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 호헌 반대 첫 성명 가장 기억나”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하겠나”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에 모두가 숨죽이고 있던 시기, 호헌반대 성명으로 이 땅의 민주주의의 불씨를 일으켰던 대한변협 문인구 전 협회장(조선변호사시험 3회·대한변협 34대 협회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1987년 4월 13일 아침에 대통령 담화방송을 보고 있었어요. 참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더군요. 집에서 성명서를 쭉 썼어요, 사무실에는 정보부, 경찰, 법무부에서 나와 있어서 뭘 할 수가 없었거든요. 그걸 동네 문방구에서 20장을 복사를 했어요.”

정말 엄혹한 시대였군요.
당시는 그랬어요. 집행부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총무과장을 불러 정보부니 사복경찰이니 모두 불러 점심 사준다고 데리고 나가게 했어요. 회의에 들어가 내가 성명을 읽었죠.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하겠냐고 설득했습니다.

다들 발표에 동의하셨나요?
누구 하나가 ‘하시죠’라고 말하자 다들 찬성이었습니다. 다들 한마음이었으니까요. 성명서 한 통씩 편지봉투에 넣고 신문사 이름을 하나씩 써서 직원들에게 직접 가져다주도록 했습니다. 석간에 조그맣게 보도되기 시작하더군요.
반응이 대단했겠는데요.
야당총재인 김영삼 씨도, 김수환 추기경도 아무 말을 못하고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사무실을 못 들어가고 배회하다 들어간 다방에서 우연히 만난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걱정하더군요.
법무부에선 대한변협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며 취소하라고 난리고, 이미 나간 성명을 취소하는 법도 있냐고 버텼죠.

6·29선언을 이끌어낸 민주화운동의 시발점이 된 셈입니다.
저도 시위 언저리에 서성였습니다. 변협성명서를 많이 낭독하더군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나도 모릅니다만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성명서 내신 다음에 잡혀가셨다는 소문도 났었는데요.
하도 사무실 분위기가 흉흉해 들어가질 못하고 한 일주일 주변을 걸어 다녔죠. 잡혀갔다는 소문은 왜 났냐하면 성명을 발표하던 날이 장세동 안기부 정보국장과 저녁을 먹기로 한 날이었어요.
협회장이 되자마자 잡힌 약속이었는데 성명서를 내자 저녁에 바로 취소해버렸죠. 화를 있는 대로 내고.
변협의 국제화를 위해서도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POLA를 창립하셨구요.
87년 5월 법의 날에는 릴리 주한미국대사를 초청하고, 88년에는 가이스너 주한독일대사를 초청,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가이스너에게서 독일 헌법재판소 얘기를 감명깊게 들었습니다. 변호사들에게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죠. 넓은 세상을. 한국에 대한 인식을 제고시키고 국제연대의 중심이 되기 위해 아시아태평양지역 변호사협회장 회의를 만들었습니다. 아시아지역 인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현재 변협의 활발한 국제활동은 정말 잘하는 일입니다.

아시아태평양지역변호사협회장회의(POLA)를 만드는 데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당시 일변연에 혐한감정이 워낙 강했습니다. 유신시대 재일교포유학생들을 간첩으로 몰아 사형을 시키는 등의 일로 인권의 사각지대로 여겨져 혐오감이 심했죠. 6개월 이상을 공을 들이며 ‘언제까지 서양만 따르겠나, 아시아의 인권단체로 키우자’고 설득했죠. ‘1회 대회는 동경에서 치르자’고 먼저 제안해 성사시킬 수 있었습니다.

후배들에게 한 마디 해주시죠.
변호사법 제1조를 가끔 되새기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한다’는 말을 되뇌어보세요.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사회정의를 제대로 실현한 적이 있는가, 변호사가 어떻게 일해야 하는가. 지킬 자신이 없다면 문구를 바꿔야죠.
선배들 옛날 얘기를 편하게 할 수 있는 자리가 좀 마련됐으면 합니다. 후배들에게 살아온 얘기를 들려주고 싶은데 그런 자리가 많지 않네요, 하하.

90살 가까운 나이에도 인자하면서도 꼿꼿한 모습을 보이며 지난 일들을 정확히 이야기 하는 모습에서 ‘올곧은 변호사’의 모습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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