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하는 게 뭐가 어려워서…. 진즉 했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어요.” 조정이 성립된 후 상대방은 의뢰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다. 대답하는 의뢰인의 목소리는 조금씩 떨렸고, 결국 울먹이면서 말을 마쳤다.

의뢰인은 1년 전쯤 나를 찾아왔다. 30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한 남편은 병중이었던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이혼을 요구했다. 알콩달콩 살지 않았지만 별문제 없이 지내온 세월이었다. 별안간 뒤통수를 맞은 의뢰인은 협의로 이혼을 진행할 생각이니 재산분할 합의서만 작성하고 다 끝내고 싶다고 했다. 평온했던 황혼의 결혼 생활은 남편의 느닷없는 고백, 그러니까 오랜 기간 동안 만난 여자가 있었고, 여생을 그 여자와 함께 하고 싶으니 이혼을 해달라는 말과 함께 막장 불륜극이 된 것이다.

의뢰인은 장성한 아이들 혼인이 남아있으니 이혼만은 안 된다며 정리하고 돌아와 달라고 요구했지만, 남편은 자신과 여자의 행복이 중요하다며 거절했다. 소송이라는 진흙탕 싸움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의뢰인도 결국 이혼하기로 맘을 굳히고 재산분할만 요구하고 다른 조건은 내세우지 않았다.

그로부터 반년의 시간이 흘렀을 때, 의뢰인은 남편의 여자를 상대로 위자료청구소송을 하고 싶다며 다시 찾아왔다. 남편의 여자에게 어찌어찌 연락을 하게 되었는데, 잘못한 게 없다며 너무 당당한 태도에 분노가 치밀어 올라 참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위자료 금액을 최대로 청구하고, 주거래 은행 계좌도 가압류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받아 내겠다면서 분을 참지 못했다. 평생을 가정주부로 살아왔고 이혼 후 특별한 소득활동이 없는 의뢰인이 감당하기엔 적지 않은 수임료였을 텐데, 기꺼이 지급하고 소송을 맡기고 싶다고 할 정도로 의뢰인의 의지는 강했다.

위자료가 인정될 증거는 명백했지만, 소장을 송달 받고 대리인까지 선임했음에도 조정기일이 열리는 날까지 상대방이 전혀 답변을 하지 않아 조정이 쉽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조정기일에 상대방은 위자료 액수만 조정해달라고 요구했고 비교적 수월하게 조정이 성립될 수 있었다. 그리고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상대방은 의뢰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긴 것이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것을 자존심의 문제로 생각한다. 미안한 일을 했으면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당연한데, 그 말 한마디를 내뱉는 순간 자신의 자존심도 함께 떨어지고 갑자기 패자가 된다고 생각한다. 갈등상황에서 먼저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게 쉽지 않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미안하다는 말은 용기 있는 사람, 비겁하게 숨지 않고 감당하려는 사람이 할 수 있다. 때론 절대 풀어질 것 같지 않던 응어리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에 쉽게 풀어지고 식어버리는 것이 인간지사 아니던가.

말 한마디가 가진 위력은 크고 위대하다. 꽁꽁 얼어붙은 땅을 녹이는 따뜻한 온기가 되어 너와 나의 마음 밭에 화해라는 싹을 틔운다. 이제 곧 봄, 겨우내 꽁꽁 얼어붙은 마음 밭을 아직도 껴안고 있다면 이제 슬슬 녹여야 할 때. 우리의 마음 밭에도 싹이 틔길 겨울의 끝자락에서 바라본다.

 
 
 
/임주영 변호사

서울회·법률사무소 Young&Partn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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