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통제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에 더 큰 즐거움을 느낀다. 자신의 힘으로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즐거움과 성취욕을 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자신의 노력으로 무언가 이뤄지는 그 놀라움을 경험하는 것은 커다란 만족감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경우라도 “내가 스스로 선택한 거야”라고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참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 그래서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스스로 통제감을 갖기 위해서다. 상황 통제에 대한 신념이 스트레스를 매우 효과적으로 감소시킬 수 있다.

하지만 ‘통제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과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우연히 벌어진 교통사고 또는 미·중 간 무역전쟁이 일어나는 일 등(물론 원하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길 바란다)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통제 불가능한 일을 걱정할 때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한다. 상황이 달라지기를 바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내 방식대로 움직이라고 설득하고, 앞으로 벌어질 나쁜 일을 막으려다 보면 심신이 지치게 마련이다. 통제 가능한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할 에너지만 사라진다.

난 세상에 대해 별 불평을 늘어놓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마도 통제감 때문일 것이다. 어릴 적에는 세상을 바꾸고 싶은 꿈을 꾸었다. 젊고 자유로워서 열정이 넘치고 상상력에 한계가 없을 때,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가졌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내 자신을 먼저 바꾸는 것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을 변화시켜도 변화시킬 일이 다시 생긴다. 게다가 이는 내가 함부로 바꾸고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이 그만큼 쉽지 않았다.

좀 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게 되었을 때, 난 내 자신이 먼저 바뀌면 세상도 쉽게 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은 내가 쉽게 통제할 수 있다. 통제할 수 없는 일이 나에게 실제로 벌어진다면, 그건 내 운명이고 팔자소관이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만 잘해도 인생이 바뀌고 세상이 바뀐다. 통제력의 균형을 잡고 싶다면 내가 무엇을 통제할 수 있고 무엇을 통제할 수 없는지 분명한 기준과 현명한 분별력을 갖추어야 한다.

“주여, 제가 바꿀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한 마음을 주시고, 제 힘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이 두 가지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미국의 유명한 개신교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Karl Paul Reinhold Niebuhr, 1892~1971)의 기도문 ‘평온의 기도(The Serenity Prayer)’에 나오는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마음을 비울 줄도 알아야 한다.

/윤경 변호사

서울회, 더리드 공동법률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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