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 명제를 놓고 몇 년간 막연한 고민을 하고 있다.

살면서 무수히 많은 경험을 하지만 대부분은 잊혀진다. 그렇다면 현재 이 시점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이 나일까, 아니면 기억엔 없더라도 여태까지의 경험이 쌓여서 내가 되는 것일까. 후자라기엔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행동거지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라서 좀 이상하다.

“기록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 명제는 이해하기가 낫다. 이전에 쓴 기사들을 자주 다시 찾아보는데 놀랄 때가 있다. 내 이름 석 자가 바이라인에 떡하니 나와 있는데도 어떤 정보를 어떻게 취재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기사들이 너무나 많다. 취재 당시 알았을 수십 개 정보들은 기사에 적히지 않으면 몰랐던 것이 된다. 현재에 대한 유일한 증거는 기사이고, 기사는 미래의 기억이 된다.

나는 사법농단 재판 기사를 많이 쓴다. 쓰는 기사의 수 만큼이나 ‘왜 쓰는가’를 생각한다. 기자는 기사를 쓸 수도 있지만 안 쓸 수도 있다. 기자가 기사를 쓰기로 결정한다면 그 이유가 있고, 또 있어야 한다. 사법농단 재판 기사를 쓰지 않을 이유는 여러 가지다. 이 재판은 아침에 시작해 밤에 끝난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재판이 열리는데 한 번 놓치면 흐름을 따라가기가 버겁다. 법원 내부 구조나 돌아가는 사정을 알지 못하면 법정에 쏟아지는 말 자체를 이해하기도 어렵다. 기사를 싫어하는 사람은 널렸다. 치부를 지적해도 좋아할 출입처는 없다.

그럼에도 사법농단 재판 기사를 쓰는 이유는 사건의 가치를 법원이 평가할 게 아니라 시민이 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억하고, 기록하고 그리하여 비로소 존재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법원 캐비닛에 자료가 보관되겠지만 그건 시민이 볼 수 없다. 시민이 일상을 팽개치고 매 법정을 쫓아다닐 수도 없다. 까발리고 관찰하고 파고들어야 하는 사람은 기자다.

유죄냐 무죄냐의 문제를 넘어선다. 법원행정처 보고서를 놓고 어느 심의관과 피고인은 “아이디어 차원에서 한번 적어본 것일 뿐”이라지만 아이디어 차원에서라도 이런 것을 적을 수 있나 싶다. 판결을 정부 운영 협력사례로 제시하고 헌법재판소를 무력화하는 방안을 구상한 대목이 있다. “보고서를 작성할 당시에는 외부에 공개될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대외비가 전제라면 법관 독립을 침해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해도 되나. 법원행정처 보고서는 서랍 속 일기장과 다르다. 관여된 이들은 대부분 법관이다.

재판은 더디게 진행되고 사회의 시계는 빠르게 간다. 역사 속 어딘가에 사법농단 재판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언제까지 존재할 수 있을까. 어쨌든 나는 기사를 쓴다.

 
 
/이혜리 경향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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