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면서 일이 순조롭게 잘 풀리는 시기도 있지만, 어려움에 봉착하여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궁박한 시절도 있다.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와 같아서 일이 잘 풀린다고 너무 자신만만하거나 잘 안 풀린다고 낙심하는 등 일희일비(一喜一悲)할 것은 아니다. 맹자는 진심장구상(盡心章句上)에서 “궁즉독선기신(窮則獨善其身), 달즉겸선천하(達則兼善天下)”라고 말하였다. 이는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에는 홀로 자신을 수양하고, 자신의 뜻이 펼쳐지는 시기에는 사람들과 더불어 천하를 위해 역량을 발휘하라는 의미이다.

신독은 ‘대학’과 ‘중용’에 실려 있는 말로서, “군자는 혼자 있을 때에도 삼가고 조심한다(君子愼其獨也)”는 뜻이다. 신독은 자신을 속이지 않고(毋自欺),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에게 보다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중인환시리(衆人環視裡)의 상황에서는 대부분 처신을 신중하게 한다. 신독을 통해 천리(天理)와 연결된 선한 성품을 유지하며 외부세계에 흔들리지 않는 중심축을 지탱하여 평상심을 견지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득의냉연(得意冷然), 실의태연(失意泰然)”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영국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국부론’과 더불어 ‘도덕감정론’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그는 자신의 묘비에 ‘도덕감정론’의 저자로 새겨지기를 원할 정도로 ‘국부론’보다 더 중요한 저서로 생각했다. 그는 ‘도덕감정론’에서 인간은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라고 할지라도 기본바탕에는 이와 상반되는 선한 본성도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사람의 운명과 처지에도 관심을 갖는다. 또한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을지라도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기도 한다. 그는 자기 인격에 대한 사랑으로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공감이 나오는 것은 마음 속에 ‘공정한 관찰자(impartial spectator)’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공정한 관찰자는 자신의 행동이 옳은지 공정하게 알려주는 가상의 존재이다. 다른 사람이 보든 안 보든 관계 없이 언제나 스스로 자제하도록 만드는 강력한 힘은 우리를 항상 지켜보고 있는 무형의 존재인 공정한 관찰자로부터 나온다고 보았다. 어깨 너머로 나를 바라보며 내 행동이 옳은지 알려주고 판단해 주는 공정한 관찰자 덕분에 우리는 한걸음 물러서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신독은 교양과 인격을 갖춘 지성인이 되기 위한 동양의 전통적 수양 방법이다. 오늘날 SNS의 범람으로 홀로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는 신독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애덤 스미스가 말한 공정한 관찰자가 우리의 마음속에 존재한다고 상정한다면, 자신만이 이 세상에 특별한 존재는 아니고 바람 속의 먼지(dust in the wind)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 겸손한 자세로 삶의 정도(正道)를 찾아갈 수 있게 된다.

 
 
/김용섭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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