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이야기

‘생각하는 숲’ 노영희 변호사 코너에서는 앞으로 몇 달에 걸쳐 짤막한 소설을 연재할 예정입니다.

뜬금없이 맥주 한 잔 하자면서 대학 동창 영애가 찾아와 하소연을 했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100만 원을 빌려줬어. 그런데 갚을 날이 다가오자 그 사람이 이러 이러한 사정이 생겨서 100만 원을 못 갚을 것 같으니 50만 원만 더 빌려달라는 거야. 그러면 150만 원을 한꺼번에 갚겠다면서.” “그래서 돈을 빌려줬어? 절대 안 돼. 결국 못 받았지?” “그러게, 나는 정말 바본가 봐. 50만 원을 더 빌려주면 확실히 몽땅 갚겠다고 하는데 안 빌려줄 수가 있어야지. 안 빌려주면 100만 원을 확실히 못 받는 거고, 더 빌려주면 어쨌든 돈을 건질 확률이 높아지는 거잖아.” 결국 그녀는 돈을 빌려주고 100만 원이 아닌 150만 원을 잃게 되었다는 말이다.

심리학에서는 영애와 같은 의사 결정 유형을 ‘매몰 비용 오류(sunk cost fallacy)’라고 말하고 생물학에서는 ‘콩코드 오류(concorde fallacy)’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미 투입된 비용이 아까와서 오히려 점점 더 비합리적으로 나쁜 결정을 하게 되는 경우를 일컫는 것인데, 이런 유형의 오류는 오로지 사람에게만 있다고 한다. 다른 동물은 중단할 때를 안다나 뭐라나.

어쨌건, 나는 영애의 하소연을 듣고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내가 그를 만난 건 검사 초년병 시절, 선배언니 결혼식장에서였는데, 약간 갸름하고 핸섬한 얼굴의 그는 매우 매력적이고 친절했다. 처음에는 새침한 여고생처럼 까다롭게 굴었지만 사무실로 꽃다발을 보낸다든가 매일 매일 잊지 않고 문자를 해주는 자상함이 어느새 내 마음을 끝도 없이 녹이고 있었다. 연일 계속되는 야근 때문에 사적인 시간을 낼 수도 없었지만 특히 어줍잖게 거짓말이나 해대는 피의자들을 상대하다보면 안그래도 윤기없는 얼굴에 느느니 주름뿐이고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처럼 느껴졌었다.
그때 옆에서 아무리 억지를 부려도 다 웃어주는 그를 만나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마치 내가 화를 내는 일 따위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닌 듯 느껴지기도 했었다. 처음에는 그에게 아주 조금의 마음만 허락하자고 했건만, 그 허락의 틈새가 나도 모르게 점점 커져서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제는 더 이상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내가 시간뿐 아니라 몸과 마음까지 전부 내어주면서 모든 것을 쏟아 부으면 부을수록 그는 점점 내 맘에 들지 않게 되었다. 그의 천성적 게으름이나 부족한 이해심, 그리고 끝도 없는 불성실이 못마땅하게 여겨졌고 능력도 안되면서 허풍만 치는 꼴을 더 이상 보고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그가 평범한 샐러리맨인 것도 싫었고, 매일 매일 이유도 없이 마시는 술이 지겨웠고 호기롭게 외쳐대는 ‘남자란 그런거야’라는 말이 지긋지긋해졌기 때문이다.

영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결국 그와 나를 이어주는 끈이 점점 얇아지고 닳아 없어지게 되었는데도 내가 왜 그와 헤어지지 못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건 그동안 내가 우리 둘의 관계에 쏟아 부었던 투자 비용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제 와서 헤어지는 길을 택하게 되면 그와 만났던 3년이라는 시간은 어디에서 보상받을 수 있을까? 차라리 조금만 더 참고 그를 이해하고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조금씩 고쳐나가는 것이 더 나은 해결책이 아닐까? 아니, 지난 시간을 아까워 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이 관계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앞으로의 30년을 위해서?

“얘, 뭐하니? 오랜만에 만나서 하소연 좀 하려고 했더니 얘가 영 집중을 안 하네.” 영애는 서운한 감정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나서는 약속이 있다면서 서둘러 호프집을 떠나버렸다. 살이 쪄서 그런가, 유난히 둔해 보이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또 다시 멍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테이블에는 먹다 남은 파스타와 냅킨이 뒹굴고 있었고, 옅은 립스틱 자욱이 번져있는 맥주 컵만이 허무하게 놓여있었다.

“여기서 뭐하십니까? 아까는 친구 분이랑 같이 계셔서 아는 척을 못했습니다만.” 갑자기 두툼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내 정신을 불러 일으킨다. “네?” 그는 내가 고양에서 공판 검사하던 시절에 가끔 법정에서 마주쳤던 국선이었다. 항상 구겨진 와이셔츠에 검정색 뿔테 안경을 쓰고 재판장이 무언가를 물으면 얼굴이 금방 시뻘게지곤 했었는데, 특별히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지만, 그 재판부 전담이었기에 얼굴은 익히 알고 있었던 터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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