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회장으로서 한일변호사회정례교류회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매년 번갈아 방문하는 교류회의 일환이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참석신청을 하였다.

2010년 9월 17일(금)부터 19(일)까지 2박3일간의 동경방문이었고, 한국 측 일행은 23명이었다.

새벽 4시 30분 공항버스를 타고 여행을 시작하여 10시 45분 하네다공항에 도착하였고, 오후에는 일본최고재판소와 동경지방법원을 방문하였다. 당초 혼자 상상했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모습이었다. 모든 부분에서 우리보다 약간 앞서가는 일본의 사법제도이지만, 지방법원의 소위 IT법정은 우리나라의 그것과 별다른 것이 없었다.

17시 30분 아까사카(赤坂)에 있는 프린스호텔에 여장을 풀고 일본변호사연합회 회장이 주최하는 환영만찬장(시나가와크리스탈 요트클럽)으로 향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일변연의 임원 약 30명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회장단 10여 명이 출입구에 도열하고 기다리고 있다가 일일이 악수를 하였다.

원래가 상대에게 예의를 깍듯이 하고 손님을 극진히 모시는 나라이지만 그날따라 빈틈이 없었다. 만찬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사진과 이름을 인쇄하여 배포하고, 자리배석에 있어서도 매우 신경을 썼고, 만찬의 진행도 물샐 틈이 없었다.

간단한 공식행사가 끝나고 만찬에 들어갔다. 지구상의 국민 중 가장 유사점이 많은 한국과 일본 사람이 섞여 앉았다. 언어만 다를 뿐 외형상의 모습이나 표정 그리고 생각마저도 공통점이 많다. 더욱이 사법제도가 매우 유사한 변호사들이 만났으니 자연히 공통 관심사가 많아 대화소재가 풍부했다.

모든 테이블에는 통역관이 배석하였다. 나의 테이블에는 경기북부회장(정환영), 시마네현(縣)의 지방회장인 니시코리 소지(錦織正二) 변호사가 배치되었고, 37세의 재일교포 노총각 변호사가 통역관으로 배석하여, 통역관이라는 구분 없이 모두 대화의 상대가 되었다.

나의 대화상대는 주로 옆좌석의 니시코리(錦織) 변호사였다. 맥주와 소주(한국에서 수입한 것)를 번갈아 권하면서 많은 대화를 하였다. 일변연의 부회장은 주로 지방회장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많은 부회장들이 동경과의 거리가 멀어 부회장 임기 동안은 주로 동경에 거주하면서 가끔 고향에 가고, 니시코리 씨는 한 달에 2번 집에 간단다. 그에 따른 비용의 일부를 연합회에서 받지만 태부족이어서 봉사하는 마음으로 부회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지방회는 52개가 있고 지방회장은 동경, 오사카 등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하려는 사람이 없어서 할 수 없이 나이가 많은 원로변호사들이 떠밀려 맡고 있다. 변호사 1인당 회비는 연합회비와 지방회비를 합하여 월 5~6만 엔(약 60만 원)을 납부하고 있고 그 외에 특별회비(월 2~3만 엔)를 한시적으로 출연하여 사회사업을 하고 있는데 기간을 갱신하여 특별회비출연기간이 자꾸 늘어난단다.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되는 많은 금액이다.

부장판사의 연봉이 약 2천만 엔(약 2억4천만 원)이고 초임 변호사와 판사의 평균수입이 비슷하다. 일본에서는 한 번 판사와 검사로 임관하면 정년까지 채우는 것이 통례이고 중간에 퇴직을 하면, 우리나라의 행정공무원이 중도하차한 것과 마찬가지로, 좋지 않은 일로 퇴직을 한 것이 아닌가 의심을 받아 사건 수임을 제대로 하지 못한단다. 우리나라의 전관예우라는 말을 들으면 모두들 갸우뚱한다.

변호사들은 사법부의 제도에 대하여 소극적이고, 우리의 경우처럼 변협이 대법원에 ‘대법관 수를 늘려라’, ‘판결문을 전면 공개하라’는 등의 요구를 하는 것에 놀라워 하면서 일본도 본받아야 한다는 의견이다.

재일교포는 과거에는 변호사가 될 수 없었는데 교포 한 분(故 김경득 변호사)이 일본최고재판소까지 가는 투쟁을 벌인 끝에 변호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려 현재 100명 정도가 재일교포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위 김경득 변호사의 아들 역시 변호사(김창호)로서 오늘 아침 조찬 때 우리를 찾아왔다. 그의 여동생도 올해 사법시험에 합격했단다.

귀화를 하면 판사와 검사로 임명될 수가 있는데, 많은 변호사들이 귀화를 하지 않고 불편을 감내하면서 살고 있다. 한국인이라는 깊은 뿌리의식이 그들의 운신의 폭을 줄이는 게 아닌가싶다.
정해진 시간이 흘러 호텔로 돌어왔다. 몸살기가 있어 곧 잠에 들었다.

다음날(9월 18일) 아침 9시에 일변연으로 향했다. 일정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세미나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50명 정도가 세미나를 할 수 있도록 10명분의 테이블이 우리 쪽에는 2줄, 일본 쪽에는 3줄로 한국변호사와 일본변호사가 마주보고 앉도록 진열되어 있었다. 자리에 커다란 종이명패가 세워져 있어 자리를 옮길 수도 없었고, 두툼한 파일과 동시통역 이어폰이 놓여 있었다.

대충 격식을 갖추고 사진촬영이나 하고 마치는 것이겠지 하는 마음으로 개회식을 맞았다.

양국 회장의 기조연설이 있었고, 간단한 선물교환이 있은 후, 드디어 세미나가 시작되면서 나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배포된 파일의 내용을 생략한다고 하면서도 거의 빠짐없이 읽어가며 주제발표를 했고, 이에 대한 상대국의 질문을 듣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놀라운 일은 나이가 최소 40대이고 일본 측의 한두 명은 70세가 넘어 보이는데, 그토록 진지하게 경청하면서 질문을 쏟아부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고, 일본 측의 주제발표 후에는 우리 측의 질문 역시 쇄도했는데 이에 대한 답변 역시 진지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한결 같이 대학입학을 준비하는 고3 수험생만큼이나 열성적이었다.

한국과 일본은 오랫동안 거의 같은 사법제도가 시행되었고, 변호사가 되기 위한 공부 및 시험방법, 변호사가 된 이후에 살아가는 방법, 사건 수임절차 및 수입의 정도, 사용하는 법률용어 등 모든 면에서 대동소이하여 어떠한 말을 하여도 쉽게 이해되는데다가, 주제의 내용이 모두 최근의 당면문제들이어서 관심도 많아, 진행자가 쏟아지는 질문을 제재하느라 진땀을 흘렸고 자연히 정해진 시간보다 뒤쳐져 세미나가 진행되었다.

주제의 내용이 청년변호사의 고용불황, 인권, 로스쿨의 문제점, 고리사채업자들로 인한 피해 및 해결방안 등등, 주로 현재 양국에서 문제점으로 부각된 것과 이에 대한 개선책, 한쪽에서는 이미 문제점으로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곧 현실화될 것이 분명한 것들에 대한 사전 예방책, 사회문제에 대하여 변호사들이 열정적으로 노력하여 성공한 사례를 발표함으로써 다른 쪽이 곧 우리도 시행하자고 마음을 먹게 하는 것 등, 한일 양국의 사법제도발전을 위하여 그야말로 금싸라기 같은 시간으로 채워가고 있었다.

점심은 같은 건물 지하에 미리 마련한 도시락으로 때우고 곧 오후 세미나가 시작되었다. 일본에 오느라 새벽잠을 설치고 외국에서의 첫날밤에 잠을 잘 잤을 리 없다. 점심 이후 강행되는 세미나에 눈꺼풀이 자꾸 아래로 당겨졌다. 화장실 갈 시간도 없었고, 음료수를 세미나실에 비치해 놓아 밖에 나갈 핑계도 없었다. 곧 잠이 달아났고 예정보다 훨씬 늦게 세미나가 끝났다.

몇 차례 동경을 왔었지만 일본 사회의 엘리트(변호사)들과 시간을 보낸 것은 처음이고, 그것도 양국의 사법제도상의 문제점들에 대하여 하루 종일 세미나를 하면서 가슴이 뿌듯했던 것도 처음이다. 하루 종일 수없이 시선이 마주치면서 이미 얼굴을 익숙하게 익혔고, 세미나가 끝날 때는 한 학기를 마친 급우가 된 기분이다.

이어 송별만찬이 이어졌다. 원탁테이블인데 이번에도 내 자리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옆자리에 일본변호사 다나베 다카요시(田邊宜克)가, 맞은편 자리에 다까기 미쓰하루(高木光春)가 앉았고, 역시 일본통역인으로 재일교포변호사가 앉았다. 모두들 피곤하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술도 마신 상태이어서 분위기가 너무 화기애애하고 시끌벅적하여 제대로 대화를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아직 덜 취한 구석이 있을 때 우리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일본변호사들이 2차로 우리 모두를 최고급 노래방으로 안내했다. 보아하니 아마도 상당한 비용을 지출했으리라. 역시 일본변호사들은 우리와 노는 방식도 같다. 얼굴의 못생긴 정도도 같았고, 술에 취해 즐거워하는 표정, 개중에 노래 잘하는 특출난 사람이 있는 것도 같았다. 첫날밤 같은 자리에서 저녁을 먹었던 니시코리가 오늘도 옆자리에 앉았다. 어제보다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밤이라도 새울 것 같은 분위기지만 또 다른 내일이 있어 우리는 헤어져야 했다.
언제 또 만날지 기약은 없지만 머잖아 또 만나야지 하는 마음으로, 이별의 포옹을 하면서 팔에 힘이 가해질 때, 오랜 친구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우리를 침략한 적이 있고,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되지’ 하면서도 그 역사 때문에 일본 사람 모두를 미워해왔지만, 아마도 일본의 보통사람들은 그러한 과거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우리를 순수하게 대해준다는 사실을, 이번에 확실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자칫 업무핑계로 일본에 못 왔을 수도 있었는데 이렇게 와서 값진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정말 다행이었다.

공식 일정이 끝나서 호텔로 돌아온 뒤 ‘이번 방문 덕택에 일본이 가깝게 느껴지게 되었다’는 말을 했을 때 어금니까지 보이면서 흡족히 웃는 니시코리(錦織) 변호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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