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독감 예방접종 예정일이 훨씬 지나 더 미룰 수 없는 시기가 닥치자 오늘은 꼭 데려가리라 마음먹은 날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조정할 수 없는 일정만 가득했다. 학부모 회의, 변호인 입회, 의뢰인 상담과 서면 마감. 거기에 병원을 추가해야 한다. 머릿속이 바쁘다.

아이의 일과표까지 고려해 빈 시간을 짜내고 모든 동선에 대한 세팅을 끝낸 후 전투태세로 들어가기 직전, 아이 눈에서 다래끼를 발견했다. 동선에 안과 추가. 아이에게 접선 장소와 시간에 대한 지령을 내린 후 집을 나섰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렇 듯이 일은 예상과 달리 흘러가는 법이다. 회의와 입회를 마치고 보니 안과 일정은 이미 날아갔고 소아과 일정도 또 포기해야 할 참이었다. 이른 저녁 같은 늦은 점심을 입에 물고 사무실로 향하는 도중, 의뢰인의 상담일정 변경 연락이 왔다. 매우 미안해하시는 의뢰인께 진심으로 “제가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세상일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아 생긴 조그만 기쁨을 만끽했다. 그렇게 마음을 졸이며 이동했건만 결국 진료시간 종료 직후에야 아이를 겨우 만났다. 허탈해하는 나를 아이가 토닥이며 말했다. “엄마, 소아과 안 가도 24시간 하는 병원에 가면 어린이도 독감 예방접종 해준다고 친구들이 그랬어요.”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해결책이 튀어나왔다.

반신반의하며 병원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갓 퇴근한 전투원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대기 의자에 쭉 앉아 있었다. 무심하고 지친 표정들이었지만 서로를 보는 시선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접종을 마친 후 퇴근하는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서면을 마감하기 위해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늦은 저녁 출근길, 도로 끝에 걸려있는 휘영청 밝은 보름달을 보고 잠시 멍해졌다. 그리고 “아, 오늘은 참 운이 좋았어”라고 중얼거렸다. 비록 오늘은 아직도 한참 남았지만 말이다.

 

 

/이영주 변호사

서울회·법률사무소 다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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