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두번째 이야기

“정말 미안해, 누나.”, “소영아 내가 너 볼 면목이 없다.” 엄마하고 동생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우물쭈물 말을 먹어버리고, 아버지는 연신 한숨만 쉬고 있다. 20년을 훌쩍 넘긴 낡은 장롱, 군데군데 담뱃불 자국이 남아 있는 장판, 좀 있음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옷걸이, 방안 가득 흐르고 있는 냄새나는 가난. 이제야 겨우 우중충한 내 인생을 벗어 던질 수 있나 보다 했는데, 더 이상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냥 그 길로 집을 나와서 시끄러운 버스 정류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할 말이 없다.
구질구질한 집안 얘기는 더 이상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동생은 전문대를 졸업한 이후 변변히 취직 한번 한 적이 없었다. 무슨 핸드폰 부품 사업을 한다고 돈을 가져가기 시작하더니 그 후로 주기적으로 끊임없이 사고를 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아빠가 몇 년 전에 서주었던 빚보증도 문제가 되어 목을 조이고 있었다. 퀴퀴한 지하 고시원 식당에서 2,500원짜리 식사를 하면서 시험에만 합격하면 이 모든 궁상에서 벗어나리라 생각했던 나 자신이 한심스럽게 여겨졌다. 연수원 다닐 때 빌렸던 마이너스 대출이 이제서야 반으로 줄어들었는데 또 다시 빚잔치를 해야 하다니.
“김 검, 저녁에 약속 있나? 술 한잔 하면 좋겠는데?” 아침부터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했더니 부장님이 뜻하지 않게 술을 청하신다. “김 검은 우리 청에 온 지 얼마나 되었지?” “작년에 발령 받았습니다.” “일은 어때? 힘들지 않아? 앞으로 어떻게 살지 생각해 본 적이 있나?” “글쎄요.” “언제 결혼한다고 했었지? 이게 말이야, 5부가 제일 맛있는 것 같아.”
30㎖짜리 양주 잔 속에서 갈색 빛깔 윈저가 춤을 춘다. 연신 폭탄을 말면서 부장님은 계속 말을 잇는다. 내 대답 같은 건 더 이상 필요가 없나 보다.
“이제 때가 된 거 같아. 별일 없으면 나랑 같이 일해 보는 건 어떨까?” 연수원 때 지도교수였던 부장님은 평상시에 당신 의견을 강하게 내세우는 법이 없었다. 검사들은 물론이고 계장이며 갓 들어온 실무관이며 세세하게 배려해주고 가끔 부하직원들에게 소주 마실 용돈을 쥐어주시기도 하셨다. 하지만, 그래서 그런지 오히려 잘나가는 윗분들하고는 좀 거리가 있었던 것 같다. 얼마 전에는 차장님하고 의견 다툼이 심했다는 소식도 있었다.
“걱정이 많겠어.” “그러게. 요즘 상황도 별로 안 좋은 것 같던데. 그래도 부장님하고 같이 하는 거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은 하는데, 역시 만만치 않겠지?” “나와 보면 알겠지만, 사건이 많이 줄었어. 큰 로펌들이 덤핑한다는 소리도 있고. 결국 애꿎은 우리만 죽어나는 거지.”
서 변호사가 눈썹을 찡그리면서 걱정스러운 듯 입술을 깨물고 있다. 파스타 집에서 우연찮게 조우한 이후 언제부터인가 그는 항상 그림자처럼 내 곁을 지키고 있었다.
‘잘 들어갔어요?’라는 안부 문자를 시작으로 그와 나는 심심찮게 문자를 주고받았다. ‘오늘 뭐했어요?’, ‘갑자기 좀 보고 싶네.’, ‘정말?’ ‘ㅋㅋ 아니 거짓말. 나는 임자 있는 사람은 좀 싫더라.’, ‘치~’ 유치한 문자질이 일상이 되어가고 부장과의 폭탄 파티를 마친 지금, 나는 그와 함께 한강변에 앉아서 별을 헤고 있다.
“아까 부장님하고 너무 많이 마셨나봐.” “왜?” “얼굴이 빨개!” “아니야. 좀 추워서 그래.” “그래? 그럼 이만 집으로 갈까?” “좀만 더 있다가.” “그래? 그럼. 이렇게 할까?”
갑자기 그의 두툼한 손이 볼을 감싼다. 크고 따스한 손이다.
“뭐야? 하지마!” 깜짝 놀란 듯이 얼굴을 빼보지만, 그는 작은 내 머리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살짝 손에 힘을 주고 있다.
“빼지마. 잠깐만 이렇게 있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나는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다가 이마를 매만진다. 마치 그림이라도 그리듯이 코를, 입술을, 그리고 턱을 따라 내려가던 그의 숨결이 천천히 목덜미까지 닿았다. 귓볼이 달아올랐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그의 온기가 온 몸을 간질이고 있었다. 정말 취기가 올라오고 있나보다. 갑자기 숨이 가빠지고, 무언가 참을 수 없는 느낌이다.
식사를 하면서도 혹시 문자가 와 있지는 않을까 핸드폰을 계속 만지작거리는 나를 보면서 경수 씨는 이상한 듯 핀잔을 주고 있었다.
“누구 문자를 그렇게 기다리는 거야? 너 요즘 바람났냐?” “바람은 무슨 바람이야? 사람을 뭘로 보고.” “요즘 자꾸 딴 생각하는 것 같고, 만나자고 하면 바쁘다고 하고 평소하고 좀 달라진 것 같으니까 그렇지.” “내가 언제는 안 바빴어?” “그래도, 좀 이상해.” “도대체 자기는 뭐야? 내 입장을 생각하고 말하는 거야? 내가 바람이나 필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야? 그러면 나도 정말 좋겠어. 집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계속 일이 터지고,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짜증나고 걱정스러워 죽겠는데.” 필요 이상으로 악다구니를 쓰며 화를 내는 나를 보며 경수 씨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그럼, 그날 밤은 어떻게 된 건데?” “그날 밤? 그날 밤이라니 무슨 말이야?”

‘그 여자 A’ 첫번째 이야기는 제355호 변협신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