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가정 돕는 일에 큰 보람”

법조계의 스타일리스트
임준호 변호사는 법조계에서는 보기 드문 스타일리스트다. 얼굴선이 고운 미남에, 눈에 띄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색의 조화를 이루는 패션 감각을 가진 멋쟁이다. 어쩌면 국립발레단 단장인 아름다운 아내의 고상한 취향 탓인지도 모른다. 그는 삶에서도 축복을 받은 것 같다. 명문인 광주일고와 서울대를 졸업하고 25세에 사법시험을 수석으로 합격했다. 서울의 법원에서 판사를 시작해서 성공으로 가는 탄탄한 길을 걸었다. 미국유학을 하고 지원장을 지내고 판사 중의 엘리트가 모여드는 헌법재판소, 대법원에서 부장판사로서 핵심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사표를 내고 법원에서 사라졌다.
얼마 전 경상북도 청도의 한 마을에 50대 중반의 남자가 나타났다. 아기를 낳은 지 16일 만에 베트남에서 시집을 온 아내가 남편의 칼에 무자비하게 살해된 곳이다. 베트남에서 전문대를 졸업하고 12살이 많은 한국 남자에게 시집을 왔던 베트남 여인 황티남은 부자나라 한국에 시집을 가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결혼중매회사의 달콤한 말을 듣고 왔다. 그러나 시어머니와 남편에게 그녀는 노예였다. 친정에 몇백 불을 부쳐준 게 남편과 시어머니에게는 눈의 가시였던 것 같았다. 성당에서 치러지는 장례식에 일대의 2백여 가구의 시집 온 베트남 여자들이 모여 눈물을 흘렸다. 남편과 시어머니는 갓 태어난 그들의 혈육인 손자마저 키우길 거부했다. 고향에서 죽은 베트남 여인의 친정엄마가 오고, 미국에 사는 언니가 왔다. 언니는 아이를 자기가 미국으로 데려다 키우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법적절차에 따라 입양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없었다. 실질적인 도움이 절실했다.

베트남 여인 장례식장에 나타난 신사
장례식장을 찾아온 오십대 중반의 신사는 경찰서를 찾아가 수사상황을 확인하고 죽은 베트남 여인의 친정식구들을 만나 대신 위로했다. 그리고 아기가 입양될 수 있도록 법적절차를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얼핏 보면 친정아버지쯤의 행동으로 비칠 수 있는 따뜻한 행동이었다. 그 신사는 법원에서 사라진 임준호 판사였다. 잘나가던 엘리트 판사 시절과는 전혀 다른 변신이었다. 그는 공익단체인 대한변협의 사업이사일을 자청해서 다문화가정을 돕고 통일에 대비한 인터넷 아카데미 사업에 정열을 바치고 있다.

2011년 6월 7일 오후 5시경 광화문 근처의 커피점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대형로펌인 세종에서 기업인수와 합병분야의 일을 오랫동안 해 온 것 같았다. 그에게 다문화 가정을 돌보는 일을 하게 된 계기를 물었다.
“2013년을 기점으로 우리나라는 인구가 줄어듭니다. 거기에 연관되어 경제도 점차 축소될 거라고 봅니다. 그걸 막고 우리가 더욱 선진국으로 가려면 인구가 유입돼야 하는데 그걸 위해서는 다문화가정을 받아들이고 통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외국인 노동자가 120만이고 20만 가구가 다문화가정입니다. 베트남이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죠. 그런데 사람들이 외국인들을 부드럽게 받아들이지 않는 거예요. 외국인도 가족으로 생각해야지 노예라도 산 것처럼 졸부근성을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교만한거죠. 베트남 여자 살해사건을 보면서 정말 잘산다는 게 뭔지 그리고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야하나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더라구요.”
그는 변협에서 다문화가정에 대한 체류자격연장, 국적, 비자, 양육권, 난민문제 해결을 적극 주도하고 있다. 그는 판사 시절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변호사가 되어 있었다.

"넓은 세상을 봤습니다"
“왜 변호사가 됐죠?”
내가 물었다. 안정된 환경에서 무난히 대법관을 향해 갈 수 있던 사람이다.
“더 넓은 세상이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뛰쳐 나왔죠. 내 생각이 맞았어요. 재판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광활한 분야가 보였죠. 변호사의 활동영역이 정말 넓더라구요. 기업을 보면서 예방법학이 중요하다는 걸 배웠습니다. 계약서 한장 잘 만드는 건 병으로 치면 예방주사죠. 도중에 점검을 해서 사고를 방지하는 건 감기몸살쯤을 치료하는 거라고 할까? 그런 일들이 실제 기업자문에서 대부분을 차지하죠. 막상 재판은 극히 일부죠. 그리고 거기 가면 암에 걸린 것 같이 되돌이킬 수 없는 경우가 많아요. 변호사의 블루오션이 따로 있었어요.”
그의 말을 들으면서 마치 처음 보는 드넓은 바다를 본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성공한 변호사이기도 했다. 그가 요즈음 법조계 관심사인 로스쿨 출신의 예비 변호사들을 떠올렸는지 이렇게 말했다.
“로스쿨생들이 두려움이 많은 것 같은데 절대로 미래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제 생각으로 그 사람들은 법조계가 변화하는 이런 시기에 기존의 법률가인 우리가 전혀 몰랐던 새로운 영역을 창출할 겁니다. 소송업무나 기업 컨설팅보다 더 큰 영역을 찾아낼 거예요. 저는 앞으로 그 사람들이 기업을 만들고 경영까지 할 게 틀림없다고 봅니다. 벌써 통신회사나 은행을 인수한 변호사도 있고, 친한 동기생은 베네통 사장을 하고 있죠. 내년부터 새로 배출되는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을 보면 신천지의 보물을 찾아나서는 선원들 같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니까요.”
그의 영리한 머리는 수평선 저쪽의 새로운 세계가 있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 그와 같이 천재성을 가진 사람들은 남이 보지 못하는 걸 먼저 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바다가 보였어도 쉽게 뛰어들 수는 없다. 그가 잘나가던 판사를 그만둔 데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또 다른 숨은 이유를 알고 싶어 우회해서 물었다.
“판사로 있으면서 분노했거나 아팠던 일이 뭐였죠?”
순간 그가 뭔가 심각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뭐, 이제는 얘기해도 될 거 같네…”
그가 한마디 툭 내뱉으면서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헌법재판소에 있을 때였어요.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을 처벌할 것이냐가 심판대상으로 올라와 있었죠. 검찰은 성공한 반란은 처벌할 수 없다고 주장했죠. 제가 보기에는 엉터리 논리였죠. 살인범이 국가기관의 총수가 됐으니까 사실적으로 처벌할 수 없었던 거지 법이론적으로 그런 건 아니죠. 검찰의 주장이 맞아 들어갈 수 있는 경우는 독립운동과정에서 살인을 하고 해방이 됐다면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광주문제는 그렇지 않았어요. 저는 광주문제를 조사한 10만 쪽에 해당하는 기록들을 봤어요. 육군대위가 지나가는 시내버스에 M-60기관총을 난사했어요. 그 안에서 장을 보러가던 아주머니가 쓰러지고 하교를 하던 여학생이 피를 쏟고 죽었어요. 기관총으로 학살을 한 그 대위가 그날 저녁 식당에 가서 괴로운 심정을 토로했어요. 그 얘기를 들은 식당주인의 진술서도 수사기록에 확보되어 있더라구요. 성공한 반란이라 면책된다는 이론은 말이 안됐죠. 그런 살인을 다 덮으라는 얘기였죠.”

분노의 기억
그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높아지고 있었다. “상관인 헌법재판관이 나를 불러 처벌할 수 없는 거로 하라고 결론을 먼저 주면서 그 논리를 구성하라고 하더라구요. 그걸 거부했더니 다른 기관에서 협박이 오더라구요. 판사로 제대로 뻗어가려면 그러지 말라구요. 대통령도 정치적 타협을 했는지 모든 건 역사에 맡기겠다고 발표하더라구요. 전두환이나 노태우를 봐주겠다는 거죠. 거의 그렇게 굳어갈 무렵 노태우가 수천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게 경호실장의 입에서 폭로가 됐어요. 국민여론이 다시 악화되니까 역사에 맡기자고 했던 대통령도 특별법을 만들어 그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다시 발표하구요. 그 일을 겪으면서 정말 내가 판사를 해야 하나를 고민했었죠.”
인간 내면의 깊은 곳은 항상 복잡한 원인들이 지층구조를 가지기 마련이었다. 그가 계속했다.
“저도 아버지가 군인출신이었어요. 여유있는 가정이 아니죠. 지방의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몸이 허약한 학생이었구요. 로펌의 변호사를 하면서 재벌 3세들이 고상한 옷을 입고 자기네들끼리 클럽을 만들어 우아하게 사는 걸 보면 행복하게 보이기도 하고 부럽기도 합니다. 사법시험을 보고 벌써 30년 가까이 세월이 훌쩍 가버렸는데 이제부터는 내가 가진 재능을 이 사회에 바치려고 합니다. 그게 나름대로 행복을 찾는 길 같아서요.”
그는 세상이 썩지 않는 소금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미워하는 것
변호사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문득 로펌에 근무하는 그는 어떤 걸 싫어할 까 궁금했다. “변호사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어떤 걸까요?”
반면교사로서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저는 재판에서 거짓말 하는 변호사를 제일 싫어합니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로펌을 봤어요. 절대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재판을 게임으로 간주하는 거죠. 재판을 도박장같이 여기는 변호사들을 싫어합니다. 수백 억을 횡령한 재벌회장의 죄가 백지화되는 그런 법정에 정의가 있겠습니까? 돈을 떼어먹어도 되게 하고 죄를 지어도 처벌을 받지 않게 하는 변호사들을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재벌회장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거액을 챙기는 로펌을 그는 성토했다. 그 자신이 대형로펌에 소속된 변호사이기 때문에 더 잘 아는 것 같았다. 그가 그걸 의식한 듯 말을 계속했다.
“저도 거액의 비자금을 정치인에게 준 재벌 사건을 취급하면서 대검 중수부장과 여러 차례 협상을 한 적이 있어요. 그렇지만 그 자리에서도 절대 거짓말은 하지 않았어요. 변호사는 기본적으로 진실에 협력해야지 사실을 왜곡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는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모두들 혼자만의 성공을 위해 위로만 위로만 쳐다보고 사다리를 오르는 각박한 세상이다. 그 같이 아래로 내려와 세상과 함께 하는 사람을 보면 그래도 살맛이 나는 것 같다. 그는 며칠 전에도 내년부터 쏟아질 로스쿨의 변호사들을 위해 경찰청장을 찾아가 협상을 했다가 언론의 비난을 받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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