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판 중앙일보에 토드 헨리의 ‘서울, 권력 도시’ 서평과 함께 지도가 실렸다. 1929년 경성에서 열린 ‘조선박람회 관광안내조감도’다. 넓게 펼쳐진 경복궁 전면으로 중앙청이 눈에 박혔다. 초등학생 때 처음 본 중앙청은 압권이었다, 화강암 틈새로 이끼가 묻어난 돌건물의 위용에, 조선총독부 청사로 건축되었다는 역사의 무게에 숨이 멎는 듯했었다. 요즈음도 광화문을 지날 때마다 어린 날의 전율이 생각난다.

총독부 청사로 시작한 중앙청은 대한민국 현대사를 오롯이 간직한 공간이었다. 아베 노부유키 조선 총독이 존 하지 미군 중장에게 항복 문서를 내밀고, 제헌 국회가 개원하고, 건국 헌법을 공포하고, 초대 정·부통령 취임식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을 그곳에서 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집무실로 썼고, 김일성의 인민군이 조선인민군 사령부로도 이용하였다. 1968년에는 ‘광화문’을 정부종합청사 앞 옛 자리에 다시 세웠다. 전두환 시대에 이르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기능을 바꾸었다. 나라 살림이 이렇게 커졌으니 총독부 건물을 극복하자는 결의가 있었음직 하다. 그런데 김영삼 전 대통령이, 큰 돈을 들여 개축한 국립중앙박물관의 철거를 명했다. 광복 50주년에 맞춘, 철학과 출신 대통령의 반일 이벤트였다.

토드 헨리는 “한국 정부의 조선총독부 철거 결정이 과거를 침묵시키는 협소한 반(反)정치였다는 점에서, 조선의 흔적을 지우려 한 일제와 기분 나쁠 정도로 닮았다”고 했다. 스페인 톨레도 대성당이 생각났다. 정복자 이슬람이 가톨릭 성당을 다치지 않고 이슬람 사원을 덧씌운 공존(共存)의 구조다. 늦은 오후 햇살이 뉘엿한 창으로 자유롭게 비둘기가 날고 들어 평화를 더 했다. 이스탄불의 소피아 성당도 마찬가지다. 이슬람 사원 회벽이 벗겨지면서 군데군데 가톨릭 성당의 성화(聖畫)가 드러났다.

“창덕궁의 금천교 방향은 일제가 왜곡하였으니 지금이라고 복원해야 한다”라는 기사가 떴다. ‘왜곡’이 되었다 하더라도 80년도 더 된 일일테고 필경 사연이 있었을 테다.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그걸 바로 잡자니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타던 등·하교 버스는 남대문을 돌아서 꺾어졌다. 국보 제1호 남대문 앞 철제 쪽문에 채워진 자물쇠가 3년 내내 마음에 걸렸다. 버스 차창으로 자물쇠의 ‘U.S.’ 표시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남대문의 미제 자물쇠처럼, 바로 잡을 필요가 뚜렷하면 숨 쉴 틈도 없이 빨리 바로 잡아야 한다. 불필요하게 복고적으로 바로 잡겠다면, 그 또한 역사 지우기이고, 반역사이자, 반달리즘이다.

/홍승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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