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유엔이 세계인권선언을 승인한 이래로 인권은 점차 확대되었고 구체화되었다. 인권에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인권의 보편성은 이제 논란의 대상도 아니다. 그러나 누구도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인권을 누리고 있다고 감히 말하지 못한다. 상대적인 관점에서 인권을 보아야 한다는 원칙론을 인정하더라도, 인권이 유린되고 차별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단지 우리 눈에 잘 띄지 않고 쉽게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타인의 인권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세계시민으로서의 교양의 문제일까, 아니면 같은 인류로서 가지는 기본적 존엄의 문제일까? 늘상 나의 이해가 관련될 때 인권은 보편성을 상실한다. 그 극단은 나의 죽음이다. 무엇을 나의 생명과 맞바꾼다는 말인가.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가르침은 약간의 불안 앞에서도 여지없이 잊는 것이 우리다.

노인요양병원과 장애인거주시설을 한번 보자. 코로나19는 보고 싶지 않았던 우리 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드러내고 말았다. 나의 죽음이라는 공포 앞에서, 다수의 안전이라는 논리로, 타인의 죽음을 언제든지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는 우리의 민낯을 보았다.

며칠 전 장애인거주시설인 신아원 앞에서 장애인 활동가들이 사다리를 목에 걸고 정문을 쇠사슬로 묶고 시위를 벌였다. 장애인 거주자들의 재입소를 막아 달라는 요구다. 신아원에서 다수의 확진자가 발생하여 분산조치가 됐지만 불과 사흘 만에 재입소가 결정되자 이를 막겠다는 시위가 벌어진 것이다.

장혜영 의원실이 보건복지부에서 제출받은 통계에 따르면 장애인거주시설 19곳 전체 거주인 1158명 중 177명(15.8%)이, 그리고 종사자 725명 중 70명(9.6%)이 코로나에 감염됐다. 미디어오늘의 보도에 의하면 지난 12월 한달 간 코호트 격리된 노인요양병원 14곳에서 996명이 감염되고 그 중 99명이 숨졌다고 한다. 치명률은 10%다. 이 비율이 실감되는가. 전체 국민 대비 현재 확진자 비율은 0.14%이다.

코호트 격리가 불가피했다고 하지만 확진자와 함께 시설에 갇혀 있던, 그래서 결국 함께 확진자가 된 노인과 장애인의 생명에 대해서 어떠한 변명이 가능할까? 팬데믹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진 인류가 당장은 어떤 완벽한 해법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힘없는 사람들이 먼저 죽음에 내몰리는 것을 당연하다고 볼 수 없지 않은가.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초래하게 된 거주시설의 근본적인 문제를 이제는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인권도 성장한다. 아니 성장해야 한다. 많은 전쟁을 거치며 인간의 저 밑바닥 심성을 보았지만 그래도 인류는 인류애를 키워왔듯이 말이다.

‘인권의 발견’이라는 책을 보면, 보편적 인권을 위해서는 ‘감정이입적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타인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마음으로부터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불가피했다는 변명도 버리고,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야 한다. 원했던 원치 않았든 격리된 채 죽음을 맞이했을 분들께 정말 죄송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조원희 변호사

서울회·법무법인 디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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