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종중 위원장의 직무집행정지가처분사건에서 졌다. 그 결과 1년 전 대다수 종원들의 뜻에 따라 선출된 새 위원장은 그 직무가 정지되었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대다수 종원들의 무관심 속에 몇몇 종중 집행부원들이 종중 재산을 착복해온 사실이 드러났으나 시간이 너무 흘러 그 피해를 회수하기도 어렵고, 공소시효로 인해 형사처벌도 어려웠다. 이에 젊은 종원들의 의견에 따라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졌고, 문제의 종원들은 제명이 되었고, 이제 종중은 대다수 종원들의 뜻에 따라 굴러가기 시작했는데, 비리로 제명당한 전 위원장 측이 현 위원장을 상대로 직무집행정지가처분을 신청하였고, 그 신청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유는 종중 위원장 선출 과정에서의 절차 위반이었다.

일반인의 눈에는 부정의가 정의를 이겼다. 종원들로부터 배제당한 전 위원장 측은 사법부로부터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인받은 양 떠벌리고 다니고 있고, 새롭게 구성된 종중 집행부는 소위 ‘멘붕’이 되었다.

변호사가 전관이 아니어서, 힘이 없어서 이런 결정이 나온 거라고 거품을 물고 성토하는 종원들도 있고, 나쁜 놈들의 신청이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느냐면서 울분을 토하는 종원들도 있었다. 종중은 새로운 집행부가 꾸려진 이후로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아무 일 없이 너무나 잘 운영되어 오고 있었다. 절차 위반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보전의 필요성에 대한 검토가 너무나 절실했다. 절차 위반을 이야기한 재판부의 의도를 모르지 않으나 이러한 결과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을 텐데 정말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인지…. 그 좌절감은 겪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재판이란 게 판례나 법리를 따르기 마련이긴 하지만 사건은 기성품이 아니다. 사건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모두 천차만별이기에 법리라는 형식적인 잣대만으로 의율(擬律)되기 어려운 사건들이 너무나도 많다. 나는 사건의 그 특별한 사정을 찬찬히 들여다 봐주는 판사가 너무 고맙다. 그 판사의 그런 태도로 인해 내가 비록 어떤 사건에서 불이익을 입을 때가 있어도, 그 판사가 여느 판사와 달리 사건의 면면을 들여다보고 혹여나 나올 수도 있는 결과의 부정의를 바로잡으려 애쓰는 모습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나는 그 판사를 미워하지 않는다(그 판사가 항소심 1회 기일에 변론을 종결해버려 나는 선임비를 환불해주어야 했다. 또 1심에서 내가 승소한 사건을 그 판사 때문에 1년 넘게 항소심 재판을 해야 했다. 심지어 복대리로 들어간 재판에서 내용 파악을 하지 못해 버벅거리는 나를 향해 앞으로 내용을 모르면 복대리 들어오지 말라는 독설을 날리기도 했다). 그 판사가 사건들마다 그런 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 그 개인이 치러야 하는 희생이 얼마나 큰지도 알기에 더더욱 고맙다. 1심도 아니고 항소심에서 그런 정성을 기울이는 판사가 과연 몇이나 될지.

끊임없이 관심을 받고 싶어 떼쓰는 아이처럼, 변호사인 나는 상식에 따라 부정의한 결과가 나오지 않도록 애쓰면서 사건을 들여다 봐주는 그런 판사가 아쉽고 고맙다. 능력 있는 법조인이 모여 있는 서울 소재 법원의 판단이 아쉬운 이유이기도 하다. 재판은 머리로만 하는 게 아니기에. 정해진 잣대로 일률적인 판단만을 한다면 장차 AI의 등장으로 사라질 직업에 법조인이 포함되는 길을 막을 수 없으리라.

 

 

/박정교 변호사·전북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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