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사건을 둘러싼 논의들을 지켜보던 중에 ‘가해자 서사’라는 개념을 처음 접했다. 최근 대중화한 개념인 것 같은데, ‘발언권’이라는 관점에서 성범죄와 성차별적 사회구조를 언론이 대하는 방식을 비판하는 데 사용된다.

이는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슬로건으로 요약된다. 포토라인에 선 가해자에게 마이크가 주어지고, 그의 발언을 해석하는 보도가 이어지는 모습이 대표적인 비판의 대상이다. 가해자의 어린 시절이나 불우한 환경 등을 부각한다거나, 평소 보여준 평범한 모습에 대비해 이중성에 초점을 맞추는 기사도 가해자 서사로 비판받는다.

일견 납득할 수 있는 비판이다. 반인권적 범죄의 가해자가 발언권을 얻어 사건의 주인공 행세를 하고, 피해자의 목소리가 묻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기자의 입장에서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가해자 서사를 다루는 보도가 범죄 아닌 사람에 집중하게 만들고, 동정 여론을 유도한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가해자의 과거와 주변을 취재하고 이를 서사로 재구성해 깊이 이해하는 과정은 또 다른 가해자의 탄생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어떤 환경 속에서 한 인간이 반인권적 범죄의 길로 접어들었는지 파악하고, 그 배경에 어떤 사회구조의 문제가 있는지 탐구하고 개선책을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n번방 사건은 이제 곧 본격적인 재판 과정에 접어든다. 재판 과정에서는 가해자에게 ‘피고인’이라는 지위가 추가된다. 기자의 입장에서 형사재판의 주인공은 피고인이다. 사회적 관심을 받는 사건의 재판에서 피고인이 직접 입을 열면, 방청석에 앉은 기자들의 흥분지수도 높아진다.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덩달아 커진다. 성차별적 사회구조 속에서 여성을 착취한 강자로서의 가해자는, 수사기관이라는 국가권력에 맞서는 개인이라는 약자의 성격을 얻는다. 이제 그들은 법적으로 보장받은 절차에 따라 방어권을 행사할 것이다.

피고인이 방어권 차원에서 자신의 서사를 제시할 때, 이를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 그 주장에 설득력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기사 가치가 있다. 다만 그에 접근하는 기자의 태도는 더 세심해져야 할 것이다. 재판 과정에서 피고인이 내놓을 서사는 방어권 보장과 기록의 차원에서 취재하고 보도하되, 이를 너무 극적으로 가공하거나 피해자의 목소리가 묻히도록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재판을 통해 공개될 다른 정보들까지 종합해 사회구조의 개선책도 함께 고민하는 기사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몹시 온당하지만, 실제로는 극도로 도달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빠르고 정확하며 깊이 있는 뉴스’라는 경지에 비할 만하다. 기자로서 나는 이 경지에 도달하는 데에 늘 실패해 왔지만 말이다.

/고동욱 연합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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