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하고 따뜻한 세상 만들어 갔으면”
박연철 변호사는 안개 같은 신비감을 풍기는 인물이다. 외형적으로는 성실하고 바쁘게 뛰는 변호사이다. 그러나 그는 법조인의 건조성이나 틀에 찍어 만든 듯한 획일성에서 벗어나 있다. 그가 가을 계곡물을 연상하는 맑은 시인이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른다. 그는 얼마 전 ‘겨울 푸른 하늘’이란 시집을 냈다. 언어를 물감처럼 주물러서 오랜 세월 그의 영혼을 지배해 왔던 사유의 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그의 주변 공기는 신앙으로 짙게 물들어 있다. 그러나 그 신앙은 회칠한 무덤 같은 바리새인의 율법주의가 아닌 것 같다. 그는 현대의 대리석과 금속으로 번쩍거리는 교회를 초월해 있다. 어쩌면 광야에서 절대자의 음성을 직접 듣지 않았나 하는 의문도 드는 사람이다. 자유로운 종교인다운 신선함 뒤에 그에게서는 또 다른 그림자가 얼핏 보인다. 차분한 관념적 혁명가의 실루엣이다. 그 혁명은 대중의 증오를 규합한 지배층만 바꾸는 사기극은 아니다. 힘없는 소외된 사람들이 공평하고 따뜻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말하는 지도 모른다. 변호사지만 그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전문분야를 만들어 특화를 하고 돈을 추구하는 게 보통의 변호사들의 모습이라면 그는 투사였다. 전두환과 노태우를 처벌하지 말자는 쪽으로 결정해 가는 헌법재판관을 향해 과감히 기피신청을 한 대열에 서 있던 인물이다. 그는 오랫동안 민변을 조용히 이끌어온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지난달 14일 오후 3시경 교대역 근처에 있는 그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사무실 바닥에는 자료들이 어지럽게 쌓여있다. 창가에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의 기록들이 열병식을 하듯 도열해 있었다. 그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핵심위원이기도 했었다. 하얀 백발에 눈썹까지 센 박연철 변호사가 나를 맞이했다. 신선같은 외모의 그는 활동만은 강철 같았다. 오후 공판이 있어 많은 시간을 얻을 수 없었다. 바로 질문으로 들어갔다.
“변호사란 직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내가 알고 싶은 건 독특한 스타일을 취해온 그의 직업에 대한 인식이었다.
“정시에 출퇴근을 안 해도 되고 자기가 선택한 주제에 적당한 비중을 정해 살아갈 수 있는 자유로운 직업이죠. 사회나 나라를 위해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집단지성이고 그러면서도 집이나 아이들 교육 그리고 자기발전을 위한 수입을 얻을 수 있죠.”
그는 속삭이는 듯한 조용한 어조로 압축된 정의를 내놓았다. 그가 신중히 뭔가 생각하는 표정이다가 말을 계속했다.
“변호사로서 무엇에 역점을 둘까가 중요하죠. 어떤 이들은 전문화·특화된 사무실을 하죠. 그것은 바람직한 성취죠. 또 다른 변호사들은 소외계층이나 억압받는 이들의 친구가 되는 민주화에 끼어들어 한 세상을 살기도 했죠. 두 진로가 병행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그의 철학이 말의 틈새를 타고 연기같이 흘러 나왔다.
“대학시절 반독재 투쟁을 하신 것 같은데 얘기좀 해주시죠.”
내가 말을 꺼냈다. 나는 그 같은 사람에게 일종의 채무의식도 가지고 있다. 대학시절 나는 출세를 위해 유신헌법을 달달 외웠다. 그러나 그는 독재 헌법을 깨기 위해 몸을 던졌다. 세상의 모순을 일찍 보고 파수꾼의 역할을 했었다.
“서울법대 시절 조영래, 박세일, 이신범이 활약하는 사회법 학회와 궤도를 같이하고 잡지 피데스의 편집위원으로 3년간 활동했어요. 독재정권하에서 정치인이나 관료들 그리고 투기꾼이 합쳐 차관을 떼먹고 개발이익을 가로채고 노동자의 임금을 착취하는 암흑같은 세상에 반대해서 투쟁을 했었죠. 고시공부에 뜻을 두지 않고 대학졸업하고 군대 갔다가 온 후 율산에 취직을 했어요. 아버님이 아프시고 당장 가족들의 호구지책이 있어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내가 다니던 회사인 율산이 기울었죠. 그래서 고향인 광주에 가서 취직을 했는데 그때 광주항쟁이 벌어지는 한 가운데 있게 됐어요.
시민군으로 총을 들고 저항할 것인가에 대해 상당히 고민을 했죠. 시민군 지도자로 투철했던 윤상원 씨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해요. 용감한 법조인도 봤어요. 광주변호사회 회장을 하시던 이기홍 변호사가 지도자였어요. 검사장을 하던 배명인 씨는 시민들에게 질서를 지키자고 연설하려는 걸 사람들이 말렸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매일 시신들이 도청 쪽 무덕관으로 실려오는 걸 보면서 앞으로는 변호사가 되어 사회에 참여하겠다는 생각을 했었죠. 약간은 나약한 우회적인 선택이었는지도 모르죠.”
그는 뒤늦게 25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가 계속했다.
“사법연수원에 있을 때 조영래 변호사가 1년간 매달 20만 원씩 대줬죠. 연수원을 수료하고 인권변호사 1세대의 뒤를 좇아 정법회에 참여했죠. 2년 후 민변이 발족하고 지금까지 같이 가는 겁니다. 요즈음 느끼는 결론은 인간이 가장 중요하므로 우리가 사상논쟁은 초월해야 한다는 겁니다. 극우나 극좌의 맹목성을 벗어나야죠. 정책의 중점을 노동자나 서민에게 둔다고 무조건 종북세력으로 매도하는 건 이제 성숙된 민주사회에서 삼가야 할 게 아닌가 생각해요.”
그가 잠시 다시 신중히 생각하는 표정이다가 말을 계속했다.
“사회정책을 경영자와 노동자 중 어느 쪽에 중점을 두느냐 정치를 실질적으로 서민층을 주체로 할 것이냐의 문제가 있습니다. 노동자층도 살펴보면 자기들이 이 사회를 주도해야 한다는 부류도 있고 잘 따라가자는 사람들도 있어요. 북한문제도 그렇습니다. 북한을 적대적으로 다루느냐 화합적으로 가야 하느냐에 따라 의견이 다를 수 있죠. 제 경우는 화합하자는 쪽이죠. 그렇지만 북한 주민과 동떨어져 세습을 하는 김정일까지 감싸자는 그런 입장은 아니죠.”
그는 막연한 관념주의자가 아니고 이미 경험을 통해 체계화된 비젼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화제를 돌렸다. 2007년 5월경 ‘강아지 똥’이라는 동화로 유명한 권정생씨가 자신의 모든 재산을 소외된 모든 어린이들을 위해 써달라고 유언하고 사망했다. 작가 권정생은 유언장에서 박연철 변호사를 세 사람의 유언집행자 중 한 명으로 지정했다. 그 사연을 물어보았다.
“1986년경 큰 애한테 무슨 책을 사줄까 고민하다가 권정생 씨가 쓴 ‘하나님의 눈물’이라는 동화책을 사줬지. 그걸 읽고 나도 감명을 받아 그분에게 편지를 보냈어. 그리고 1년 후 경상도 영천을 가는 길에 그분 집에 들러 하룻밤을 묵으면서 여러 얘기를 했었지. 그분 사진을 보여줄께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 책상 구석에 있는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머리가 빠지고 힘이 없어 보이는 노인이 하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박 변호사가 계속했다.
“그분이 남긴재산이 11억 원이고 인세가 매년 1억 원 이상 지속적으로 들어오죠. 그걸로 어린이 문화재단을 만들어 어려운 아이들을 돕고 있어요. 그분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영적인 거인이죠. 수많은 사람들의 혼탁한 영혼이 그분에 의해 걸러졌으니까요.”
그는 권정생재단의 업무를 가장 보람있게 여긴다고 했다. 그의 투쟁하고 헌신하는 삶의 윤곽을 대충 짐작할 것 같았다. 이제 그의 현실적인 삶의 모습을 알고 싶었다.
“그동안 돈을 얼마나 벌었습니까?”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솔직히 말하죠. 변호사로 열심히 일하니까 돈을 벌게 됩디다. 못 벌었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성공보수로 수천만 원씩을 받은 적이 세 번 있어요. 내가 벌어서 집을 샀고 아이들 대학유학까지 무사히 마쳤는데 변호사 수입이 아니면 어떻게 감당했겠습니까? 번 돈을 술을 마시는 데도 써 봤어요. 지금 술값 외상이 없으니 그만하면 된 거죠. 다만 더 욕심을 낸다면 내가 아이가 셋인데 방이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의 말 중에는 가진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배어 있었다.
“주위의 변호사들 중에서 눈을 찡그리게 하는 싫은 모습이 있다면 어떤 걸까요?”
내가 방향을 바꾸어 물었다.
“사람을 싫어하지는 않으나 너무 귀족화 되어 있거나 의뢰인의 딱한 형편을 너무 외면하는 변호사들은 싫죠. 재산도 있고 문화지향적이지만 국민하고 같이 살아주지 않는 사람을 저는 귀족취향이라고 봅니다. 저는 이 나라를 큰 마음으로 지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그런 변호사들이 많이 나왔으면 합니다. 이제 우리도 진정한 일류 문화국가가 되어야죠. 중국은 너무 커서 비합리적인 부분이 눈에 띄죠. 중국의 인권변호사들 보세요. 공안들이 가서 때리고 밟고 개같이 취급하잖아요? 천황제를 가진 일본도 이상한 부분이 많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겸손한 심성을 갖춘 능력있는 지도자가 나오면 우리는 잘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글로벌하고 에버래스팅한 인물들이 이제 보이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버킷 리스트가 있다면 말해보세요.”
내가 물었다.
“이제 변호사도 60살이 넘었으면 접을 때가 됐죠. 소원이 있다면 양평에 가서 정원이 있는 30평 정도의 내 집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노인 네트웍스의 일원으로 구석에 목공실을 만들어 의자나 가구를 만들어 이웃에 선물하고 마을 사람들과 서로 웃고 사랑하면서 나머지 인생을 보내고 싶어요.”
그는 재판시간이 됐는지 양복자켓을 입고 오랫동안 가지고 다니던 두툼한 가방을 손에 들었다.
“참, 잠깐만”
그가 뭔가 떠오른 듯 구석에서 찾아 내 앞으로 가지고 왔다. 오래된 성경이었다. 그가 뒤적거리면서 뭔가 찾고 있었다.
“내가 진짜 꼭 해주고 싶은 말은 시편 48편 2절이야.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하는… 이거 읽어봐. 이게 내가 가장 바라는 거죠.”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