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결혼하면 정말 좋지 않아요?”
“좋을 것 같지? 그거 다 부질없다, 너. 신혼의 달콤함은 입덧과 함께 사라지는거야.”
결혼에 대해 나름의 확고한 신념을 가진 선배의 입담에 마냥 웃었던 적이 있다. 헌데 막상 입덧이란 걸 겪어보니 절로 공감이 갔다. 하루종일 파도치는 바다 위에서 배를 타는 듯 했다. 속은 울렁울렁, 비리고 꼬린 온갖 냄새는 끊임없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컵 냄새, 사람 냄새, 길거리 냄새가 어떤 것인지 처음 알았다. 눈꺼풀은 천근만근이어도 고용된 처지에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보지 않을 수 없으니 직장 동료들에게 임신 소식을 알리기도 주저된다.
아무렇지 않은 듯 일은 해야겠고 몸은 힘드니 만만한 게 남편이라, 남편에게 오만 진상을 부리다가도 그런 내 모습에 민망할 뿐이다.
임신과 출산이 아직 남의 일일 때, 임신한 여성변호사들을 볼 때면 그저 무기력하다는 느낌이었다. 다른 사람들 권리 찾아준다고 백방으로 뛰면서 정작 자신들은 업계 관행이라는 것에 치어 눈치보고, 참고, 조용히 넘어가려는 게 안타까웠다.
임신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마다 오버랩되는 우울한 얼굴들 때문에 더욱 그랬다. 임신 4~5개월 막 불러오기 시작하는 배를 긴 자켓 속에 감춘 채 우산을 들고 빗 속에 서 있던 한 선배의 모습이다. 그 선배는 임신 사실이 직장에 알려지면서 곧바로 해고된 직후였다. 모유 유축을 위한 장소도 변변치 않은 직장의 비좁은 서류창고에서 문을 닫아걸고 누가 올세라 후다닥 유축을 끝내던 동료의 모습도 생생하다. 출산휴가를 신청하자 1년간 육아휴직을 내라며 사실상 해고통보를 받았다던 지인의 하소연도 떠오른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겠지’ 이해해보려 했지만, 어떻게 아직도 이런 일이 있을까 같은 여자로서 화나고 답답했다.
아이가 생긴다는 것, 무척 기쁘고 감사한 일이다. 허나 우리나라에서, 특히 계약직 여성들에게 임신과 출산은, 스트레스가 태교의 최대 적이라는데도 불구하고 스트레스 원인 1순위가 아닐까. 유급휴가 3개월은 고사하고 최소한 한두 달만이라도 마음 편히 출산휴가를 받을 수 있을지, 돌아오면 내 자리가 그대로 남아있을지 불안이 앞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판·검사로 임관한 여성법조인들은 출산휴가를 신청한다고 고용까지 불안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상사나 동료들 눈치보기는 마찬가지란다. 임신을 알리면 ‘이렇게 바쁜 시기에 정신이 있냐’는 노골적인 핀잔을 듣는 일도 있고 알게 모르게 동료들 비위 맞추느라 바늘방석일 때가 많다고 했다. 둘째나 셋째를 낳을라치면 우선 얼굴에 철판부터 두둑이 깔아야 한다고 하니…
나도 직장에는 임신 사실을 최대한 늦게 알리려 했다. 미리 알려 좋을 것 없을 듯 했고, 임신 때문에 괜스레 미안해지는 게 싫었다. 그런데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꼬박 하루가 걸리는 지방 현장검증이 잡히는 통에 바로 임신 사실을 알리며 양해를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중 사건에 산까지 타야 하니 무덤가에서 귀신이라도 따라붙으면 어쩌겠는가. 임신을 숨기고 무리하게 일하다가 유산한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도 들은 터였다. 다행히 좋은 사무실 식구들을 만난 덕분에 내 임신 소식을 듣고 모두들 크게 축하해주었다. 따뜻한 배려의 말 한마디에 그제야 한시름 놓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소규모 법률사무소에서 출산휴가기간 동안 누가 내 일을 대신하나 생각하면 벌써 걱정이다. 이런 때 여성변호사를 위한 ‘복대리제도’가 있었으면 싶다. 산전후 휴가 중인 여성변호사를 위해 비용도 저렴하고 안정적으로 대체인력을 구할 수 있는 제도가 변호사회 차원에서 마련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야 직장 다니며 아이를 낳고 키우는 여자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직장 때문에 임신은 생각할 수도 없다는 그 심정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다. 모성보호의 사각지대라는 비정규직 여성이 전체 여성 임금 노동자의 60%에 달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남자들과 똑같이 성공하고 싶으면 똑같은 조건에서 일하라는 말이나 임산부까지 배려하면 회사를 어떻게 꾸려가냐는 논리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지나치게 둔감한 발상일 것이다. 고령사회, 저출산문제가 사회 전체의 문제이듯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도 여성 개인만의 몫은 아니다. ‘니 문제는 니가 알아서 하라’는 식의 냉정한 시선 대신 ‘우리 아이들은 함께 낳고 키운다’는 따뜻한 직장 분위기를 기대하는 것은 여전히 지나친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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