤적거리는 거예요. 서류 공장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그가 본 현실을 정직하게 얘기해 주고 있었다. 그는 고시준비를 하려는 수강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시공부가 별 게 있나요? 궁둥이 싸움이죠. 얼마나 오래 버티고 책상에 앉아 법서를 읽느냐 하는 거죠.”
자기자랑이 없는 진솔한 성품이었다. 강의가 끝나는 날 그는 그가 칠판에 분필로 ‘膽慾大而心慾小(담욕대이심욕소)’라는 한자를 쓰고 나서 이렇게 설명했다.
“여러분도 언젠가는 법조인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법조인은 담력은 크게 하되 욕심은 작게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마지막으로 드리는 선물입니다.”
그의 마지막 수업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로부터 13년이 흐른 어느 여름날 후덥지근한 오후였다. 일제시대부터 법정으로 사용되어 오던 서소문의 낡은 형사법정에서였다. 성문용 재판장이 심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사십대의 중견 부장판사였다. 푸르스름한 죄수복을 입은 십대 중반의 남자 아이들 몇 명이 그의 앞에 겁먹은 얼굴로 서 있었다. 강간죄로 기소된 아이들이었다. 변호사석에는 몇 명의 변호사가 지루한 표정으로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 앉은 변호사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성문용 재판장 저 사람 대단한 사람이에요. 중간에 변호사를 해 봐서 그런지 사건의 배경을 꿰뚫고 있어. 담당 변호사보다 감이 더 빨라. 담당변호사가 귀찮아서 증인신청을 안 하는데도 아무개 증인을 불러봐야 하지 않느냐고 족집게 같이 짚어내는 거야. 하여튼 사건마다 열정이 대단해. 그 바람에 우리 변호사들은 기다리느라고 죽을 지경이요. 나도 두시에 왔는데 벌써 네 시간째 기다리는 거야. 재판장 저 양반은 오줌도 마렵지 않은가봐. 변호사를 하다가 법관으로 들어왔는데 열심히 해도 이 판에서 출세는 못해.”
그는 게임의 심판관이 아니었다. 진실을 찾는 사람이었다.
열서너 살쯤 되는 여자아이가 증언석에 불려나왔다. 성문용 재판장은 여자아이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블루진 점퍼에 청바지를 입고 금속장식이 있는 두꺼운 벨트를 맨 아이였다. 머리는 외국 잡지의 모델처럼 거칠게 친 짧은 머리였다. 불량소녀의 냄새가 역력했다.
“저기 남자 아이들에게 윤간 당했다고 조서에 나와 있는데 정말 그렇게 진술한 게 맞니?”
재판장이 물었다. 그가 직접 불러낸 증인이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계속 질문을 하고 있었다.
“왜 그랬니? 검사님이 때렸니?”
그는 수사기관에도 단호했다. 그는 뭔가 심증이 있었다.
“아니요.”
“그러면 친구가 말을 맞춰달라고 했구나? 정말 조심해서 말해야 한다. 강간당한 적이 없는데 그랬다고 했으면 무고죄가 되고 거짓말을 하면 위증죄가 돼. 정직하게 말해야 해.”
재판장의 눈치를 보던 여자아이가 마침내 털어놓았다.
“맞아요. 저 강간당하지 않았어요. 정말 내가 좋아서 한 거예요. 그런데 같이 놀던 미자가 당했다고 말을 맞추자고 해서 그런 거예요. 의리 때문에 그렇게 말한 거죠. 또 그렇게 해야 합의금을 받아낼 수 있다고 그랬어요.”
그 말을 들은 방청석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잡혀온 남자아이들 부모가 “저년 때문에 우리 아들이 이렇게 됐어”하면서 울부짖었다.
“지금 떠든 사람 누구요? 내가 물어보고 있는데?”
성문용 재판장이 그쪽을 보면서 눈을 부라렸다. 그 서슬에 방청석은 찬물을 끼얹듯 조용해 졌다. 성문용 재판장이 다시 여자아이를 보고 말했다.
“네가 그렇게 말하는 바람에 저 아이들이 재판을 받느라고 오랫동안 구치소에 있는 거 아니냐? 어떻게 그럴 수 있니?”
진실이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정의로운 법관이었다.

그때부터 다시 25년이 흘렀다. 이제 나이 일흔이 멀지 않은 그의 모습은 세월의 풍화작용 속에 물결이 만든 부드러운 둥근 바위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2011년 7월 초순 장대비가 내리던 날 그의 사무실 옆 비빔밥집에서 막걸리와 안주가 놓인 탁자에 그와 마주 앉았다.
“재판이라는 게 뭐였습니까?”
내가 물었다. 그라면 어떤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재판에서 당사자주의는 판사 면피시켜주기 위한 제도야. 재판 잘못해도 너희들 책임이다 이거잖아? 따지고 보면 미국의 배심도 마찬가지로 판사들 면피시켜주기 위한 거지. 지금 제도가 모두 좋은 걸로 아는데 그렇지 않아.”
현실 재판제도의 문제점을 꿰뚫는 말이었다. 법원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수많은 사람들은 진실을 발견하지 못하는 법원에 분노하는 것이다. 그가 덧붙였다.
“판사들이 더 양질이 돼야 해. 그리고 노력해야 돼. 내가 재판장을 할 때 경험을 하나 얘기할게. 한 사건은 마지막까지 정말 어떤 게 옳고 그른지 판단을 할 수 없었어. 이런 때가 제일 고민이지. 선고를 안 할 수도 없고 말이야. 수백 억이 걸린 사건인데 함부로 할 수도 없었어. 그래서 고민하다가 양쪽 다 동시에 당사자 신문을 하기로 했지. 양쪽에 공평하게 50개의 신문사항을 만들어 법정에 나갔어. 대리인인 변호사들은 끼어들지 말라고 부탁했지. 그게 그 양반들 면피하게 해주는 셈이 되기도 했으니까. 그걸 직접 다 물으니까 비로소 감이 생기더라구. 그래서 선고를 했지. 그런데 나중에 배석했던 판사가 나에게 하는 말이 자기가 그거 청탁을 받았었는데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내는 결론을 옆에서들 살피고 있었던 거지. 등골이 오싹하더구만. 여러 사람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이야. 배석보고 청탁을 받은 게 있다면 다 까자고 했어. 음흉하게 그걸 속에 담고 결과를 보면 안 되잖아?”

그는 담백한 성격 같았다. 그가 잠시 뭔가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전두환 정권 초기쯤 될 거야. 즉결심판을 하러 들어갔는데 입회계장이 하는 말이 시위를 하다가 끌려온 사람은 구류를 먹이라는 지시가 있었다는 거야. 한 친구가 끌려왔는데 벌금 5백 원을 선고했지. 그랬더니 선고받은 친구가 한참을 나를 쳐다보는 거야. 이상했나봐. 법관에게 지시가 어딨어? 양심에 따라 재판하는 거지. 입회계장도 법원 방침이 구류인데 왜 그러느냐고 하더라구. 그러다 몇 년이 흘러 내가 변호사 개업을 했을 때 어떤 사람이 와서 ‘저를 아세요?’ 하고 물어보는데 바로 나한테 선고받은 그 사람이었어. 정말 세상이 무섭다는 걸 느꼈지.
나는 판사를 시작하면서 안우만 부장을 모셨는데 어떤 상황이던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 성품이었어. 그 분한테서 많은 걸 배웠지.” 그는 세상을 무서워 할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판사를 왜 그만뒀어요?”
내가 물었다. 어쩌면 상처를 건드리는 게 될 수도 있었다.
“변호사를 하다가 판사로 들어가면 잘되기 힘들어. 법원 내에 그런 게 있어.”
그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인생을 중간 점검해 본다면 어떤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물었다. 그는 분명 내용이 많은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점검은 무슨? 난 아무 할 말이 없어.”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를 몇 년 했어요?”
“변호사만 16년 했나? 처음에 2년을 하고 판사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서 했지.”
그가 막걸리 잔을 들어 주욱 들이키더니 젓가락으로 앞에 놓인 열무김치를 집어 우적우적 씹었다.

“변호사란 뭐라고 생각하세요?”
내가 물었다.
“판사를 그만두고 법률사무소를 냈는데 처음에 의뢰인이 와서 변호사를 사려고 왔대. 그래서 얼마에 사겠수? 하고 물었더니 가만있더라구. 처음에 그 말이 이상했는데 변호사를 하면서 생각해 보니까 그 말이 맞는 면도 있어. 당사자로서는 돈을 주고 자기만족을 얻는 거니까 말이야. 그런데 판·검사의 틈바구니에서 변호사가 정의를 얼마나 실현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야. 또 돈을 안 벌 수도 없고 이거 어려운 직업이지. 인간이라든가 법이라든가 변호사라는 건 그게 뭐라는 걸 스스로 터득해야 한다고 생각해.”
툭툭 튀는 듯한 그의 어조 속에 독특한 개성과 진리가 담겨 있었다. 그가 계속했다.
“변호사를 해서 부자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 의뢰인한테도 내가 노력한 만큼만 돈을 받아야 해. 변호사에게는 별것이 아닐지 몰라도 의뢰인에게는 주는 게 다 큰 돈이야. 요즈음 로펌을 보면 거액을 받는데 무리해서는 안돼.”

“그러면 의뢰인에게 돈을 요구할 때 적정선은 뭐죠?”
내가 물었다. 중요한 노하우일 수 있었다.
“내가 요구하기보다 상대방에게 얼마나 낼 수 있수? 하고 난 먼저 물어봤어. 그러면 대개 상대방이 낼 수 있는 적정선이 나오지.”
상대방의 형편에 따라 변호비를 다양화한다는 얘기였다. 그가 덧붙였다.
“돈도 좋지만 열심히 일해줬던 사람이 몇 년 후에 조그만 선물을 주는 게 더 반갑더라구. 좁쌀이나 콩, 팥을 가져다주는 사람도 있었어. 그게 고맙지.”
그는 사람 냄새를 그리워하는 따뜻한 변호사였다.
/ 엄상익 공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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